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작가님으로부터 직접 선물 받았다.
작가님께서 손수 적어 주신 날짜를 보니 2023년 5월 2일.
길어야 1년 정도 지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새 1년 반이나 훌쩍 지나가 버렸다.
시간은 늘 내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빠르게 흐르는 것 같다.
그동안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 책장에 꽃아두기만 한 이 책을 마침내 지난 주말에야 집어 들었다.
작가님의 본업이 시인인 까닭에 이 책에는 시적 감수성이 넘쳐 흐른다.
몇 편의 시가 통째로 수록되어 있고, 이야기를 서술하는 문장 속에도 시적 은유가 풍부하다.
그렇다고 읽는 게 어렵지는 않다.
주인공이 겪는 아름다운 로맨스는 술술 읽히고, 현실에 찌들어 딱딱해진 심장을 부드럽게 녹여 주기까지 한다.
데모와 시위로 얼룩진 1980년대 후반의 대학가 풍경과 복잡한 인연으로 얽힌 주인공과 형사의 대결 구도는 적절한 긴장감을 선사하고, 엠티와 농활, 동아리 처럼 추억에 깃든 낱말 들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내기도 한다.
내가 느끼기에 이 작품은 아름다운 로멘스를 살짝 첨가하긴 했지만 시대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이 주된 목적인 것 같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 라는 시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속에 진정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담긴 것 같다.
슬픔이 기쁨에게.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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