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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신철규 지음
문학동네 펴냄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 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할수록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딱딱해지고 있었다
해변에 맨발로 서 있던 유가족
맨살로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을 때까지 악몽을 꾸어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
학살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꾸는 악몽 같은 것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피가 돌지 않고
눈이 심장과 바로 연결된 것처럼 쿵쾅거렸다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곳이 지옥이다
꽃도 나무도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곳
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못처럼 박혀 있는 곳
죽은 마음, 죽은 손가락, 죽은 눈동자
위로받아야 할 사람과 위로할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는 것인가
우리는 떠올라야 한다
우리는 기어올라야 한다
누구도 우리를 끌어올리지 않는다
가을이 멀었는데 온통 국화다
가을이 지난 지가 언젠데 국화 향이 이 세계를 덮고 있다
컴컴한 방에 검은 비닐봉지를 쓰고 앉아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힌다
꿈속에서도 공기가 희박했다
해변은 제단이 되었다
바다 가운데 강철로 된 검은 허파가 떠 있었다
<검은 방>
고개를 기울이면
남산타워가 쓰러지고
건물 유리창들이 유성우가 되어 쏟아지고
화면에서 글자들이 흘러내리고
구름에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고개를 기울이면
당신의 어깨가 한쪽으로 꺾이고
한쪽 입술이 올라가고
오른쪽 눈에 눈물이 가득 차고
기억이 주르륵 쏟아진다
고개를 들고 물을 마실 때는 스르르 감기는 눈
우리는 고개를 기울이고
서로의 입에 입을 맞추고
서로의 눈에 고인 눈물의 마시고
서로의 귀에 귀를 가져다 대고
어깨를 비빈다
당신의 귓바퀴는 트랙을 닮았다 모래시계처럼
당신 귓속에서 흘러나온 모레가 내 귓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우리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일 때마다
서로의 귀가 스칠때마다
같은 노래가 급류가 되어 우리의 심장을 지나간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마음을 보내고 있었다
<연인>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그녀는 사과를 매만지며 오래된 주방을 떠올린다
그녀는 조심 조심 사과를 깎는다
자전의 기울기만큼 사과를 기울인다 카레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속살을 파고드는 칼날
아이는 텅 빈 접시에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을 손가락에 물을 붙여 하나씩 적는다
사과를 한 바퀴 둘레 때마다
끊어질 듯 말 듯 떨리는 사과 껍질
그녀의 눈동자는 우물처럼 검고 맑다
혀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
그녀 속에서 얼마나 오래 굴렀기에 저렇게
둥글게 툭툭,
사과 속살은 누렇게 변해 가고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입속에
사과 조각을 넣어 준다
한입 베어 물자 입안에 짠맛이 돈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
< 슬픔의 자전>
서평/ 슬픔을 이야기하는 시
오랜만에 너무 마음에 드는 시집이었다. 인상 깊은 시가 많아서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시를 고르느라 시간이 걸렸을 정도였으니. 시의 길이도 꽤 길다. 그만큼 감정이 많이 담겨 있다. 대부분 고통, 슬픔의 감정이어서 이 시인은 슬픔의 시를 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연인]이라는 시는 야하게도 느껴지고 음흉하고 상상하게 된다. 이런 시가 나는 참 좋다. 사람마다 해석하기에 다르고 읽을 때마다 다른 시. [슬픔의 자전]이라는 시는 전에도 읽어 본 적이 있었는데, 빈부격차에 대한 사회 풍자가 인상적이었다. '지구만큼 슬펐다'는 순수한 표현으로 그 상황이 맹렬히 풍자 되는 것이 참 인상 깊었다. 책의 제목으로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를 쓴 이유를 잘 알 수 있게 해 주는 신철규 시인의 대표적인 시 다. 다시 읽어도 마음이 먹먹해지는 시. 많은 것을 시사하는 시.
이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는 [검은 방]인데 세월호 이야기라는 것을 시를 읽으면서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거의 직접적으로 세월호를 언급한 내용이며 이토록 신랄하게 비판 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시로서 표현 되었기 때문에 더욱 감성적이고 와 닿는 면이 있었다. 나도 그때의 슬픔이 기억이 난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가만히 있다가 죽은 아이들. 누구도 끌어올려 주지 않아 스스로 기어오른 촛불들. 꿈속에서 마저 공기가 희박했던 국민들. 재단의 해변, 안산, 단원고, 세월호, 4월 16일.. 첫 구절부터 끝까지 숨이 턱턱 막히는 너무 슬픈 시. 세월호는 잊혀져서는 안 된다. 계속 곱씹어서 이 슬픔을 잊지 않아야한다. 나는 그걸 시는 잘 한다고 생각한다.
시는 힘이 있다.
슬픔의 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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