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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시애틀 추장 지음
더숲 펴냄

읽고있어요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밤에 날아다니는 불나방의 번쩍임 같은 것.
한겨울에 들소가 내쉬는 숨결 같은 것.
풀밭 위를 가로질러 달려가 저녁 노을 속에 사라져 버리는 작은 그림자 같은 것.
-류시화,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제게는 두 개의 머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머리로, 어른을 만났을 때 숙이고,
하나는 마음의 머리로, 좋은 책을 만났을 때 숙입니다.
이 책은 제가 가장 깊이 머리를 숙인 책입니다. 동시에 가장 소개하고 싶었던 책 중 하나기도 하죠.
일단 저자는 류시화 시인이지만, 그가 지은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은 아메리카 원주민, 흔히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추장들의 연설집이지요. 그들은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웅장했고 묵직했습니다. 시적이면서도 결의가 넘쳤죠. 그들과 제 사이에는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이 가로막고 있지만 그들의 철학과 신념에 저는 진심으로 감복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훌륭한 모든 인류의 선지자들이 모두 참혹한 멸망의 길을 걸었음에 더없이 참담했습니다.
이 책은 918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지만, 어느 것 하나 버릴 곳이 없습니다. 제가 평생을 가져가리라 확신하는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지요. 몇 날 며칠을 읽는 내내 이들을 꼭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 시간만으로도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진 지는 너무도 오래되었지요. 땅은 말발굽의 진동을 잊어 가고 하늘은 매의 날개가 일으키던 바람을 잃었습니다. 이때에 우리가 다시 들춰 봐야 할 것은 그 먼 옛날의 가르침 아닐까요.
2019년 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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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칼로리의 음식을 생산하기 위해 1리터의 물을 허비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의 두 배에 달하는 온실가스를 공기 중에 내뿜고 있고. 신문을 펼쳐봐. TV를 켜봐. 가뭄과 홍수, 태풍.
나쁜 소식 없이 하루도 지나가는 법이 없지만 기후 회의에서 내놓은 결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뿐이야. 그리고 테러는 온갖 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빈곤으로 잃을 게 없는 아이들이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하고 있고."
-제바스티안 피체크, 《노아》
.
이 책의 메시지는 굉장히 명백하고 더없이 직설적입니다. 메시지가 뚜렷한 작품은 많이 읽어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직설적인 작품은 또 처음이라 지금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하네요.
물론 단순히 직설적이기만 했다면 이 작품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이 소설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작품보다 메시지가 우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직접적인 작품의 경우 메시지를 위해 작품이 '희생'됐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메시지가 곧 사건의 중심이며 방해자의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 작품에 메시지를 잘 '활용'했죠.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닐라 독감'이라는 유행성 전염병이 전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지구, 독일 베를린의 길거리를 전전하는 노아는 자신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습니다. 그는 어느 날 총상을 입은 채 거리에서 깨어났고, 노숙자인 오스카가 노아를 돌보았죠.
어느 날 노아는 신문에서 어떤 그림을 그린 화가를 찾는 광고를 보게 되는데, 그것을 보고 머릿속에 섬광을 느낀 노아는 자신이 그 그림을 그렸다고 제보를 합니다.
그리고 노아가 제보 전화를 건 그 순간, 정체 모를 권력자들이 노아를 쫓기 시작합니다.
기억상실이라는 흔한 소재에, 환경보호라는 흔한 주제죠. 하지만 『노아』는 서사적 긴장감을 절대 놓치지 않은 채 플롯을 끝까지 힘있게 이끌어갔고, 결국 저라는 독자 한 명을 만족시켰습니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나는 진실도 제법 놀라웠고, 결말도 깔끔해서 좋았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이제 예술가들의 임무는 이미 존재하는 것을 얼마나 새롭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라 하겠네요.
600쪽에 달하는 제법 두꺼운 책이었지만, 전개감 있고 재미있어서 읽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사회파 스릴러, 이 작품을 시작으로 아마 서양 스릴러를 많이 찾아 읽게 되겠네요.

