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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오기와라 히로시 (지은이), 권일영 (옮긴이) 지음
모모 펴냄

WOM : Word of Mouth
살인마 레인맨에 대한 소문을 이용하여 향수 마케팅
그리고 실제로 나타난 레인맨과 그의 범행들

***

사육한 가마우지처럼 아무 생각 없이 증거를 물어야 한다. 아무리 하찮은 사실이라도 잡히면 샅샅이 파악해야 한다. 다카하라 씨 집에 다시 들러 향수를 어디서 샀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이 쓰레기 가져가는 날? 역시 사키는 거짓말쟁이다.
'크크큭, 멍청이'
감각을 잃은 귀에 사키의 웃음소리가 들린 듯했다.
'뻥이었지.'

"기나오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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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이었던 아버지가 생을 마감하고 빨치산의
딸이 그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3일간의 이야기.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하여 주위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와 화해하게 된다.

비극적인 현대사와 좌우가 함께 묘하게 평화로운, 우리나라 축소판 같은 장례식장의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글로 봐선 모르고 소리로 읽을 수 있는 구수한 사투리들이 페이지들을 수놓은 책.
그리고 아름다운 사투리 "항꾼에"를 알려준 소설.

***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마침내 그 시원으로 돌아갔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참으로 아버지답게. 마지막까지 유머러스하게, 물론 본인은 전봇대에 머리를 박는 그 순간에도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민중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인류의 역사를 바꾼다는 진지한 마음으로 아버지는 진지하게 한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다만 거기, 전봇대가 서 있었을 뿐이다. 무심하게, 하필이면 거기. 이런 젠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신이 나서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흔 넘어서야 이해했다.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 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시골 태생이긴 하지만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웠지만 정작 자신은 노동과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노동은 혁명보다 고통스러있다.

삶이란 것이 오빠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오빠가 밝은 햇빛 속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오빠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조문을 마치고 자신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혁명가였던 내 부모에게는 연애도, 옷도, 화장도, 별 의미 없는 사치에 불과했다. 그 틈에 끼어 나는, 혁명가도 아닌 나는, 신념도 없는 나는, 일상의 평범한 대화를 맛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중이었다. 혁명가도 아니고 신념도 없는 주제에 진지하지 않은 것은 참지 못하는 꼰대 같은 어른으로. 그러니까 아버지, 나는 억울하다니까요! 그래봤자 아버지는 죽었고, 죽어서도 혁명가인 양 영정사진 속에서 근엄한 얼굴로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필시 그의 딸일 아이는 열일고여덟이나 됐을까? 앳된 얼굴이었다. 피부가 유달리 가무잡잡했다.
"우리 아버지를 알아요?"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데요?"
흔하디흔한 삼선 슬리퍼를 시멘트 바닥에 문지르며 아이가 머뭇거렸다.
"......담배 친군디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든 넘은 아버지의 담배 친구라니.

"우리 아리는?"
"일등!"
"아들보담 낫구만."
아버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마당을 빙 둘러 내달렸다. 새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나는 아버지의 목 위에서 등허리가 흠뻑 젖도록 웃어젖혔다. 우물가에 핀 달큰한 치자꽃 향기에 숨이 막 혔다.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내 아버지의 청춘이 담긴 사진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었다. 사진은 바닥에 남겨둔 채.
"자네 줄라고. 인자 우리 성 얼굴도 잊어불라고."

술이 불콰한 상태로도 지팡이를 다리처럼 자유롭게 쓰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오늘도 날은 화창했고, 도로변에는 핏빛 영산홍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허벅지 아래로 끊어진 그의 다리에서 새살이 돋아 쑥쑥 자라더니 어느 순간 그는 사진 속 그의 형보다 어린 소년이 되어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아, 작은아버지도 나처럼 이 길을 따라 떠나고 싶었구 나. 떠나려고 이 길을 걸어와봤구나. 그런데 왜 떠나지 못했냐고 나는 묻지 못했다.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어쩐지 알 것 같았다.

그 여름날 작은아버지가 웅얼거리던 말이, 까맣게 잊고 있던 말이 불현듯 기억의 표면으로 솟구쳤다. 한 등에 두 짐 못 지는 법인디.... 섬진강이 보이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에 올라타며 작은아버지는 분명 그렇게 혼잣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그날 작은아버지는 나를 뒤따라오며 등에 얹힌 두 짐을 보았던 것이다. 자기 등에도 평생 얹혀 있었을 두 짐을. 그 짐이 버거워 작은아버지는 떠나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술에 취해 한평생을 흘려보낸 것일까? 아버지의 살아남은 유일한 형제를 위해 나는 소주병을 꺼내들었다. 기왕 취해 보낸 일평생, 하루쯤 더 보탠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것도 그 원흉이 간 자리인데.

