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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어바웃 러브
벨 훅스 지음
책읽는수요일 펴냄
디보티즘이라는 말이 있다. 장애를 가진 신체에 대한 일종의 페티시즘인데, 이를테면 다리가 절단된 몸에 끌리는 것이다. 디보티즘도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김원영은 남성 디보티에게 구애를 받은 장애 여성 앨리슨의 경험을 소개한다. 앨리슨의 주변인들은 그를 소름끼쳐하고, 앨리슨의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내 몸에 끌림을 느끼는 게 비정상이란 말인가? 큰 가슴이나 엉덩이는 괜찮고, 다리가 잘린 몸은 매력적인 신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나아가 앨리슨이 '정상적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벨 훅스가 자각하고 있듯, 사랑은 자동 발생적이지 않다. 우리는 올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란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고, 바로 이런 사랑을 할 때 우리의 삶이 충만해질 것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신체적 매력보다 상대의 잠재력과 본모습을 발견하는 '진짜 사랑'을 추구하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앨리슨은 디보티즘 같은 '변태성욕' 없이도 충만한 사랑을 누릴 수 있으리라. 그런 사회가 도래한다면 말이지. 그러니까 훅스는, 매력의 분배가 불평등한 사회에서 앨리슨이 어떻게 사랑을 쟁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는 바가 없다. 그저 좋은 사랑을 정의하고 그 효과를 광고할 뿐이다. 이토록 간편하게 'How'에 괄호를 칠 거라면, 나는 그가 적어도 'All About Love'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출판하는 일에는 보다 신중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나는 참된 사랑을 통해 너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자아를 확장하고 싶어. 그래서 비록 네 몸에 끌리지는 않지만, 너를 내 사랑으로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렸어."라는 말을 듣는 앨리슨의 심정은 어떨까? 김원영은 디보티즘 자체가 사랑인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못박지만, 한 사람의 신체가 그의 개별성이 구현되는 장소라는 점을 지적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의 몸을 욕망하기를 원한다. 나의 신체는 나의 영혼만큼이나 고유한 것이고, 나를 구성하며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훅스의 정의대로 사랑이 행동이고 실천이라면, '몸'을 사랑의 촉매 정도로 국한하는 담론이 오히려 일종의 자기기만일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무엇이며 왜 좋은지를 명료하게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실천이고, 실천의 장벽에는 우리의 의지를 넘어서는 환경들이 산재한다. 나는 훅스의 책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바뀔 수 있는 삶에 이미 어떤 특권이 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사랑은 더, 더 깊은 딜레마까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훅스의 말마따나 사랑은 너무도, 너무도 중요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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