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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들을 생각해

정지혜 지음
자이언트북스 펴냄

남편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젠 엄마 이야기를 할 때도 목소리가 더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괜찮아진 건 아닐 거다. 유년기에 받은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으니까. 딱지가 앉지도, 흉터가 아물지도 않는다. 무당이 모시는 할머니가 내 기억을 봉인시킨 이유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가지고 살아온 어른의 배려였을까. 남편의 기억을 봉인시켜주고 싶었다. 그리할 수 없기에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이 나를 볼 때마다 엄마를 떠올리게 된다면 나 역시 남편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남편이 받아야 했을 사랑을 내가 대신 받은 것 같아 미안했다. 그래서 언니와 만난 적 있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기로 했다. 언니에 대해 이야기하면 아줌마에 대한 기억도 따라나올 테니까. 어두컴컴한 방 침대 위에 오도카니 홀로 앉아 있던 언니의 외로운 옆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습은 영영 혼자 간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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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계속 계속 생각하다 보면 이해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다 상관없어져.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이 무의미해지지. 어차피 끝내 알 수 없을 테니까. 나 아닌 모든 존재는 결국 미지의 영역이니까.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거야.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을 왜 계속 생각할까?"
장 사장이 선형을 돌아보았다. 선형은 몰래 챙긴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어, 나 설마 걔 좋아하나 했지. 이게 전부야."

입속 지느러미

조예은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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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 기분 좋은 바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캐치볼. 그 좋아하는 사람이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좋아하는,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치에코씨는 참으로 분에 넘치는 인생이구나 하고 절절히 느꼈습니다. 어쩌면 앞으로 자신의 삶에 슬픈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이 행복이 그대로 계속될지 어떨지 그런 건 모른다. 노력해도 도저히 안 되는 것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노력할 수 있는 건 노력하면서 살아야 하고, 사실 그런 노력은 "고마워"란 말이나 "미안해"같은 이런 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치에코씨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4

마스다 미리 지음
문학동네 펴냄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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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보내 주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인간이 죽어서도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후회 없이 애도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장례식장의 대관료, 재료에 따라 달라지는 관과 유골함 가격, 장지, 그리고 높낮이와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납골당 사용료와 관리비, 예약금까지. 이렇게 죽음이 흔해진 세상이라 애도는 더욱 비싸졌다.
엄마가 소각장에서 눈을 태우며 벌어들인 돈은 거의 그대로 장례에 쓰였다. 그건 꼭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 생일날 홀로 노래 부르고 축하하는 것처럼 외롭고 허무했다. 그때부터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살아가려면 돈이 기본이었고, 돈이 가장 간편한 수단이었고, 돈이 능력이었고, 하여간 돈이 최고인 것 같았다. 적어도 먼 훗날 그때 아직 내 곁에 남은 사람들과 온전히 함께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고 싶었다. 그게 그렇게 큰 바람인가? 그 정도조차 바라지 못하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난 짐이 되기 싫다. 그럴 바엔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나아."
아무리 이모라 해도 그 말은 용서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모를 상처 입히고 싶었다.
"이모가 죽으면 나도 똑같이 죽어 버릴 거야."
이모가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바랐던 결과인데 통쾌하지는 않았다. 센터에 들어갈 때까지 이모와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둘 다 무척 화가 나 있었는데, 그게 서로에 대한 화는 아니었으나 화를 낼 상대가 서로밖에 없었다. 둘 다 고집이 센 인간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내 이 꼬인 성격은 다름 아닌 이모에게 물려받았으니까.

나는 추운게 좋았다.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좋다. 더워서 땀이 흐르면 닿는 게 싫어진다. 내 몸끼리 닿는 것도 싫다. 하지만 추우면 온기를 보다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곁에 남아 있는 이의 존재를 귀찮아하지 않고 실감할 수 있는 겨울이 좋았다.

스노볼 드라이브

조예은 (지은이) 지음
민음사 펴냄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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