"딴 집 애기들은 엄마가 젤 좋다는디 우리 아리는 당신이 최곤갑소이."
"하모. 우리 아리한테는 나가 젤이제. 당신보담 나가 젤이여."
"아이고 좋것소. 당신이 일등이라."
"왜 나가 일등인 중 안가?"
"당신이 만날 놀아중게 글지다."
"아니여. 나가 맹근 누룽지가 자네 것보담 시배는 크거든. 우리 아리가 누롱지라면 환장을 허잖애."
아닌디. 누룽지 안 쥐도 아빠가 최곤디, 잠결에 중얼거렸고 아버지는 하하, 밤하늘이 시끌적하게 웃어젖혔다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
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담배를 피우다 말고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할배 뻿가루."
담배를 입에 꼬나문 채 봉지에서 유골 한줌을 집어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도 담배를 꼬나문 채 유골을 받았다.
"아이고, 아부지가 봤으면 장허다 하겄다. 가관이그마이. 혼차 보기 아깝다야."
아빠가 뭐? 할배가 뭐? 나와 아이가 동시에 외쳤다. 아이가 꺄르르르, 처음으로 나이에 맞게 소녀다운 웃음을 떠뜨렸다. 그러고는 아버지 유골을 제 머리 위로 획 집어 던졌다. 캄캄하지 않은데 미리 밝혀진 가로등 불빛에 하얀 뼛가루가 점점이 제 존재를 드러냈다. 골목이라 담에 막힌 것인지 뼛가루는 날아가지 않고 우리 머리 위로 쏟아졌다. 셋 중 누구도 몸 어딘가 내려앉았을 뺏가루를 털지 않았다.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쩐지 아버지가 여기,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창비 펴냄

18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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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형 인간 - 김이담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자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들이 있었던 것이 납득이 갔다. 다만 그런 인간들이 여자가 앞으로 살아갈 세계에서는 부디 소수이기를, 여자는 순수하게 바랐다.

밸런타인 시그널 - 오승현

다른 세계와 이어진 끈. PC에 깔아 놓은 세티앳홈 프로그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ATA 전파 간섭계에 들어온 우주 전파를 끊임없이 그에게 전해주고 있다. 조는 우주 지능체의 전갈을 받아 들고 새 시대를 선포하는 리더의 모습을 상상하며 지루한 시간을 견뎌왔다.

너에게 - 임수림

내 머리를 쓰다듬던 박사는 울컥하며 처음으로 나를 꼭 안아주어. 난 생각했어. 아빠가 날 만들 때 너무 정성을 쏟았나 봐. 아빠의 마음 조각이 내 마음을 이룬 것 같아.

우리의 능력은 축복이자 저주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래도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축복 같아요. 그러자 그녀가 말했어. 나도 진심으로 네가 언제까지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단다.
얘야.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이모님이 덧붙였어. 너에게는 꼭 축복만이 가득하기를 빌게.

그 이야기 기억나? 한 소년이 온 마을을 구하기 위해 자기 옷을 다 벗어서 뭉친 다음, 댐의 구멍을 막고 있었다는. 넌 오래전에 휩쓸려갔을 내 세계를 네 손으로 다 막아준 거야. 난 네 손이 무르고 터져도 못 본 체했지.
미안해. 이제 손 빼도 괜찮아. 구멍에서 손 빼.
정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도 괜찮아. 이젠 내 손으로 댐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그 용기를 주었으니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단편 수상작품집 2022

정욱, 김이담, 청예, 오승현, 임수림 (지은이) 지음
마카롱 펴냄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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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게 힐링이 되고 가슴 따뜻해지는 소설을 만났다.
읽는 내내 휴남동 서점에서 쉬는듯한 느낌...

소설 속 민준을 보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다.
힘들면 가끔 평일에 휴가를 내고 동해로 가서 아무도 없는 잔잔한 바다에 서핑보드와 떠 있곤 했던 나의 소중한 기억과 함께...

힘들 때 "일단, 해보지 뭐"라는 생각으로 추진했던 일들은 나에게 힘을 주어 결국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책을 보면 좋은 글귀들을 갈무리하는데, 이렇게 많이 갈무리한 소설은 처음이었다.
가슴에 와닿는 글이 너무 많아 끝없는 밀물처럼 들어왔다.

