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잃어버리며 결단 내리지 않는 자는 거기에서 '자기의 시간을 잃는다.' 그러므로 그에게 맞는 전형적인 말은 '시간이 없다'이다." 자기를 시간 속에서 잃어버린 자, 시간의 맷돌에서 갈리며 비지가 되는 자는 늘 바쁘다며 허덕인다. 시간의 소유자가 아니므로 당연히 그에겐 시간이 없다. 시간 속에서 미아가 된 자는 시간을 보내기 힘들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전전긍긍하듯 시간에게 고문당한다.
반면 시간을 잃지 않은 자, 오히려 시간을 돈다발처럼 소유 한 자, 바로 시간의 '갑'은 원하는 만큼 느려도 상관없다. 오히려 시간이 예, 예 하면서 충실한 하인처럼 그와 발을 맞춘다.
시간을 소유한 자만이 원하는 속도로 시간의 페달을 밟으며 풍경을 즐기듯 '느릴' 수 있다. 그는 세상살이에 흡수되어 사 라져버린 자가 아니라 원하는 만큼 천천히 세상을 즐길 수 있는 자이다.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 느림의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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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느리게 실존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문제 아닐까? 철학자 랑시에르가 플라톤을 인용하며 자주 이야기하듯, 노동자들은 생업 때문에 바빠서 정치에 참여할 시간이 없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도록 시간표가 그들을 가두어두는 까닭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그들은 즐거울 틈이 없다. 귀중한 것들을 느리게 음미해볼 틈이 없도록 시간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적 싸움이란 느려질 권리를 얻는 문제이다. 시간이 느려지지 않는다면, 삶은 그저 노동을 거쳐 사망으로 가는 쾌속 열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