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흐름은 ‘자연스럽다’라는 단어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앞으로 끊임없이 재정의될 표현이다. 미래에는 전혀 다른 자연이 주어질 테니까.
나의 꿈은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지 않고도 무탈히 흘러가는 인간 동물의 생애이다.
그보다 나쁜 건 자신의 선택이 아무한테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 자기기만이다.
262년이야. 그게 네가 연결된 시간의 길이란다. 넌 이 시간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 거야. 너의 시간은 네가 알고 사랑하고 너를 빚는 누군가의 시간이야. 네가 알게 될, 네가 사랑할, 네가 빚어낼 누군가의 시간이기도 하고. 너의 맨손으로 262년을 만질 수 있어.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나로 인해 무언가가 변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원래 안 변해.”
그러자 한 아이가 울면서 이렇게 소리친다.
“왜 안 변하는데? 안 변할 거면 왜 살아 있는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어떤 판단은 보류할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천천히 두고 볼 너그러움이 우리에겐 있다.
언어 바깥에서나 언어 안에서나 비인간 동물은 인간 동물보다 덜 중대한 존재로 대해진다.
“수를 세는 단위인 ‘명’은 현재 ‘名(이름 명)’ 자를 쓰지만, 종평등한 언어에서는 이를 ‘命(목숨 명)’으로 치환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단위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간 동물인 내 목숨과 비인간 동물인 누군가의 목숨을 나란히 생각할 때 우리가 쓰는 말도 새로워진다. 새로운 언어는 나의 존엄과 당신의 존엄이 함께 담길 그릇이 될 것이다.
내 더위의 무게와 그들 더위의 무게는 다르다. 더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오지 않는다.
너를 위한 나의 변신이다. 나는 너를 위해 나를 바꿀 것이다!
뭐든지 새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자꾸자꾸 새 마음을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중한 일을 오랜 세월 반복해온 사람의 이야기였다.
연대란 고통을 겪은 어떤 이가 더 이상 누구도 그 고통을 겪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의 목록을 적어가며 어른이 되어왔다.
‘생추어리(sanctuary)’란 고통스러운 환경에 놓인 동물을 이주시켜 보호하는 공간이다. 최대한 야생에 가까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그들이 자신의 수명대로 살 수 있게 한다.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한 결과로 깨끗해지고 싶지 않다면 어떤 제품을 골라야 하는가? 크루얼티프리(Cruelty-Free) 기업을 찾아야 했다.
김행숙 시인의 시 「눈과 눈」의 한 구절이었다.
너는 눈이 좋구나, 조심하렴, 더 많이 보는 눈은 비밀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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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을 때보다 쓸 때, 춤을 볼 때보다 출 때, 피아노를 들을 때보다 칠 때 나는 구석구석 사랑하고 티끌까지 고심하느라 최선을 다해 살아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을 속속들이 싫어하고 낱낱이 사랑하게 된다.
괜찮아, 대충 하자, 하지만 열심히 하자. 끝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한다. 괜찮아, 그래도 재밌었고, 열심히 했어.
둘 모두 불가능한 완벽을 향해 불완전한 시도를 계속해나간다는 점이 나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성장 과정에서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변화한다. 몸도 정신도 타고난 것과 주어진 것 사이에서 요동치며 길을 찾는다. 어설펐던 일에 능숙해지고 능숙했던 것이 떠나간다. 바랐던 것은 좌절되고 원했던 일은 어그러진다. 그리고 그것이 숙명임을 우리는 천천히 깨달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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