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에 살던 동물들은 농장주 존스의 살육과 농장의 가혹한 생활에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힘으로 혁명을 일으켜 농장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권력의 주인이 된 동물들은 한동안 행복했으나, 혁명의 주도층이었던 돼지들이 귀족화되며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혁명 지도자였던 스노볼과 나폴레옹은 끊임 없는 갈등을 겪었고, 스노볼은 나폴레옹의 개들에게 축출을 당한다. 그 후 끝 없는 거짓과, 사탕발림. 그 속에서 벌어지는 나폴레옹 중심의 돼지 귀족화, 나폴레옹의 영웅화.
나폴레옹과 인간과 하는 카드놀이를 지켜보던 동물들은 인간과 나폴레옹을 휙휙 바라보지만, 이미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알 수 없다. 평등을 이야기하며 혁명에 가담한 돼지도 결국 그들이 그리도 증오하고 혐오했던 인간과 다를 바가 없어지게 됐다.
이 소설은 소련에만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이 소설이 갖는 의미는 특정 시대에만, 특정 정치 집단에만 해당되는 것을 아득히 넘었다. 당대의 현실 뿐 아니라 현재의 현실에도 해당하는, 그래서 시대를 관통하는 소설이다.
부패한 독재자는 어디에나 있다. 권력 다툼에서의 폭력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다. 복서와 클로버 같은 동물들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고, 우리 또한 그 동물들이 될 수도 있다. 소련이 사라지고, 세계가 자유로워졌다 하더라도 우리가 동물농장을 읽고, 곱씹는 이유는, 이 소설이 바로 부패의 시작, 부패의 근본을 향해있기 때문이다.
권력의 주인을 바꾸기만 하는 혁명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고,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며 언제나 시민들이 지도자를 감시할 수 있는 사회. 다시 말해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 발휘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진정한 혁명의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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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의 기본은 취재로부터 시작돼요. 그런데 이명박ㆍ박근혜 정권 9년 동안 언론 장악, 방송 장악이 방송사 상층부뿐 아니라 일선 기자에게까지 체화되면서 저널리즘이라는 단어가 실종된 것 같습니다."
"저널리스트는 사라지고, 회사원으로서의 생존경쟁만 남은 거죠. ... 받아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실종된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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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해방되고, 전쟁을 겪고, 독재를 겪고, 민주화를 이뤄내어 지금까지 오는 그 기간동안 엄청난 권력을 갖고 영향력을 떨치는 언론.
우리나라에서 언론의 개념이 지금과 같은 개념으로 잡힌 것은 100년이 조금 넘는다. 그 당시의 지식 생산자인 기자들은 한국 사회의 엘리트가 되었고, 그들은 우리를 '계몽'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언론계를 이끌어왔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계몽했는가? 그들은 국가 권력에 충성했고, 그들은 '땡전뉴스' 라는 이름으로 비아냥을 받았다. 그 사이 국가가 압축성장하고, 시민들은 말길이 트였다. 생각의 수준이 올라갔다. 그럼에도 엘리트들의 계몽의식은 깨지지 않았다. 독재 정권이 철권통치를 해도, 항쟁이 벌어지고 사회가 바뀌어도 그들의 머리는 바뀌지 않았다.
디지털 시대가 되었고, 누구나 컨텐츠를 만드는 시대가 됐다. B급 언론인 김어준이 영향력이 큰 언론인 2위를 하고, 유시민 장관의 알릴레오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한 유튜버의 주도로 수십만이 서초동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시민은 이제 자신의 판단 기준을 갖기 시작했다. 더 이상 계몽되어지는 객체로서 백성이 아니라, 스스로 계몽할 수 있는 주체로서의 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언론은 그러한 시대상을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회수 장사로 연일 제목장사를 하고 있고, 검찰의 말이라면 뭐든지 받아쓰기를 하고 있고, 대기업 광고주를 위해서면 총알받이기 되어준다. 진보와 보수가 할 것 없다. 삼성에 비판적이었던 한겨레 기자가 이재용 회장의 쇼핑백을 들어주는 시대가 된 것이다. 권력이 되어버린 그들은 또 다른 권력을 찾아 그들의 개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쪽팔리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러면서도 언론은 자신들이 엘리트라는 착각에 빠져산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는 오만함이 결국 시민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고, 1인 미디어에 처절하게 밀리게 되는 중요한 지점이 되고야 말았다.
한국의 저널리즘은 오만으로 시작되어, 오만으로 종말을 고하고 있다. 진정한 언론의 개혁은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인식의 개혁, 처절한 자기반성이 기반으로 자리잡혀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 결국 시민의 힘이 중요하다. 총칼로 권력을 쥘 수 있을거라 생각했던 오만한 군사독재정권을 평화롭게 물리쳤던 시민의 힘으로 그들이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야 한다.
쉼 없이 걸어 촛불을 만났다
최민희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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