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이 제목의 역설과 잘 어울렸다. 흥미롭게 읽었다.
건축가인 두 사람이 나뉘어서 ‘집’에 관한 개인적 시선에서부터 인문사회적인 사유로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일견 30대들의 전월세의 이사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계속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소유하게 될 집에 대한 의미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는 이윤석이 에필로그는 김정민이 썼는데, 도입부의 글과 마무리의 글이 책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여는 맛과 마무리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1장 솔직하게 만들어가는 집
'여지의 여지 '편에서 공간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스며들듯 수긍하게 된다.
넓은 평수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공간의 여지가 그곳에서 사는 이의 생각과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영향으로 더 긍정적이고 더 창의적으로 사고가 넓어질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에 대한 논의들을 읽다 보면 자본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 해석한 공간의 ‘최소성’은 생활하는 이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다. 간혹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이 제품을 디자인 한 이는 이런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나 동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실제 사용하는 경험치가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불편하거나 참신해지는 상반되는 경우 모두 다.
17쪽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삶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 시대라는 도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삶은 과정일 뿐이라 여기고, 과정이 된 삶들은 아무렇게나 최소로 방치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념이 다시 정의되고 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양은 서서히 청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고 있다. 박제된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정붙이고 녹붙이고'편의 에피소드도 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공간과 물건에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의 역사를 쌓아가는 모습들이 새삼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취향’에 대한 김정민의 생각은 취향조차도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어 평가하려 하지만, 자기의 솔직함과 생활감이 있는 인테리어가 더 좋은 취향의 인테리어라는 문장에서는 30대의 젊은 건축가의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엿본다.
두 저자는 고양이를 기른다는 점과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집과 방에 대한 생각과 지금까지의 전월세 이사 여정기를 말하고 있다. 책 집필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지인들과 관련인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집들을 탐방하면서 느끼고 접한 생각들도 실려 있다.
자신의 집이 싫다고 하면서 가는 내내 왜 ‘내 집이 싫은지’를 말하는 이를 통해서 집을 긍정하려고만 했던 이유를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 젖어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또 마주친 것은 자본주의는 소비주의이고 소비가 나를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에 살기에, 나의 소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나쁘다는 또는 별 볼일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문장에 새삼 환기하면서 동의하게 된다.
2장 셋방일지
아파트의 창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인해 계층과 사회적 구분을 읽게 된다. 동일한 크기와 효율성으로 정착한 아파트 창호의 크기의 반대편에 빌라라는 집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용의 풍경을 던져준다.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막고 보완해야 하는 빌라들. 이런 논의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읽어내고 말하고 기록하면서 건축가로서 어떤 반영과 개선을 할지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뷰’에 관한 논의에서도 자연을 담는 뷰, 경관도 특정 계층이 소유하게 되는 것의 불평등 지적한다. 녹지공간인 공원이나, 경관을 더 많은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시, 주거지 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공유하는 자연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집이라고 불리는 많은 집들이 매트리스만으로 인식되는 저자의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을 제시하면서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최소의 집에서는 수면과 화장실 사용만이 가능하며 나머지 다른 것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은 축소 또는 축약된 채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점들을 지적한다. 빨래방과 스타벅스의 방문이 일상이 되는 젊은 층의 생활 문화도 이런 주거 형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빨래를 널고 차를 마시고 화분을 키운 베란다의 공간을 갖기 힘든 구조의 주거 형태들이 가져온 공유 공간의 외주화를 만들었다.
‘안행복주택’편지글에서는 정책 입안자의 태도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키워드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책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운용과 실용이 필요한 지점을 집는다.
3장 일상의 발명가들
식탁테리어라는 말은 아마도 저자가 만든 단어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혼자 살면서 시작된 식탁인테리어로 식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바뀌거나 모으고,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2장에서 언급되었던 주방 공간의 축약과 축소가 요리라는 행위를 멀게 하고 간단하게 데워먹는 간편식의 식생활을 유도한다. ‘감히, 요리를 해먹어.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라는 거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요리는 개인 취향이다. 선호 여부에 따라서 즐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주거의 구조는 사유의, 사고의 폭도 움츠러들게 한다.
반려동물을 기르기도 하고 실제로 기르는 이들의 집을 탐방한 경험은 건축가로서 집을 설계할 때, 기존의 인간만을 기본으로 한 설계에서 한 걸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현성의 싱크로율은 아직 낮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현장성이 넓어질 때 주거에 대한 집에 대한 의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4장 우리를 담을 집
어차피로 만든 세상편에서의 에피소드는 집에 관한 따뜻한 관점의 한 갈래를 마주하게 한다. 평수나 크기로만 말해지는 주거지가 아닌 동네라는 의미로 거주하고 생활했던 곳의 생활정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의 메모, 깨끗한 이사 정리로 입주 청소비를 아낄 수 있고 그런 기분을 전해주고 싶다고 탐방했던 곳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인터뷰라서 감동이 더했다.
