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점진적으로 강을 넘어 바다로 흘러가며 깊어진다. 작가의 현재 삶에도 영향을 끼치는, 30여 년 전의 젊은 날을 회상하며 쓴 에세이.
글은 그녀가 옛날 사진을 훑어보다가 오래전 뉴욕의 아파트에서 베이비샤워를 했던 사진을 보며 시작한다. 그때까진 행복했던, 모든 것이 조화로웠던 그녀는 몇 달 후 그녀에게 닥칠 크나큰 시련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녀의 딸 애나는 심장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그녀는 자신의 품이 아닌, 차디찬 묘에 뭍혀야 했고 이 슬픈 일을 기점으로 그녀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과연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이 정상일 사람이 누가 았을까? 하물며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그 심정. 가히 상상할 수도 없다. 마음이 아프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고 그녀의 몸은 조금씩 망가져 갔고, 곧이어 그녀의 정신도 앗아갈 정도로 위험해졌다. 현재 50대의 그녀가 20대 때의 일을 다시 꺼내며, 흡사 저자와 함께 시간여행을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매우 상세하게 묘사된 정신병원의 이야기와 우울증 병에 대한 이야기. 비록 난 아이를 잃은 슬픔을 알지 못하지만, 나 또한 우울증을 앓던 사람으로 그녀의 묘사와 글에 상당 부분 공감하게 된다. 밝게 쓰이지 않은 글이지만, 딱히 어두컴컴한 병원 복도를 걷는다는 느낌보다는 저자와 함께 병동을 거니는 느낌이다. 놀라웠던 점은 그녀가 우울증에 관한 글을 쓰며 언급한 여러 사례들과 그 역사적 배경들이다. 예를 들자면, ‘멜랑콜리아’라고 익히 듣던 단어가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번역해서 만든 것(melan은 ‘검은, 어두운. 흐릿한’이라는 뜻이고, khole는 ‘담즙’이라는 뜻)이란 것이 내가 책을 읽으며 가장 놀라웠던 점이다. 가감없는 그녀의 솔직한 우울증에 관한 심정이 내게 위안이 된다. 나만 그것을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 지구 반대편도 나와 동일한 감정을 느꼈던 사람이 있다는 것.
광기를 완화하려면 치료보다는 예방에 힘써야 한다.
-p.148
병원, 그냥 병원이 아니라 정신 요양소,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은 그 기만극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우리가 겉으로 내보이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제 게임은 끝났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멀리 표류했는지를 계속 비밀로 숨기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병원은 더 이상 세상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된 우리를 받아들였다.
-p.158
#크림슨리브
👍
불안할 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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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폰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서평 마감 시간에 맞춰 글을 쓴다. 📝
‘팬데믹 테마 소설집’이라는 낯선 이름이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게 된 요즘. 여름과 겨울, 도시와 시골이 오간 내용을 다룬 이 소설을 접하게 되서 참 재밌었고 현실적이다. 단순한 팬데믹 현상을 보여준 것이 아닌 그로 인한 실직과 TK 봉쇄, 비슷한 시기에 발화한 ‘n번방’사건까지,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을 약간의 조미료로 각색했다. 네 편의 단편 소설들은 슬프고 아팠던, 지금까지 진행중인 2020년 대한민국의 쓰라린 표면을 글로써 보여주고 있다.
며칠이 지나도록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대한민국 청도를 배경으로 한 단편집의 두전째 소설, 「특별재난지역」. 주인공의 나이가 언급되지 않지만, 어림잡아 60대 여성으로 보여지는 ‘일남’을 기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어떻게 그녀를 설명할까,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부친 대명의 딸이고, 손녀 가영의 할머니이고, 딸 상희와 아들 상진의 엄마이고, 남편 경호의 아내인 ‘일남’이다. 미혼부인 아들 상진을 대신해 손녀 가영를 키우며 치매 걸린 부친을 돌보던 그녀의 삶은 전염병으로 인해 보상받지 못한 모습이 오래도록 내 마음을 아리게 한다.
그동안 일남이 부친에게 바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건강하게 오래 계시다가 좋은 날 편히 가시는 것, 호상이면 족하다고 생각해왔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며 손 한번 잡아드리고 싶었고, 그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듣고 싶었다. [⋯]동생과 함께 빈소를 지키면서 주변 친지며 이웃 사람 모두 불러 조문을 받으려 했다. 그간 일남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아버지 모시느라 수고했다고, 고생 많았다는 공치사를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기대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내게 그만한 자격도 없느냐고,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p.93, 「특별재난지역」
#크림슨리브
쓰지 않을 이야기
조수경 외 3명 지음
arte(아르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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