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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걷으면 빛
성해나 (지은이) 지음
문학동네 펴냄
초반 단편들은 공감성수치를 좀 견뎌야 함 마지막 2편은 아주 좋았음...
내가 알던 헌진은 자기효능감에 취해 살던 사람이었는데, 그때의 객기나 포부는 다 사라지고 지금은 오직 염세만이 남은 것 같았다. 사람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틀릴 때가 있구나.
딸내미도 딸도 아닌, '해원'. 엄마가 휴대폰에 저장해둔 내 연락처를 보자 미약하게 남아 있던 죄책감도, 애틋함도 전부 휘발된다. 그래, 이게 우리 모녀지. 수식조차 없는 밋밋한 관계. 전화를 끊는다. 내 휴대폰을 열어 '사랑하는 엄마'를 '엄마'로 바꾼 뒤에도 분은 가시지 않는다. 엄마는 모를 것이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큰 품을 들여 당신을 이해해보려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들이 나를 얼마나 고독하게 만드는지. 이런 것도 모르겠지. 요즈음의 나는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선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지난 반년간 생리가 끊겨 얼마 전 호르몬 검사를 했다는 것을. 또 엄마는…….
김일성이 죽던 해, 그해 더위는 지금도 피부로 느껴질 만큼 선연하다. 더위를 타지 않는 나도 꽝꽝 얼린 사골 팩을 이마며 목에 대어야 겨우 잠들 정도였으니까. 징그러울 만큼 무더운 날에 북녘의 지도자가 죽었다기에 일사병으로 죽은 것 아니냐고 여공들이 속닥이는 것도 기억난다. 그날의 기묘한 망연함도, 김일성이 죽었다는 속보에 공장 사람들 죄다 밥도 못 넘기고 망부석마냥 앉아 있었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지 몰랐으나, 다들 겁에 질려 있었다. 김일성이 죽었대. 조용히 웅성거리는 이들 틈에서 오직 상희 언니만 묵묵히 짠지를 집어먹고 국을 후룩후룩 떠먹고 있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암묵이 이어지면 결국 불의로 굳어지게 되는 거야 나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꺼낸 적 있었으니 다른 이들에게도 분명 같은 이야길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가 가방을 챙겨 나갈 때 그 뒤를 선뜻 따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움찔움찔 엉덩이만 들썩일 뿐 다들 반장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꼼짝도 못했다. 언니 몫은 남은 직공들에게 자연히 떠넘겨졌다. 그리고……. 지는 딸린 식구가 없으니까 저리 다 쉽지. 우리는 다르지 않나. 우리라고 입이 없느냐고. 원망은 저편이 아닌 이편으로 향했다. 애석하게도. 그런 와중에도 내가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던 건 나를 남모르게 챙겨주던 언니의 배려가 걸려서였다. 받은 것은 갚아야 한다는 일말의 부채감이 없었다면, 나 역시도 언니의 공명함이나 투지를 슬그머니 무시하고 지겹게 여겼을 게 분명했다.
반장의 빈정거림에 얼굴이 붉어졌다.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운 말이 아니었는데도 그 말이 다른 누구의 입에서 튀어나오니 수모가 되고 치욕이 되었다.
해설 중
그러나 도호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유수가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들은 "감수해야"하는 것으로 바뀐다. … 이 모든 일은 도호가 종종 가볍게 내뱉는 '너도 내가 돼봐' 같은 말로 '나'에게 자연스럽게 인계된다. 유수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짐이 되어 조금씩 무게를 더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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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인생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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