전월세 집이라도 사는 동안은 내가 거주하므로 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듯 하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짚은 것이 아닐까?
벽돌로 쌓은 집과 지푸라기로 엮은 집편의 논의처럼 늑대집만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의 집은 지푸라기 집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 들어온다. 집안이든 밖이든 안전할 권리가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의 흐름은 그저 집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느낀다.
217~218쪽
도시는 거름망으로 걸러진 사람들끼리 사는 곳이 아니다. 도저히 서로 겹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것을 억지로 구분하고 나누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상한 형태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다름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다름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성별은 같지만 국적은 달라, 나는 너와 언어는 같지만 피부색은 달라... 이렇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협소한지 가늠하게 할 뿐이다.
‘언어’라는 단어를 알았을때, ‘자가 주거’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성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다르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감각’을 체화하는 일이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 외 1명 지음
다산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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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50대의 그들은 강릉 여행을 통해 각자의 삶에 대한 겹치는 부분과 여전히 가려졌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동갑 혹은 같은 또래라는 동질성의 키워드로 들어온 소설의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이 20대를 지나 50대를 살아왔던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강릉에서, 이곳이 아닌 여행지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여행지일까? 일탈 같기도 하면서 일탈이지 못한 중년이 된 3명의 대학 동창의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난주, 정은, 미경.
난주는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정은은 동창인 남편이 코로나로 인하여 퇴직 후 오픈했던 키즈카페의 폐업으로 경제적 파산에 이른 상태로 빚을 갚기 위한 생업전선에서 시달리며 살고 있다.
미경은 아픈 엄마를 홀로 돌보면서 직장인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녹록지 않다. 오랜 친구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공유하거나 말한 이야기들이 각각이다.
난주의 빈둥지증후군, 남아도는 시간의 공허감, 여성으로서의 성적 박탈감.
정은의 경제적 파탄, 생활고, 빚투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적 상황. 요실금으로 인한 수치심.
미경의 간병 돌봄에 혼자 고립감 속에 지나가는 시간들, 관계들.
세 명의 인물들의 서사를 읽다 보면 50대에 이른 삶의 모습들이 빛나지도 안정되지도 못함을 본다. 나름 노력하면서 시절을 살아온 왔는데, 어쩌다가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절에 충실했건만,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것일까!
가장 측은지심이 느껴진 인물은 미경이다. 동성 연인의 결혼으로 관계가 정리되고, 어머니와의 간병 생활이 시작되고, 자매인 언니의 사라짐, 독박 간병의 고립무원 같은 생활로 이어진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미경에게는 가족은 있지만 가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하지 않을 때 혼자가 되는 건 별로였다.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여야 혼자라는 사실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이 그립지 않았다. 그저 그리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난주가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일시적 관계의 단절 이후 기다려준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장면이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된다.
난주는 입사라는 사회생활 없이 바로 결혼과 출산, 육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활 패턴은 많은 관계들의 정리와 변화가 오는 시기다. 그때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느껴지던 고마움과 왠지 모를 어깃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정은은 난주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의 안락한 삶이라고 자신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빈둥지증후군과 여성성의 상실로 허한 난주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 파산에 이른 정은이나, 독박 간병의 미경보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인물들은 다 각자의 행과 불행을 지고 오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여행지가 강릉인 이유는 각자의 사연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강릉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가 강릉과 연결되면서 그녀들의 삶과 포개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그런데 오십대를 앞두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꾸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50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았는데, 남은 시간마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헛헛했다.
오십이 된다는 것 소설의 문장처럼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은 시간을 그냥 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늙음을 이제 삶의 중심부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십을 앞두고 함께 할 친구들이 있고, 나눌 서사가 있다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가 어떤 삶이었을지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삶을 안도하면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읽었어요
2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
많은 돌봄 케어에 관한 책 중에서 제목과 부제의 직관적 문구가 들어왔다.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 돌봄은 자식 된 도리와 효의 측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양육과 간병 혹은 부모 돌봄의 차이는 다른 인간의 대기조이면서도 그 양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57쪽에서 말하듯, 성장과 독립이 아닌 의존과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작가의 문장이 한국적 시선에서는 냉정하게 비출 수도 있겠지만, 부모 돌봄의 서사가 눈물이나 후회 또는 화해의 흐름이 아닌 11년간의 자신의 경험과 감정, 삶에 대해서 가감 없이 말하고 있어서 오히려 오래된 미래를, 행운아가 아님을 그런 까닭으로 작가의 솔직한 말투가 전혀 냉정하게 들리지 않는다.
대략적으로 어머니와 발병, 발병 후 간병인과의 돌봄 과정, 어머니의 죽음, 사후의 생각들로 이야기가 나뉜다.
