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은, 이번엔 미국이 들어와서 더 살기가 어려워졌지만,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오. 사람 목숨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 더욱 오래 살아남아야지.(p.19)
1948년 1월 대대적인 검속이 행해진 후 당국의 회유책으로 석방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해방된 조국을 뒤로 하고 그들이 일본행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이 땅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승만의 가장 충실한 앞잡이인 서북청년단은 반공투쟁의 선봉이자 반공투사, 멸공부대를 자처하며 섬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소설의 시작인 만큼 1권에는 큰 사건은 없다.
해방 이후부터 1948년 초반의 국내외 상황과 인물들이 소개된다.
그 인물의 성격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으로, 행동 묘사로 그려내는데 정말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생각보다 술술 읽혀서 놀랄 정도이다.
중간의 길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들에게 놓인 현실이 우리를 초조하고 급진적으로 만든다. (p.83)
2년 전 일본에서 귀국해 조직활동에 열심인, 다소 소심한 성격의 남승지
군정청에서 통역 일을 하는 양준오, 남승지는 선배이자 친구인 그를 조직의 당원으로 포섭해야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자신만은 옳다는 신념, 교조적이며 원칙을 내세우는 유달현 (그를 보며 민중을 위한 혁명을 하는 것인지 이념과 주의를 위해 혁명을 하는 것인지...짜증이 났지만 그의 성격이나 과거 이력을 보면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소설에 이런 인물은 꼭 있어야지.)
제주도 갑부의 아들이자 한때는 공산주의자였으나 전향한 이방근, 그 역시 당의 포섭 대상
조직의 윗선인 것은 같지만 유달현과는 또 다른 모습의 당원 강몽구
난 이제 와서 어디로 가 보았자 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네. 어디 가든 마찬가지야. 내 자유는 머릿속에만 있어.” (p.262)
이방근은 도지사의 부탁을 받고 양준오에게 도지사 비서직을 권하지만
양준오는 모든 것에 지친 듯 이 곳을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서북패거리와의 다툼으로 유치장에 연행되었을 때 만난 강몽구가 이방근을 찾아온다.
의아해하는 이방근에게 남승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며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며
남승지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방근에게 그와의 만남을 약속하고 떠난다.
이방근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뭔가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해방 후의 상황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알고 있는 것도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많았다.
역사적으로 밝히기 꺼려한 사건들은 언제나 북의 지령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
지령 이전에 그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묻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해방 직후의 상황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대놓고 '내가 일본인의 통치기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 가장 효과적인 운용방법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숨죽이고 숨어있던 민족반역자인 친일파의 복권무대가 우선적으로 제공되었고
모리배들과 암거래를 일삼는 자본집단들이 활개를 쳤고
거듭되는 물가 폭등으로 서울의 거리는 실업자와 거지 굶주린 자들로 들끓었다.(p.70)
어쩌면 이념전쟁의 희생양인 전후세대인 우리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하지 않을까?
적어도 이 땅에서 벌어졌던 이이러니한 상황에 대해서...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의 후손은 3대가 멸하고, 친일하던 사람들의 후손은 3대가 흥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배웠던 늑대의 탈을 쓴 나쁜 놈들의 실체에 대해서...
이념이 달라 싸웠던 남북간의 갈등에 남남의 갈등이 더해진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