그리고...
이를 같이 동감해주는 사람... ^^*

***

여자는 민준이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눈인사를 했다. 얼굴에 퍼지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편히 구경하세요. 저는 방해하지 않을게요.

더는 무너지기 싫어 영주는 떠나온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마치 떠나온 사람들에 관한 이 세상 모든 이야기를 모으려는 것처럼 굴었다. 영주의 몸 어딘가엔 떠나온 이들이 모여 사는 장소가 있다.

"부모 자식 사이라고 해서 서로를 다 이해하고 맞춰주기만 할 순 없잖아요. 저는 이 책을 읽고 부모 자식도 결국은 어떤 의미에서든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생계 걱정 없는 전업 작가가 되기 위해 매일 일곱 시간씩 글을 쓴다는 한 작가는 북토크가 끝나고 영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번 해보는 거예요.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고민하는 대신 우선 써보자는 생각이었어요. 한번쯤은 이렇게 살아보고 싶었으니까."

조금 더 인간다워지는 거요? 책을 읽다 보면 자꾸 타인에게 공감하게 되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절로 성공을 향해 무한 질주하게끔 설계된 이 세상에서 달리기를 멈추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는거죠. 그러니 책 읽는 사람이 늘어나면 이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좋아질 거라고 전 생각해요.

그런데 책을 안 읽다가 읽으려다 보니 집중하기가 어렵거든요. 자꾸 딴짓하게 돼요. 전 그럴 땐 스마트폰 타이머 앱을 맞춰놓고 읽어요. 기본은 20분. 타이머가 울리기 전까진 무슨 일이 일어나도 책만 읽자. 생각하고 읽으면 돼요. 제약이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긴장이 우리를 집중하게 하는 거죠. 20분이 지났다면? 선택하면 돼요. 오늘은 20분 읽었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으면 그만 읽고 즐겁게 다른 일 하시고요. 조금 더 읽자 싶으면 타이머 한 번 더 돌리면 돼요. 타이머를 세 번만 돌려도 한 시간이에요. 우리 하루에 타이머 세 번만 돌려봐요. 하루 한 시간 독서는 이렇게 달성된답니다.

운동하고, 일하고, 영화 보고, 쉬고, 민준은 이 단순한 사이클이 이젠 제법 사이좋게 잘 맞물려 굴러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살아도 될 것 같았다.

민준이 제 자신에게 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꼭 뛰어야 하나.”
"뭐?"
"난 지금도 괜찮아."

영화를 보면서 민준은 단순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영화 속 인물들은 늘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거였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등장인물의 선택에 있었다. 그렇다는 건 우리 삶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우리 삶을 이끄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우리의 선택인 것이 아닐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민준은 문득 자기 역시 그때 포기를 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을 벗어나겠다는 선택.

"음악에서 화음이 아름답게 들리려면 그 앞에 불협화음이 있어야 한다고요. 그래서 음악에선 화음과 불협화음이 공존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생도 음악과 같다고요. 화음 앞에 불협화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거라고요."
"좋은 말이네요."
민준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데 오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슨 생각이요?"
“......지금 살아내고 있는 이 순간의 삶이 화음인지 불협화음 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내가 화음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불협화음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어떻게 알까."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빛이 둥글게 휴남동 서점을 지켜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영주가 동네에 서점이 있으면 좋은 이유라며 다섯 가지를 말해줬는데, 민준은 동네에 서점이 있으면 좋은 여섯 번째 이유를 지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점을 밖에서 바라보는 기분이 좋았다.

이제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고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처음에 혼자 살게 됐을 땐 저녁 즈음이 되면 일부러 '아' 소리를 내보기도 했다. 방금 자기가 한 행동이 웃겨 웃음을 터트린 적도 여러번이다.

부엌 불을 끄고 나서 숟가락으로 밥을 비비며 창문 쪽으로 걸어온 영주는 5분 전 모습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보며 밥을 먹던 영주는 그릇을 내려놓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쇼코의 미소를 들었다. 입을 오물오물하며 목차를 확인했다. '쇼코 의 미소' 역시 여섯 번째 소설을 읽을 차례였다. 소설의 제목은 '미카엘라'였다. 이 소설도 엄마와 딸이 주인공인 듯했다. 영주는 소설의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녀가 소설 끝 부분에 이르러 펑펑 울게 되리란 걸 짐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실패는 아니지 하고 영주는 방금 한 생각을 반박했다. 그 무엇에든 예외는 존재하고,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의미 부여는 늘 중요하지!) 과정이 즐거 웠다면 (힘은 좀 들겠지만!) 결과를 따질 필요 없고, 무엇보다 영주는 지금 서점을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애쓰는 이 시간이 좋았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그렇긴 한데, 재미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숨통이 트이기도 하니까."

