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지식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 여성주의에 무지한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아직도 여성주의를 아는 것 자체로 비난받는 경우도 흔하다.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지만,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다. 두 경우 모두 지식이 특정한 사회의 가치 체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교양과 예의뿐 아니라 권력을 드러낸다. 왜 여자들이 취업하려고 하지? 장애인도 애를 낳을 수 있나? 왜 노인이 사랑을 해요? 동성애자도 실연당해요? 흑인도 철학자가 될 수 있나? (이주 노동자에게) 왜 한국에 왔나? 이 같은 질문은 남성, 비장애인, 젊은 사람, 이성애자, 백인, 한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여성은 ‘약자’일수록 여성으로 인식되며, 남성은 ‘강자’일수록 남성으로 간주된다.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단지, 말해지는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 조각, 남자가 만든 판타지, 국민·시민·민중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動産)일 뿐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하지만 여성들은 안다. 장애인이나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때와는 다르게, 자기 권리를 외치는 여성을 사회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여성은 ‘어머니’이거나 ‘창녀’일 뿐, 지식인이나 중산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과학적’ 여성운동은, 여성을 불쌍한 피해자로 재현하여 시혜자인 남성 주체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희생자화는 타자화의 가장 세련된 형태일 뿐이다).
‘정신 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상적인 모성애의 대상은 아들일 뿐이다. 이에 대한 가장 적실한 사례는 여아 낙태일 것이다. 딸은 자식의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만 명의 (여성이 아니라) 어머니들은 ‘어미의 본능’마저 거부하며 자발적으로 아이를 살해한다. 자녀는 성별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다.
사실 ‘생계 부양자 남성/가사 노동자 여성’이라는 성역할 모델은 극히 일부 중산층만의 전형일 뿐,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은 생계 부양자이자 가사 노동자다. 하지만 여성은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 임금의 절반을 받고, 남성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성보다 더 많이 받는다. 잠재적 어머니로 분류되는 여성 노동자는 노동 시장 진입에서부터 임금, 승진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냐, 노동자냐’라는 정체성을 택일할 것을 강요받거나, 택일하지 못할 바에야 둘 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라는 생각 때문에 여성은 다 같다고 간주된다. 그래서 한 여성의 실수나 무능력은 언제나 전체 여성을 욕 먹이는 일이 된다.
남성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남성 명사에는 인(人)이 붙지만, 여성 명사에는 녀(女)가 붙는다. 우리말 여성형 지칭에서 유일하게 인자(人字)가 붙는 경우는 미망인(未亡人,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여자)뿐이다(이 용어는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가 뒤따라 죽는 인도의 사티 풍습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다).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만난 여성도 자신이 사적 영역에서 만난 여성의 연장으로 본다. 그들의 ‘휴식처’인 가정에서 만나는 어머니·누이와 ‘놀이터’인 술집에서 만나는 접대 여성이, 남성이 여성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과 동료나 경쟁자로 관계 맺어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것은 가부장제를 조금도 위협하지 않는 사건이지만,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그것이 강간이든 상간이든, 사회적 추방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피해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 아이를 남기고 폭력 가정을 탈출하는 여성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순결이 그러하듯이 모성애 역시 여성의 목숨과 맞바꿔야 한다는 남성 사회의 메시지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성이 자신의 성역할에 충실하며 집에만 머무를 때, 어머니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때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하지만 그녀가 욕망을 드러내며 집 밖으로 나올 때, 남의 어머니일 때 그녀는 아줌마다. 그녀가 집에서 내게 밥을 해줄 때는 어머니지만, 그녀 자신이 음식점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을 때는 아줌마다. 여성은 평생토록 서비스를 하는 주체이지 받는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서비스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여성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여성이 공공 장소에서 자기 욕망으로 젖가슴을 드러낼 때 그녀는 필시 몸을 파는 여성이거나 ‘미친 년’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성스럽고 숭고하다.
한국 사회는 성폭력 피해 여성의 인권에 관심이 없으며,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가장 섹시한 성관계는 성폭력이라고 믿고 있다.
하긴, 어차피 외로움이란 삶의 조건이어서, 결혼해도 외롭고 안 해도 외롭다. 시인 신현림의 표현대로, “여자에게 독신은 홀로 광야에서 우는 일이고, 결혼은 홀로 한 평짜리 감옥에서 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배려, 보살핌, 사랑의 생산을 위해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별 분업인데, 남성들은 주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족이나 연애 관계에서 관계성을 경시 혹은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육체 노동, 감정 노동, 정신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관계에서 남성의 ‘과묵함’이나 모든 면에서 감정적이지 않으려는 심리는 이 때문이다.
