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나는 로비에 나란히 앉아 치료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녀도 나도 침묵을 잘 견디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둘 다 말재간이 있는 편도 아니어서 대화가 자주 끊겼다. 그녀는 내게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이런저런 질문 거리가 떠올라도 섣불리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건 우리 사이에 해도 좋을 말, 이건 그렇지 않은 말. 각을 재고 말을 삼키길 반복했다.
p29
능을 완전히 나서기 전, 나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p38
사진 속에서 새아버지는 저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손을 맞잡은 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버티지 못하고 놓아버린 것들, 가중한 책임을 이기지 못해 도망쳐버린 것들은 다 지워지고, 그 자리에 꿈결같이 묘연한 한여름의 오후 만이 남습니다.
이편에서 왔다가 저편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
어딘가 숨어 있다 불현듯 나타나 기어이 마음을 헤집어 놓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