"마른 우물에서 한번 일어나보는 것도 좋을 거라고는 생각해. 한번 그래 보라는 거지.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라. 아무도 모르니까 한번 해보라는 거야. 궁금하잖아. 일어나보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렇다면 차라리 잘하려는 욕심을 버리는 게 나을 듯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만 않는다면 최악의 하루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지에서 모르는 길을 걸을 때의 기분이 나더라고요. 골목골목을 기웃기웃하며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기분, 낯설어서, 모르겠어서 설레는 기분. 이런 기분을 느끼려고 사람들은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리고 휴남동 서점이 사람들에게 그런 곳이 아닐까 싶었고요."

분명 이 공간엔 승우를 잡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남은 시간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이미 오늘은 최악의 하루가 될 수 없겠다고 승우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맥주가 아니라 서서 마시는 맥줏집 맥주를 마시고 싶더라고요."
"서서요?"
"네, 앉으면 피곤이 좀 가시잖아요. 그게 싫어서 엄청 피곤한 상태로 맥주를 마시고 싶더라고요. 그럼, 어떤 맛일까....
승우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영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맛이었는데요?"
“꿀맛."
"기어이 서서 마시는 맥줏집을 찾아간 거네요?"
"그럼요. 사람이 많았어요. 겨우 자리 하나 났더라고요. 거기 서서 맥주 한잔을 하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진 않네요."
"제가 하려던 말이 그거예요."
"행복?"
"네,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진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행복은 먼 과거에나 먼 미래에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바로 내는 앞에 있는 거였어요. 그날의 그 맥주처럼. 오늘의 이모과차처 럼요."

“일생 동안 공들여 만든 성취, 좋아요. 그런데 아리라는 분의 말이 나중에는 이렇게 이해되더라고요.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긴 인생을 저당 잡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요. 마지막 순간에 한 번 행복해지기 위해 평생 노력만 하면서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요. 이렇게 생각하니까 행복이란 게 참 끔찍해졌어요. 나의 온 생을 단 하나의 성취를 위해 갈아 넣는 것이 너무 허무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이제 행복이 아닌 행복감을 추구하며 살아야지 하고 생각을 바꾼 거예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다 행복하진 않아. 좋아하는 일을 좋은 환경에서 하면 모를까. 어쩌면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겠네.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 돼 있지 않다면, 좋아하는 일도 포기하고 싶은 일이 되어버리거든. 그러니 우선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그럼 무조건 행복해질 것이다. 라는 말은 누구에겐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어. 어쩌면 너무 순진한 말이기도 하고."

민준은 커피를 내리면서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말 그대로, 정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거다. 할 수 있는 만큼 해도 실력이 늘었다. 커피 맛이 좋아졌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이런 속도로, 이런 마음으로 성장해도 충분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세계 최고 바리스타가 돼서 뭘 하겠는가. 삶을 갈아 넣은 후에 최고 라는 찬사를 받아서 뭘 하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민준은 지금 자기가 신 포도의 여우가 된 건가 싶었지만, 아니라고 결론을 냈다. 목표점을 낮추면 된다. 아니, 아예 목표점을 없애면 된다. 그 대신 오늘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거다. 최선의 커피 맛. 민준은 최선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민준은 더 이상 먼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다. 민준에게 현재에서 미래까지의 거리란 드리퍼에 몇 번 물을 붓는 정도의 시간일 뿐이다. 민준이 통제할 수 있는 미래는 이 정도뿐이다. 물을 붓고 커피를 내리면서 이 커피가 어떤 맛이 될지 헤아리는 정도. 이어서 또 비슷한 길이의 미래가 펼쳐지길 반복한다.

너 정말 행복해야 해. 대신 나는 너 없이 불행 하게 살아볼게. 누군가가 나와 함께 살아서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왜 여태 몰랐을까. 내가 불행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너는 날 잊어. 나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을 잊어. 날 떠올리지도 말고, 우리가 함께했던 날들을 기억도 하지 마. 나는 널 안 잊을게. 평생 널 원망하며 살 거야. 날 불행하게 만든 여자로 널 기억하며 살 거야. 앞으로 내 앞에 다신 나타나지 마. 우리 영원히 보지 말고 살자."
창인은 말을 끝마칠 때쯤에는 펑펑 울고 있었다. 이제야 지금 자기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했다는 듯이.
영주는 창인과 헤어진 뒤 처음으로 그날을 떠올리며 마음 놓고 울었다. 늘 미안해서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울음을 터트릴 수 없어서 꾹꾹 눌러가며 울었다. 창인이 잊으라 했기에 잊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간이었다. 너무 미안해서 제대로 미안해하지 못했고 너무 잘못했기에 잘못했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그런 영주에게 오늘 창인이 태우를 보내, 이젠 마음껏 기억하고 마음껏 울어도 된다고 말해준 거였다.