남성에게 섹스는 (당연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하거나 못하는 것이지만, 여성에게 섹스는 좋거나 싫은 것이다. 여성에게는 남성과 다른 (차별적인) 규범이 적용된다. 여성이 섹스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섹스를 잘하거나 못할 때, 그녀에게는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자, ‘걸레’라는 낙인과 추방이 기다린다.
여성은 남성의 벗은 몸을 보고 공포를 느끼지만, 남성에게 여성의 벗은 몸은 쾌락의 대상이다. 남성은 돈을 지불하면서 여성의 몸을 즐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무게는 절제와 인내력 등 자기 관리의 지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인격과 정체성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물론 뚱뚱한 남성도 환영받지 못하지만, 몸무게가 일상적으로 남성의 삶을 통제하거나 규율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체중은 곧바로 취업·결혼·대인 관계·자존감으로 연결되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다. 여성의 거식증은 연속체로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먹는 양을 조절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성범죄의 원인은 일상의 성차별, 성역할 구조인데, 이를 수용하게 되면 모든 남성은 피곤해진다. 남성은 잠재적 피고인이 되지 않기 위해 기존의 여성관, 세계관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소수 ‘변태’의 문제로 축소하면 성범죄는 남성 문화의 결과가 아니라 특수화, 엽기화된다.
그래서 여성운동은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여성들이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맞아 죽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미국의 시각이 걸러지지 않은 보도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최근 어느 시사 잡지는 소말리아 내전에 자원한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녀는 전쟁 상태가 훨씬 살 만하다고 말한다. 군인으로 음식을 배급받고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이 평화로운 공간이라는 언어는 누구의 경험인가? 여성에게 무엇이 일상이고 무엇이 전쟁인가? 성별을 독자적인 사회적 모순, 정치 제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다가 죽이는 것은 ‘과실치사’지만, 아내가 정당방위로 남편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때리는 남편이 가정파괴범이 아니라, 폭력에서 탈출하는 피해 여성이나 이들을 돕는 여성운동가가 가정파괴범이다.
무엇이 사회이며, 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가정과 사회는 다른가? 남편에게 당하는 고문과 국가로부터 당하는 고문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국가 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는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결국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남녀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역할 규범이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남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은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 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 방지법으로 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
가정폭력은 피해가 명백히 가시화되어야만 ‘진실’이 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은 피해 이후에 논의된다. 여성운동가들이 가정폭력이 사회적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해 심각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을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권리’인가, 아니면, ‘남성으로서의 권력’인가?
남성들은 ‘양성 평등’을 위해 여성과 같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가사 노동, 자녀 양육 등 주로 여성이 해 왔던 재생산 노동은 경시되고 비하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적인 노동’을 하는 것은 수치와 무능력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인권 개념에도, 보살핌과 돌봄, 배려의 가치 같은 ‘여성적 경험’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 개인을 여성이라는 전체 집단의 속성에 귀속시키지만, 사실 남성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개념은 대단히 협소하다. 정숙하고 젊고 예쁜 여성만이 여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흡연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있지만 모든 여성에 대해 그런 것은 아니다. ‘술집 여자’나 할머니 혹은 여성 지식인의 흡연은 자연스럽다. 한국 사회는 젊은 미혼 여성의 흡연만 처벌한다. 이는 젊은 여성만이 진정한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흡연은 여성성을 위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집 여자’와 할머니는 남성 사회가 규정한 여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흡연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성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것은, 그녀가 가난해서라기보다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가난하지 않은 여성도 인신매매에 의해 성판매 여성이 된다. 가난한 남성이라 할지라도 여성에게 성을 팔지는 않는다. 성매매는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성차별의 문제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이 파는 것은 몸이지 성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성으로 간주되며, 여성의 성은 팔거나, 팔리는 상품이 된다. 남성 노동자가 파는 것은 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팔리는 노예가 아니다.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규범적인 여성성을 대표하는 중산층 여성은 군대에서 허드렛일을 할 이유가 없다. 때문에 남자들 틈에서 살기로 작정한, ‘고귀함을 잃어버린’ 가난한 여성들은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으며, 이들에 대한 성적 비하는 남성 군인들의 성 정체성 확립과 남성 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남성성은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를 전제로 구성되기 때문에, 후방에서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할 여성이 남성과 참호에 같이 있는 것은 남성의 자아를 짓밟는다.(“내가 기집애랑 이러려고 군대에 왔나.”) 여성이 전투직에 종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남성 정체성을 위협하는 성역할 파괴를 의미한다.
군대가 젠더의 산물이며, 폭력과 섹스가 결합한 제도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기지촌은 이미 그 자체로 성별화된 공간이다. 군대 내 성매매를 ‘위안’이나 ‘휴식’ 등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 권력 행위로서의 성폭력 문제를 ‘신체의 요구’라는 생물학적 주제로 이동시켜, 가해 남성의 책임을 비가시화하고 여성의 고통을 주변화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운동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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