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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문상훈 지음
위너스북 펴냄

손글씨로 꾹꾹 눌러담은 진심은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다



편지 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문상훈의 편지를 매우 좋아했고,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의 문상훈을 좋아했기에 그의 에세이를 출간 전부터 기대했다.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며>는 인간 문상훈의 취향이나 성향을 잘 볼 수 있는 코너이다. 나는 웃길 땐 소소하게 웃기는, 진지할 땐 진지한 그가 좋았다. 무엇보다 타인의 취향을 이해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귀 담아듣는 그가 좋았다. 어떨 땐, 게스트보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문상훈의 에세이에서 그의 취향이나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일대기를 알 수 없었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은 그의 깊숙한 마음의 이야기일 뿐이다. 자기반성문이었다.

내가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삶의 정답인 것 마냥 "이렇게 해라"라고 강요하고 조언하는 말투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은 아무런 조언이나 강요를 하지 않는다. 그저 문상훈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어떤 반성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이 책은 문상훈의 자기반성문이자 일기장이다.

그의 일기장을 들여봤을 때, 문상훈의 세심한 언어들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문상훈의 시선들에 감탄하고 배울 수 있었다.

다만 책의 편집와 글의 형식에 있어서 아쉬웠다. 먼저 한 챕터의 이야기 안에는 본문의 글과 문상훈의 손글씨가 있다. 본문의 글 중간에 손글씨가 등장해 글을 읽는 데 흐름이 끊겨 방해되었다. 손글씨를 처음이나 끝에 배치했다면 손글씨의 여운이 더 길지 않았을까?

또, 글의 형식에 있어 오글거림을 견뎌야 한다. 물론 내가 말하는 건 내용의 오글거림이 아니다. 편지라고 제목을 붙여놓으며, 본문 내용이 끝난 후 마지막에 '나 자신에게'를 붙이는 오글거림 말이다.

모든 아쉬움을 뒤로 미루고, 그의 진심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당기이든 책이든 문상훈을 자주 보아야겠다. 손글씨로 꾹꾹 눌러담은 진심은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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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900408

좋은 이미지일 뿐, 좋은 글은 아니었다.

대부분 시가 글보다 이미지에 가까웠다. 이 점은 『정신머리』의 큰 시도였지만, 한계였다. 이미지적인 측면에서 트위터를 사용하거나 이미지 삽입, 폰트를 통한 분위기 조성 등 새로운 시도가 많았다. 이미지로 시가 다가오는 것은 멋진 시도였다. 그러나 실험적인 시도에 글이 가려질 때가 많았다. 실험적인 시도가 없는 시를 보아도 시인만의 글 매력을 발견할 수 없었다. 특히 난해해지는 시들을 볼 때마다 시인은 자신의 글을 모두 이해하고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일단 난 이해를 하지 못했고.

+ 지하철에서 『정신머리』 읽다가 멀미날 뻔했다. 멈춰진 곳에서 읽기를 추천.

정신머리

박참새 지음
민음사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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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900408

사장님의 시대


<가녀장의 시대가 반가운 이유>

이슬아는 반가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적어낸다. 지금까지 페미니즘은 여자들에게 불합리한 것들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 그리고 바꿔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슬아는 '가녀장의 시대'를 마치 소설처럼(소설은 꾸며낸 이야기이므로) 당연하게 그려낸다. 자신의 부모인 복희, 웅을 직원으로 둔 사장님 이슬아로서.


<사장님의 시대>

슬아의 가정에서 새로운 측면들이 있다. 첫 번째, 집안일은 노동이므로 값을 지불하는 것. 두 번째, 부모를 고용해 함께 일한다는 것. 세 번째, 결혼기념일과 같은 특별한 날에 복지를 한다는 것. 이밖에도 다수의 가정 혹은 직장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것만으로 작가는 평범한 가정의 당연함에 의문점을 남긴다. 결국 '사장님의 시대'가 아닌지에 관해선 생각해 볼 만하다. 직장 안과 밖 슬아는 사장님 역할이다. 슬아가 가녀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장님이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의 가정과 직장이 가능했던 것 아닐까?


<『가녀장의 시대』는 소설인가>

『가녀장의 시대』는 소설인가? 소설은 정해진 전개방식이 있으며, 이를 따라야 독자들은 소설임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가녀장의 시대』는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지 않다.
이슬아의 에세이와 차별점 없는 문체(에세이에서 그대로 쓰는 문체), 짧은 에피소드 형식,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큰 사건이 없다. 즉, 그녀가 에세이를 쓰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자들은『가녀장의 시대』를 소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저 '슬아'라는 인물의 일기였을 뿐이다. 정말 '소설'을 쓰고 싶었다면, 소설의 형식은 갖춰야 하지 않았을까?


<가녀장의 모순>

가녀장은 역차별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시대는 '가부장'이다. 가부장제가 여전히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제서야 가부장제를 조금씩 타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가녀장 시대가 와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가정 내에 가장이 존재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어떠한 형태로 가장을 정해지는가?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 집안일을 하며 가정을 지키는 사람 등 가정마다 각자의 역할이 다르듯 가장도 모두 다르다. 우리는 왜 가장이라는 이유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가정은 한 사람의 책임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가 아닌, 모두의 책임으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이다.

*독서모임 중 사물놀이 상모의 말 인용.

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지음
이야기장수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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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900408

오후에 만나러 와주어요

https://m.blog.naver.com/hj5544m/223481172337

음악집

이장욱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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