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넘은 소리일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천천히 내뱉는다. 그러고는 조심히 입을 연다.
“크게 달라질 건 없는 것 같다. 너와 아빠 사이 말이야. 물론 나는 제삼자 입장이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잖아. 정말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거야.”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스케치북에 실수로 물감을 흘린 적이 있어. 밑그림 다 그리고 색칠을 하려는데 물감 한 방울이 엉뚱한 곳에 떨어진 거야. 맨 처음 든 생각은 아! 망했다. 열심히 그린 그림이 다 날아갔구나. 다시 그릴 시간도 없고, 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채색을 시작했어. 색칠하면서도 그 물감 자국만 자꾸 도드라져 보이잖아. 에라 모르겠다, 이왕 망친 거 대충하자, 그렇게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 보니까 거짓말처럼 물감 흘린 자국이 안 보이는 거 있지?”
카드를 손에 쥔 채 묵재가 나를 본다. 나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냥 너와 아빠가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을 밑그림이라고 생각해봐. 거기에 물감 한 방울이 떨어졌어.”
처음에는 유독 얼룩만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그 한 방울이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결국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의 문제다. 삶의 얼룩들에 한번 시선을 빼앗기면 더 크고 소중한 것들이 안 보인다.
“나는 너와 아빠가 열심히 그린 나머지 그림들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얼룩은 안 사라져. 결국 더 짙은 색으로 덮을 수밖에 없어. 행복이나 추억 같은 것으로...”
너는 믿을 수 없겠지만 나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아. 태어나서 단 한번도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음, 이런 비유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지금까지 한 번도 네 생물학적 아빠를 보지 못한 것과 비슷할 거야. 그래도 우리 괜찮잖아. 하루하루 잘 살아왔고 살아가는 중이고 또 살아갈 거잖아. 물론 속상한 적도 많지.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대체 무슨 잘못을 했을까? 슬프고 화나고 억울한데, 사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해. 다만 내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네가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상상할 수 없듯, 내가 너에게 그런 아픔이 있는지 생각하지 못했듯 말이야.
살아가면서 열심히 그린 밑그림에 물감 한 두방울 씩 안 흘려본 사람은 없을 거야. 다만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가 중요하겠지. 작은 얼룩 말고 더 넒은 부분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솔직히 나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편할 때도 있어. 남들보다 외모에 덜 신경 쓰거든. 뭐, 쓸 수도 없는 상황이지만. 대신 남들은 볼 수 없는 나만의 얼굴이 있어. 매일 아침 그 기묘한 스타일을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거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세상의 시선이 아닌 너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뭔가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소리 없는 말들을 건넨 후, 나는 묵재를 향해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보낸다. 비록 나는 볼 수 없는 미소지만 부디 이 마음이 묵재에게는 닿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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