노아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단숨 펴냄

2019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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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수 있어! 그러니까 살아야 해! 힘내서 어른이 되어줘!"
-츠지무라 미즈키, 《거울 속 외딴 성》
.
처음 읽었을 때는 참 제 취향 아닌 책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결말부에 이르러서는 팔에 소름이 돋으며 긴 여운이 남았던 책이었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잠깐 외양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표지 일러스트는 참 예쁜데, 일러스트 디자인이 조금 잘못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목만으로도 일단 내용이 어느 정도 짐작 가는 상태에서 표지를 보면, 거울 속 외딴 성에는 검은 머리 소녀와 늑대 가면을 쓴 여자아이 둘뿐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저 둘이 뭔가 특별한 관계라고 생각하게 되죠. 하지만 아닙니다. 거울 속 외딴 성에 모이는 아이는 주인공 고코로를 포함해 모두 일곱 명, 늑대가면을 쓴 여자아이 '늑대님'은 고코로와 그렇게 특별한 관계도 아닙니다. 사회자, 혹은 관리자 격의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 고유명사 오타가 너무 많습니다. '유키시나 제5중학교'가 '유시키나'로 바뀌어 있는 부분이 두 곳이나 되고, 주인공 이름인 '고코로'가 '코로토'라는 해괴한 이름이 되어 있는 등. 출판사는 대체 뭘 한 건가요.
아무튼, 리뷰 들어가 보겠습니다.
중학생 안자이 고코로는 동급생의 미오리와 그 패거리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에 오랫동안 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밖에도 나가지 못한 채 집에서 하릴없이 보내고 있는 나날이 이어지는 가운데, 어느 날 방의 전신거울이 밝게 빛납니다. 물처럼 변한 거울로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중세시대에 있을 법한 성이 있었죠. 고코로 이외에도 여섯 명의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이들 앞에 나타난 '늑대님'은 설명하죠. 너희는 여기에서 소원의 열쇠를 찾아 소원을 하나 이룰 수 있다고. 단, 소원을 빌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며, 이 성은 내년 3월까지만 열리니 소원을 이루고 싶다면 그 안에 열쇠를 찾아야 한다고요.
누구에게나 이루고 싶은 소원은 있죠. 특히 이 아이들은 모종의 불행한 이유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으니 더욱 그럴 겁니다.
플롯 자체는 평범합니다.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는 소재는 유치하기까지 하죠. 그래서 이 책은 열쇠 찾기보다는 아이들 간의 관계 변화와 성장에 초점을 맞춥니다. 흔한 플롯을 흥미롭게 풀어나가는 것도 어려운 일이죠. 그리고 복선 투척과 회수가 상당히 뛰어나며, 후반부 반전이 그 여운을 길게 남깁니다. 읽은 후에도 마음이 오랫동안 따스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언젠가 제 방 거울도 빛나주지 않을까. 평범한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나날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거울 속 외딴 성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알에이치코리아(RHK) 펴냄

2019년 3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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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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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생각해 보면 비록 힘은 없지만 선량한 신이 있다는 건 신이 아예 없는 것보다 훨씬 나을 수 있다.
-한스 라트,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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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당신에게 신이 찾아와 심리상담을 해 달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심리 치료사인 야콥 야코비는 바로 이런 희귀한 경험을 하게 된 행운아입니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그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 있는 상태이며, 수입은 매우 적고 가족들과도 소원하죠. 그런 그에게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남자, 아벨 바우만이 찾아와 심리 치료를 부탁합니다. 이때부터 야콥은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게 되죠.
소재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 읽기 시작한 책이었습니다. 이후 줄거리는 제 기대에 조금 벗어나는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신은 매우 인간적입니다. 인간처럼 고민하고 웃고 말하며 심지어 가족도 있지요. 많은 사람이 늘 그려왔던 신의 모습처럼 천재지변을 일으키고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은 아니지만, 이 초라한 신에게 어쩐지 정이 갔습니다.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신이라 해도 이런 신이 세상에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어쩌면 조금쯤 더 살아볼 만하지 않을까요.
언젠가 제게도 신이 스쳐가는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하자고 말했다

한스 라트 지음
열린책들 펴냄

2019년 3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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