서점을 열 동네로 휴남동을 선택한 건 우연히 휴남동의 '휴'자가 '쉴 휴(休)' 자라는 걸 알게 되어서였다. 이를 알고부터 영주의 마음은 휴남동에 꽂혔다.

"영원히 지속되는 꿈은 없다.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된다. 그러니 어느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런 삶이 허락됐으면 좋겠어요."
민준이 느릿하게 일어서며 말하자 영주가 고개를 들며 "어떤 삶?" 하고 물었다.
"한번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삶을 살아보는 거예요. 그리고 다음엔 꿈을 좇는 삶을 살아보는 거죠.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삶을 살 땐 나한테 더 잘 맞았던 삶을 사는 거예요. 아주 즐겁게."

"좋은 사람이 주변에 많은 삶이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 사회 적으로 성공하진 못했을지라도 매일매일 성공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거든, 그 사람들 덕분에."

"너 예전에 단추만 만들어놨다가 낭패 봤다고 했잖아. 지금은 어떠냐고."
민준이 잠을 털어내느라 머리를 흔들면서 성철을
쳐다봤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답했다.
"간단해. 옷을 바꿔 입었지. 그런데 그 옷에는 구멍이 먼저 뚫려 있더라. 구멍에 맞게 단추를 만들었더니 잘 꿰졌어."
"뭐야. 그게 다야?"
"이 세상 어딘가엔 먼저 널찍한 구멍을 뚫어놓고 누군가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더라는 거야. 찾아온 사람이 단추를 잘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기까지 하면서."

내 삶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도 남에게 들려줄 만한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민준씨에게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첫날 민준 씨에게 했던 말을 뒤집고, 나, 이 서점 더 운 영해보려고요. 지금까지는 아무래도 소극적인 면이 많았어요. 너무 열심히 일을 하다가 과거처럼 살게 될까 봐 두려웠어요. 이 공간을 일'만' 하는 공간으로 인식하게 될까봐 두려웠어요. 또, 솔직히, 전 아직도 처음 6개월처럼 이곳에 손님처럼 드나들고 싶은 마음도 간직하고 있답니다. 이런 생각과 감정이 뒤섞여 그간 우물쭈물한 적이 많아요. 서점을 계속 운영해야 할지 망설인 적도 많고요. 하지만 이젠 그만 망설이려고요. 난 이 서점이 좋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좋고, 이곳에 오는 자체가 좋아요. 그래서 휴남동 서점 계속하고 싶어요.

내 꿈의 공간이기도 한 이 서점을 오래도록 살아 가게 하고 싶어요. 서점과 책에 관해 계속 고민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이런 고민을 하는 제 옆에 민준 씨가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어때요, 민준씨. 우리 같이 더 일해볼래요? 혹시 휴남동 서점 직원으로 일해볼 생각이 있나요?

"작가님이 베를린으로 오는 게 좋을지 어떨지 저도 잘 모르 겠어요. 얼마 전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마음을 모르겠을 땐 사고 실험을 해보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사고 실험도 잘 안 돼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어떻게요?"
"상상해보세요. 베를린에서 저와 같이 걷고 있는 모습을요. 같이 책방도 돌아보고 밥도 먹고 맥주도 한잔하는 모습을요. 잠시만, 한 30초만 상상해보세요. 30초 드릴게요."

그러니까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자기만의 속도와 방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고민하고 흔들리고 좌절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써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스스로 나를 포함해 나와 관계된 많은 것을 폄하하게 되는 세상에서 나의 작은 노력과 노동과 꾸준함을 옹호해주는 이야기를, 더 잘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느라 일상의 즐거움을 잃어버린 나의 어깨를 따뜻이 안아주는 이야기를.

매일은 아닐지라도, 자주는 아닐지라도, 우리에게도 지금의 내 삶이 '그것으로 됐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초조함과 조급함이 사라진 그 순간엔 그간 최선을 다해 여기까지 온 내가 그저 대견하고 실은 꽤 마음에 든다. 이런 소중한 순간들이 모인 곳이 휴남동 서점이라면, 더 많은 분이 더 자주 저마다의 휴남동 서점을 그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오늘 하루를 보내고 있는 당신을 응원하고 싶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지음
클레이하우스 펴냄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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