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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콜링 (제37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의 표지 이미지

캣콜링

이소호 지음
민음사 펴냄


마스카라로 서로의 음모를 빗었다


다리에 드리운 밤의 가지는 점점 길어졌다


보푸라기처럼 닿으면 닿을수록 망가지는 우리


언제나처럼


사랑한다는 말만 남고 우리는 없었다


- ‘별거’, 이수호


밤마다 뒤척이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 집 침대는 외롭다


거대한 캔버스


죽은 맨드라미와 모빌


부싯돌처럼


서로의 머리가 깨지는 줄도 모르고


낡은 성냥갑에 갇혀 있는


자작나무


불길한 우리는 침묵했다


숲은 겨우내 거울 안에서


우거지고 있었다


반짝이는 야광별


순한 처마에 흐트러지는 빗방울


마주 본 등은 익숙하고 무서웠다


나는


쓸모없는 그림이 되었다


- ‘한때의 섬’, 이소호


나는 나 같은 너에 대해 말한다 당신이 파 놓은 구멍에다 들어가 보는 고양이처럼 너라는 나에 대해 말한다 모자란 2월의 날들을 걸어 놓은 옷걸이 푹 삶은 하얀 양말을 신고 건너간 수화기 너머에는 내가 버려 놓은 말들이 떨고 있다 먼지 위에 쌓아 올린 일기처럼 문턱을 넘지 못한 발가락처럼 나는 나보다 멀리 가 떨고 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있다

나는 네 침대에 놓인 긴 머리카락보다 말이 없다 말을 뒤집어 우리는 뒷면을 응시한다 하루의 뒷면, 칫솔의 뒷면, 크랜베리 빵의 뒷면, 미키마우스 티셔츠의 뒷면, 그리고 섬의 뒷면 당신은 잘린 손톱처럼 외롭다 섬, 섬 나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 꺼진 등대를 생각한다

- ‘혜화’, 이소호


너는 쓴다

아름드리나무 사각사각 부서지는 햇볕 속에
당신은 나 홀로 종이 위를 걷게 하고. 거기 섬, 숲, 나무, 다리 없는 의자, 아귀가 안 맞는 조개껍데기, 무리를 짓다 홀로 툭 떨어져 버린 새 한 마리를
쓴다 페이지의 끝에서 너는
마침표 한 줌을 사고

다시
나는 적힌다
만남이 커피로 맥주로 침대로
너무나 익숙해진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 원래 인물이란 입체적인 거잖아
변하는 게 뭐가 나빠?
나는 따옴표를 열고
너의 문장으로만 울었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 그럼에도 좋은 사람.”

바닥에 널브러진 뻣뻣한 빨래들처럼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흩어지다 마구잡이로 입혀진다
너의 알몸 그대로 나는

슬픔이 리듬을 잃어 가는 일을 묵묵히 바라보며

서로의 눈동자 속을 잠영하는

이제 우린

인사는 가끔 하고 안부는 영영 모르는 세계로 간다

이 빼기 일은 영

아무것도 아닌 채로

적힌다. 소호야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 색 색깔로 칠해 봐. 밀가루 반죽처럼 온종일 치대다 어거지로 뚝뚝 떨어졌던 시간을, 그려 봐. 멀고도 먼 눈을, 손을, 그보다 더 멀리멀리 놓여질 등을, 상상해 봐. 검은 크레파스로 덧칠한 우리 둘만의 밤을. 잘 봐 이제 거길 클립으로 파서 단 하나뿐인 세계를 만들자

어때 이 정도면 더는 슬프지 않지?

우리는 숯처럼 새까만 숲을 걸었다
네 뒤를 졸졸 따르며 가끔
내가 실수로
클립으로
도려낸 너의 마음에
가슴을 대었다
떼 본다
춥다

- ‘사라진 사람과 사라지지 않은 숲 혹은 그 반대’, 이소호
2019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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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1 Corinthians 13


말은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만 있을 뿐 재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느꼈다.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p. 285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마스 만 지음
열린책들 펴냄

읽고있어요
2023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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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이렇게 은밀한 일을 벌이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래서 갑자기 죽어 버리면 그런 비밀이 전부 까발려져 마치 살아있던 것 자체가 커다란 음모였던 양 보이게 되는 걸까. - ‘음모’ - p. 171

인내상자

미야베 미유키 지음
북스피어 펴냄

2023년 6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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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은 단지 말들을 떠돌게 하고 싶었다. 대단한 예술 작품, 베스트셀러, 히트작, 영원불멸의 클래식 따위를 만들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떤 생각, 아이디어, 논평, 꿈, 일상, 작은 이야기, 소소한 논쟁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슬프게 스치고 사라졌으면 했다. - p. 71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약속과 의무라는 규약 너머의 행동이 필요하다. 이것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폭력과 파괴, 선택과 충돌이 필연적이라는 생각을 극복할 수 있을까. - p. 115

…스크롤!

정지돈 (지은이) 지음
민음사 펴냄

2023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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