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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 모르는 민주주의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이책 펴냄
광화문에서 연일 촛불집회가 열리던 시절, 나는 SNS에 조직화를 두려워하는 민중운동에 대한 우려를 표한 적이 있었다.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겐 리더가 없고 주최측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기존의 제도와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 때문에 조직화되지 않은 민중 운동은 효율적인 방법을 찾을 수 없고 중심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2016년 가을에 시작된 그 집회에는 진영과 지역, 연령, 성별을 뛰어넘어 수많은 국민들이 참여했고 결국 정권은 바뀌었다.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인류학자이자 아나키스트 운동가며, 런던정치경제대학의 교수기도 하다. 그는 2011년 뉴욕의 월가 점거운동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당시의 미국은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경제가 계속 내리막길이었고 시민들은 무능한 정치권과 자기 이익 챙기기 바쁜 금융권과 재계에 분노하며 결국 'We are the 99%'라는 슬로건을 들고 거리로 나와 공원을 점거했다. 경기 침체로 시민들은 이미 길바닥에 나앉을 처지였고 1%에게 대부분의 부가 집중되는 현재의 체제에서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 99%의 존재와 그 부당함을 알리는 것이 목적 이었다. 소수로 시작된 이 점거운동은 SNS로 번져갔고 세계각지에서 유사한 집회와 점거운동이 발생했지만, 결국 주류 언론의 외면과 왜곡, 구체적인 목표 의 부재, 다양한 진영이 모였을 때 발생하는 한계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조용히 해산되었다. 그레이버 교수는 이 자발적 점거 운동에 참여했고, 아나키스트로서 당시의 상황과 그 의미를 기록함으로써 현재 작동하고 있는 정치제도로서의 민 주주의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진짜 민주주의를 설명하고자 한다.
책을 읽고 나면 '민주주의'라는 말과 제도의 역사에 대해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몇 해 전에 읽었던 책 에이프릴 카터의 <직접행동>이 떠오르기도 했다. 저자 그레이버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해 소수의 의견이 묵살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의견을 최대한 듣고 토론과 토의를 거쳐 합의점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현실의 사회에서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 다수결과 선거제도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런 대의민주주의는 효율과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도입한 정치제도에 불과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내 의견을 누군가 대신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고 투표는 아주아주 소극적인 방식의 의견 개진일 뿐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는 것으로 당선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지만 그 당선자들이 우리를 대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선거기간 중에도 그들은 특정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총선, 대선 기간이 되면 항상 '누굴 찍으나 마찬가지'라는 상 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마땅한 정당과 후보가 없어서가 아니라 결국 내 생각이 정치에 반영될 가능성은 없다는 체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결국 시민들이 SNS에서 캠페인을 벌이고,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을 올리고, 촛불과 현수막을 들고 거리로 나서는 '직접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직접행동에서조차 '대표자'를 세운다면 더이상 충분히 민주적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누 군가에게 권리를 양도하는 순간, 그것이 조건부라고 할 지라도, 권리들은 권력으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대의민주주의'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나보다. 이미 자본주의 국가와 도시, 대기업에 적응하며 사는 동안 '최대 다 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잊어버렸나 보다. 그래서 그 당시 민중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두려움 때문에 리더를 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불만을 가졌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렇지만 반대로 대표자나 조직이 없는 민중운동이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사람 열 명쯤 모이면 약속시간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 말이다. 저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가지 방법론을 제시한다.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방법, 그룹들이 역할을 나누고 행동하는 방법, 그리고 거대한 공권력에 효과적으로 맞서는 방법들이 서술되어 있고 그 방법들을 실제로 전세계에서 어떻게 사용해 왔는지도 간단한 사례들이 제시되어 있다.
동시에 저자는 이러한 방법들이 하나의 청사진이나 모델로 전체 사회에 확대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굳이 청사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대안사회를 그려보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의가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과정'이니까. 세계 역사상 어떤 혁명도 대안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모델을 가지고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현재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없애려는 노력이 혁명과 사회변화의 시작이다.
아아, 그렇지만 현실의 불합리를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이 놈의 자본주의는 이미 너무 삶 자체다. 더 생산하고 더 소비하고 (경제적으로) 더 발전해야 더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기가 쉽지가 않다. 행복이 돈에 있지 않다고 말은 하지만 현실의 행복은 돈에 있고 심지어 어떤 행복은 돈으로 살 수도 있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은 돈이 없어서 생기는 불행에 너무 쉽게 가려지곤 한다.
참으로 고뇌에 빠지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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