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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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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라디오 (우리는 내내 외로울 것이나)의 표지 이미지

아무튼, 라디오

이애월 지음
제철소 펴냄

라디오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중학생, 불면증에 잠을 못 이루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MBC FM 4U <푸른 밤 종현입니다>를 들었다. 당시 명언을 좋아했던 나는 오프닝을 들으며 감탄했고, 숨어있는 명곡들을 내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하며 뿌듯해했다. 라디오 사연을 들으며 울고 웃으며 나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삶의 모양들을 알아갔다. 거기에 다정한 DJ는 몇 년 동안 까칠한 나를 조금씩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어느 날 <푸른 밤 종현입니다>의 DJ가 바뀐다는 소식을 접했고, 매일 만난 친구를 잃은 듯 펑펑 울며 나의 라디오도 점차 멀어져 갔다. 이후, 종종 라디오를 들었으나 꿈이었던 라디오 작가를 위해 들었을 뿐, 정이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내 DJ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난 후, 나는 오랫동안 라디오를 듣지 못했다. 동시에 라디오 작가의 꿈도 잃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져 가끔 예전처럼 <푸른 밤 종현입니다> 다시 듣기를 듣는다. 옥상달빛 언니들이 나와 연애 이야기를 하고, 영배오빠와 커피오빠는 여전히 웃기다. 슬퍼져서 울 때도 있었지만, 웃을 때가 더 많았다. 먼 길을 여행 갈 때도, 집에 있을 때도 나는 <푸른 밤 종현입니다>를 여전히 듣는다.

어쩌면 나는 라디오를 좋아하는 것보다 <푸른 밤 종현입니다>를 좋아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튼, 라디오』를 읽으며 조금씩 내 예전 꿈을 되돌아보는 듯했다. 라디오 시간에 맞추어 집에 들어오고, 엄마가 라디오를 사주고... 그런 추억을 다시 되살릴 수 있었다. 라디오 매체 하나로 추억이 무척이나 따뜻해질 수 있다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얼굴을 보지 않고도 응원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중요한 건 나는 지금 시 쓰기보다 오프닝을 쓰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하고 하고 싶은지 고민이 많은 지금, 『아무튼, 라디오』가 방향을 잡아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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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지음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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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900408

자꾸만 뒤를 도는 인물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최은영에게 처음 반한 건 단편 「쇼코의 미소」였다. 쇼코의 미소를 다 읽었을 때, 펑펑 울었다. 당시 눈물을 글썽이면서 모순적이게도 다른 단편들을 읽지 못했다. 소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나는 다른 단편들을 모두 읽어낼 용기가 부족했다.

다음으로 우연히 「아치디에서」를 수업에서 마주했을 때, 지독히도 소설이라는 장르와 최은영을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 사랑이 단편집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이어졌다. 그녀가 말하는 관계들의 애정과 슬픔이 묻어나올 때, 오로지 이야기 속에 갇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치디에서」 속에서 위로받는 아이들은 나와 A처럼 느껴졌으며, 「쇼코의 미소」에서 할아버지가 우산을 드는 모습은 나의 할머니와 엄마가 떠올랐다. 이야기가 오로지 이야기에 갇히지 않고, 현실에서 나와 함께 살아움직일 때의 감동. 최은영에게서만 느낄 수 있었기에 그녀의 소설들을 아끼고 아꼈다.

비로소 새해가 되어 『쇼코의 미소』를 완독했다. 솔직히 「쇼코의 미소」을 제외하고 엄청난 감동을 받은 작품은 없었다. 그러나 먹먹했다. 특히 「신짜오 신짜오」와 「한지와 영주」에서 인물들이 몇 번이고 인사하려는 마음들이 살아움직일 때, 소설 밖에 읽는 내가 그 모두를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편마다 어디론가 자꾸 떠나고야 마는 최은영의 발걸음을 종종 따라갔다. 아주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인물들. 그들이 나에게 자꾸만 뒤를 도는데 나는 그저 소설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이 아주 미안하다.

최은영을 만난다면 나는 당신 덕분에 지금까지 소설을 읽는 거라고, 덕분에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문학동네 펴냄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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