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부에는 언니가 영혜의 삶을 책임지는 장면들이 있었다. 나는 묘하게 언니가 버거웠다. 언니 자신도 소설의 사건으로 타격받고 어쩌면 그 화살을 동생 영혜에게 돌릴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언니는 동생을 병원에 데려두고 끝까지 ‘가족’으로써 책임졌다. 착한, 책임감 있는, 성실한.. 하지만 그 누구도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언니도 무엇이 최선인지 알지 못하고 영혜가 살아가도록 병원에 맡겼다.
음식을 거부하는 영혜에게 콧줄로 양분을 넣는 묘사가 섬뜩했다. 영혜가 인간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게 버거워보였다. 한편으로는 지난 겨울,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편마비 된 상태로 몇개월간 병상에서 폐렴으로 고생하다 떠난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부모님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등록했고 거듭 당신의 자식인 언니와 나에게 사고 시 자신들을 살리기 위해 병원에 본인들의 삶을 연장시키는 고통을 주지 말라 이야기하셨다. 나는 영혜를 보면서 병상 위에 쌕쌕 숨쉬는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기관지에 가래가 가득 차서 돌아가시기 두달 전부터는 목구멍에 구멍을 뚫고 하루에 한번 요양사의 석션을 받아야했다. 석션이 고통스럽기에 긴 쇠막대기를 들고 다가오면 움찔 뒤로 물러났고 결국엔 돌아가실 때까지 그 공포를 매일 마주하셨으리라.
소설속 영혜 언니는 인간적인 사람이고 인간적으로 영혜를 사랑해서 영혜의 삶을 어떻게든 살게 했는데 나는 이것조차도 영혜에겐 고통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역시 영혜가 하는 말이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다. 초반엔 그냥 이상한 꿈을 꾼 사람인 영혜는 중반부로 가면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 뒤로 갈수록 미친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도 내가 스스로 정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쩌면 더 영혜와 나를 가름질하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살다보면 누군가의 선택이 전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듯이 나의 선택도 누군가에겐 전혀 이해 안 되는 것들 투성이일테고 이해받기 어려운 일을 행하거나 당하기도 한다.
영혜가 차라리 혼자가 되어 숲에 갔다면 정말 나무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모든 사건들이 장면들로 보여서 이해가 되지만 인물들의 행동양식이 다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2부 몽고반점에서 형부의 선택도, 영혜의 선택도 말이다. 이해를 바라면서 그런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었던 것 같고 그냥 그래야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판단을 빼고 읽으니까 차라리 나았다.
우리는 영혜를 어떻게 바라봐야하는가
를 생각하다보니 인류 역사에서 ‘미친’ 사람을 어떻게 규정짓고 어떤식으로 배제해왔는지 관심이 생겼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장하준, 29p
특정 시장을 구분하는 신성불가침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경계를 변경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그 경계를 지키고자 하는 시도만큼이나 정당한 것이다
이 책의 구절과 좀 맞닿는 부분이 있었다
영혜가 힘도 세고 권력 있고 말빨이 좋았다면 아마 나무종교.. 를 세워서 사이비 종교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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