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50대 교수인 데이비드는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귀농한 딸이 살고 있는 곳으로 떠난다.
마을 흑인들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한 딸 루시는 아버지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곳을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작가가 남아공 출신이니 남아공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연결시키려 애쓰지도 않았다. 이 깝깝한 스토리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피곤했다.
하지만 두 번째 읽으면서 이 작품이 단순히 한 교수의 개인적 일탈을 다루거나 고집불통인 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인물들의 상황과 이야기 속에 역사적 과오에 대한 작가의 해결책이 녹아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도...)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된 데이비드
그 양가적이고 모순된 감정과 상황들이 읽는 내내 끊임없이 불편함을 주었지만
한 개인의 선택이라는 좁은 시선에서 벗어나
수탈의 역사에서 가해자를 백인으로 피해자를 흑인으로 본다면
딸 루시의 선택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의 표현대로 '굴욕적이지만 다시 시작하기에 좋은 지점'이라는 말,
어쩌면 소수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하며 느꼈을 서로를 향한 감정들 - 백인들의 공포와 두려움, 흑인들의 분노와 적대감 - 을 정리할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역사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는 상황에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이 통할까?
그 말은 가해자의 비겁한 자기 변명 아닐까?
말로만 미안하다고,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하면 모든 게 해결될까?
시간이 아무리 흘렀다 해도 누군가는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