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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사실 세 번째 읽는 책이다. 수능을 친 후, 고전문학을 모두 격파하겠다는 다짐으로 한 번, 코로나 시기에 한 번, 그리고 이번 주, 현대지성클래식에서 “명화와 함께 읽는”버전으로 한 번. 앞선 두 번의 『페스트』는 꽤나 고전하며 읽었던 것 같다. 재미있어지려하면 다시 침울해지고, 이야기에 빠져들만하면 절망으로 나를 뚝 떨어뜨리는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그런데 이번, 현대지성클래식 “명화와 함께 읽는” 『페스트』 는 그렇게 침울해질만할 때 명화가 등장하는 덕분인지, 번역이 매끄러운 덕분인지 드디어 카뮈가 하고 싶은 말이 이런 것인가 생각하며 읽을 수 있었다.
사망자가 늘어가고, 도시가 봉쇄되는 상황에 이르자 도시에는 절망과 공포가 스며든다. 외부와 단절된 적막한 절망 속에서 어떤 인간은 어떻게 절망에 익숙해져가고, 또 어떤 인간은 그 절망에 대항하며 타인의 삶까지를 끌어올리려 애쓴다. 누군가는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누군가는 신앙의 힘을 이용하기도 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싸우고, 협동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페스트』가 전염된 도시에는 죽음과, 절망과, 포기와 낙담이 진득진득 들러붙기도 하고, 희생과 투쟁과 협동의 빛이 스미기도 한다.
사실 과거에 『페스트』를 읽을 때에는 암울함이 더 깊이 느껴졌다. 평범한 도시를 파먹어가는 어두움이 사람을 얼마나 무섭게 좀파먹는지 느끼며 나 역시 두려움을 느꼈다. 더욱이 코로나 시기에 『페스트』를 다시 읽을 때에는, 재앙을 온 몸으로 견디는 시민들처럼 나의 일상도 그늘지는 기분이 들어 너무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 ‘정서적 공황상태’라는 말을 온 마음으로 느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번에 현대지성클래식 “명화와 함께 읽는” 『페스트』를 다시 읽으며, 극한의 상황에서도 타인까지 끌어 빛을 향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제야 카뮈가 『페스트』나 『이방인』 등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불완전함을 교정”하는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된 것 같다. 이제야 내가 삶을 살며, 내 삶에 대해 얼마나 치열히 고민해야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더불어 『페스트』를 세 번쯤 읽으니 각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들도 더욱 선명이 눈에 들어왔다. 가톨릭 신자임에도 의아함으로 바라봤었던 파놀루 신부의 모습은 안개 속의 모습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이제는 그가 자신의 신념대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럼에도 앞을 향해 나아가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번 읽기를 통해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것은 코타르와 타루. 사실 과거에는 이 둘을 그저 다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다른 인간의 모습을 가진 이들이라고만. 하지만 현대지성클래식 “명화와 함께 읽는” 『페스트』로 다시 읽는 『페스트』는 이들이 마치 흑과 백, 빛과 어두움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회의 인간조직, 또 우리 내면의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철학적 의지로, 환경을 거스르고 나아지고자 노력하는 타루도, 개인적인 이익과 욕심만을 생각하고 내면 깊은 곳에 두려움을 안고 사는 코타르도 어쩌면 우리안에 내제된 두가지 내면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페스트』를 처음 읽었던 고등학생 때에는, 그저 전염병이 세상을 파먹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페스트』를 두 번째 읽던 초보엄마시절에는, 전염병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고, 인간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보여준 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 번째 읽는 『페스트』는 사회의 문제가 인간의 내제적 성향에 따라 어떻게 다른 양상으로 변해갈 수 있는지, 또 한 인간에게 어떤 사건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그 경험들이 인간에게 어떤 잔상을 남기는지까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생각을 한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페스트』를 완벽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 외에도 수많은 이들이 어려운 작품이라고 표현하는 『페스트』. 그럼에도 현대지성클래식의 “명화와 함께 읽는” 『페스트』라서 조금은 더 편하게, 조금은 더 쉼표를 찍어가며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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