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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지은이)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읽었어요
춥고 배고픈 이에게 따듯한 밥 한 끼 지어먹이는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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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
그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디르던 밭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는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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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밤의 끝에서는
까닭 없이 손끝이
상하는 날이 이어졌다
책장을 넘기다
손을 베인 미인은
아픈데 가렵다고 말했고
나는 가렵고 아프겠다고 말했다
여름빛에 소홀했으므로
우리들의 얼굴이 검어지고 있었다
어렵게 새벽이 오면
내어주지 않던 서로의 곁을 비집고 들어가
쪽잠에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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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곡 빌라
몇 해 전 엄마를 잃은 일층 문방구집 사내아이들이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잠을 잔다 벌써 굵어진 종아리를 서로 포개놓고 깊은 잠을 잔다 한낮이면 뜨거운 빛이 내리다가도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들면 덜컥 겁부터 먼저 나는, 떠나는 일보다 머무는 일이 어렵던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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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말
그렇게 들면 허리 다 나가 짐은 하체로 드는 거야 등갓 잘보고 모서리 먼저 바닥에 놓아 아니 왼쪽으로 조금 더 왼쪽으로
가는 말들 지나
외롭지? 그런데 그건 외롭운 게 아니야 가만 보면 너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도 외로운 거야 혼자가 둘이지 그러면 외로운게 아니다,
하는 말들 지나
왜 자면서 주먹을 쥐고 자 피 안 통해 손 펴고 자 신기하네 자면서도 다 알아,
듣는 말 지나
큰비 지나, 물길과 흙길 지나, 자라난 풀과 떨어진 돌 우산과 오토바이 지나, 오늘은 노인 셋에 아이 둘 어젯밤에는 웬 젊은 사람 하나 지나, 여름보다 이르게 가는 것들 지나, 저녁보다 늦게 오는 마음 지나, 노래 몇 자락 지나, 과원 지나, 넘어짐과 일어섬 그마저도 지나서 한 이틀 후에 오는 반가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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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민박
민박에서는 며칠째
탕과 조림과 찜으로
민물고기를 내어놓았습니다
주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제 점심부터는 밥상을 물렸고요
밥을 먹는 대신
호숫가로 나갔습니다
물에서든 뭍에서든
마음을 웅크리고 있어야 좋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면
동네의 개들이 어제처럼 긴 울음을 내고
안개 걷힌 하늘에
별들이 비늘 같은 빛을 남기고
역으로 가는 첫차를 잡아타면
돼지볶음 같은 것을
맵게 내오는 식당도 있을 것입니다
이승이라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이곳은
공간보다는 시간 같은 것이었고
무엇을 기다리는 일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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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암동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느 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
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
왜 우시냐고 물으니
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
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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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일기
비가 더 쏟기 전에 약국에 다녀왔습니다 큰길에는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제 시내는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처연凄然이 가까워졌다면 기억은 멀어졌다”라는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비를 맞듯, 달갑거나 반가울 것 하나 없이 새달을 맞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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