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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J. D. 밴스 지음
흐름출판 펴냄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에서 채사장은 보수를 지지하는 노동자를 '어리석다'고 표현했고 근 몇 년 간 진보 정당은 '어리석은' 노동자들을 '계도'하지 못했다. 정부의 지원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면서 '복지 여왕'들의 나태에 치를 떠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나는 억압과 소외가 사라진 세계를 꿈꾸는 진보주의자인데, 그래서 이런 물음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를 어리석다고 말하는가? 국가는 '그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 밴스는 가난한 백인 노동자 출신으로서 지금의 '큰 정부'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고 항변했고 뭇사람은 그의 주장이 보수 진영에게 유리하게 인용될 것을 우려한다. 확실히 그의 주장엔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게 왜 문제란 말인가? 만약 보수주의가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에 더 잘 기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나는 언제든지 보수를 지지할 것이다. 물론 밴스는 틀렸을 수 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어느 모로나 더 어리석지 않다는 말은 입바른 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더 어리석은지를 항상 잠정적으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힐빌리의 노래>>는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다양한 변수를 이야기하지만 핵심은 지리적, 문화적, (그리고 특히) 가정 환경으로 귀결된다. 가난한 동네는 물질적 빈곤만 대물림하지 않는다. 마약과 성을 탐닉하는 부모, 접시가 날아다니는 주방, 학습된 무기력, 약속이나 미래에 대한 투자는 무용한 것이라는 인식, 공부는 '계집애'스럽다는 편견과 마초이즘, '스파클링 워터'가 무엇인지부터 장학금 수혜 방법까지에 이르는 정보를 제공할 사회적 자본의 부재를 밴스는 가난과 함께 물려받았다. 그는 그와 같은 환경에서 삶의 중요한 순간에 적절한 방식의 정서적 지지를 보내 준 사람들이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시인한다. 관료주의적이고 체계적인 감시 시스템은 그를 돕지 못했다. 사회복지사는 실질적 보호자인 조부모를 무시하고 어린 밴스를 위탁 가정으로 보내려 했고 밴스는 사랑하는 엄마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모든 게 괜찮다고 거짓말해야 했다. 마약 중독자가 어린아이에게는 잃고 싶지 않은 엄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쪽과 모르는 쪽 중 어느 쪽이 더 어리석은가. 밴스의 언어로 듣고, 말하려는 제도의 노력은 충분했는가?
억압을 중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담론이 확장하면서, 진보는 점점 더 '엘리트'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인종, 난민, 젠더, 기후와 같이 세분화된 의제들이 진보의 외연을 넓히는 동안 러스트벨트의 빈부 격차는 꾸준히 커져 왔다. 나는 신좌파가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힐빌리'의 삶을 두껍게 읽자는 주장부터가 애초에 신좌파적 사유에서 빌려 온 것이다. 그러나 '신좌파'라는 용어가 암시하는 것처럼 '구좌파'의 의제들이 '한때' 진보를 추동했던 낡은 담론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 가난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현재이다. 단지 가난이 물질적 빈곤으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오바마의 '매끄러운' 연설에서 느껴지는 소외감의 형태로서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을 뿐이다. 밴스의 말대로 미국이 이미 빈자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사회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부가 준 돈으로 술을 사 마시는 사람들이 이른바 시스템의 개선만으로 새 삶을 살게 되진 못하리라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진보의 책무 중 하나는 '그들'의 언어를 독해해 내고 '그들'의 언어로 말하기를 연습하는 일일 것이다.
밴스가 '운'이라 표현한 '애정'은 산업 사회 이래로 '가사화'되면서 '비가시화'되었고, '애정 결핍'과 같은 경험은 치유학 패러다임의 지배 하에 심리학적 문제로 밀려났다. 그래서 나는 <<힐빌리의 노래>>를, 애정의 불평등이 직조하는 억압을 묵과해 온 현실을 고발하는 책으로 전유한다. 사랑은 이제 사회적 문제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사적인 영역으로 남아야 한다면 우리에겐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사랑의 장소가 필요하다. 어쩌면 '진보의 실패'를 돌파할 길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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