어머니의 발병 이후 병원을 오가고, 그들 사회의 의료시스템의 흐름을 보게 되었다. 노인 전문의가 한국 사회에서 대학병원에서 전문과로 운영되고 있는 것도, 다른 나라의 시스템의 수용이라는 생각과 그만큼 노인인구의 증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 이후 여러 간병인을 들인 끝에 어머니의 마지막 간병인이었던 프랜시스에 관한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간병인이라는 직업군과 사회적, 문화적 시선을 읽을 수 있다. 근래 출간되는 책들의 주요 화두로 대두되는 돌봄 노동과 간병인은 관계, 위치, 사회적 맥락은 여전히 선 밖의 이야기로 이제 선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느낌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의미나 구체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고용 관계로 시작했지만, 친밀도와 개인의 도덕성에 기대야 하는 부분이 갈수록 많아지고 때로는 감시하는 입장과 갑을 관계의 역전까지도 가게 되는 관계가 상주 간병인과의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프랜시스에게 심리적인 함의_빚진 것들_는 그녀와 작가의 자매들과의 관계의 추가 변하게 하곤 했다.
8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들었던 양가감정에 대한 작가의 술회가 간병하는 자식들의 공통된 감정이 아닐까 싶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지 않고 마지막까지 상주 간병인과 함께 할 수 있던 과정에는 이런 순간도 있었다는 술회가 그래서 현실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가정 임종의 과정에 대한 기록은 병원 임종이 대다수인 우리의 현실에서는 알 수 없는 과정들에 적확한 기록들로 임종의 사실적 과정을 보게 했다. 숨이 멈춰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고통에 대한 처우를 생각해 보게 한다. 병원 임종에서는 의료적 행위로서의 죽음만이 느껴지는데, 가정 임종에 대해서 작가는 짊어지게 된 책임감의 정서적, 심리적 무게가 상상이상이라고 했지만 임종의 과정에 임할 수 있다는 지점이 당사자나 가족들에게 더 나은 것이 아닐까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완화의료와 호스피스 케어에 대한 지점이 더 눈에 들어온다. 부모와 나의 미래이기에 이젠 먼 이야기로 흘려지지 않는다.
작가가 이 글을 쓴 여러 이유 중 의료시스템이 당사자들에게 어떤 정보를 제공하고, 당사자들은 어떤 정보들을 제공받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확고하게 들어온다.
죽음의 과정 속에서 가족의 반대로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 이른바 무의미한 연명치료, 존엄사에 방점을 찍게 된다.
현실적인 행동으로 자신과 배우자의 장기돌봄서비스 제공업체 등록했다는 후일담에서는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부모의 죽음 이후에는 나 자신의 죽음의 과정도 준비해야 한다는 당사자성이 각인된다.
작가는 책 곳곳에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냉랭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머니와의 관계 회복이나 화해보다는, 현실을 수용하면서 함께 가는 과정 속에서 이런 모녀 관계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모성이나 돌봄의 감성성에 어필하지 않는 그 모든 감정과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제가 말하듯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 작가가 보여줄 수 있는 서사는 다 보여준 것 같다.
인간 서사의 마지막이고 점점 중요한 삶의 화두인 죽음과 돌봄에 대한 직관적이고 명료한 산문 한 편을 읽었다.
책속의 문장
출처 입력
57쪽
나는 아이를 원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다른 인간의 대기조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이와 달리 어머니는 성장하지 않을 것이다. 점점 자라면서 강해지지도 않을 것이고, 자립하게 될 가능성도 없었다. 어머니는 쇠약해지고 있었다. 가끔 좋아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69쪽
내 삶이 좁아진 듯했다. 내 삶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듯했다. 나는 내 삶의 일부를 포기했고, 그런 생각을 했다. 꼭 해야만 하는 의무로 여겨지는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나 같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생각들을. 희생. 나는 자유의 상실이라는 현실에 저항했다. 특히 첫 이삼 년간은 크게 반항했다.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적응했다. 그러나 완벽하게 적응하지는 못했다.
106쪽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수명이 상대적으로 더 짧다. 돌봄에 필요한 노동과 인내심, 긴 근무 시간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정체된 것처럼, 멈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시간은 사람들에게 있거나 없는 것이다.
244쪽
대개 의학계가 노인을 취급하는 방식은 사회 전반이 노인을 취급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마치 노인이 더 이상 환영받지 않는 존재, 판매대에서 치워야 하는 존재. 자신이 쇠약해지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젊은 사람은 상상하지 않는다. 상상해야 할 이유도 없다. 노인의 모습은 우리를 미래의 현실 속으로 날려 보내는 불손한 탄환이다.
247쪽
나는 어머니를 몰랐다. 그 모든 일을 겪었음에도, 이 글을 썼음에도 나는 여전히 짐작만 할 뿐이다. 왜 어머니가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머니에게도 영혼이 암흑에 빠진 순간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떤 연유로 그랬는지도.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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