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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장편소설)의 표지 이미지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지음
민음사 펴냄

-거기 그만두면 안 돼?
강선이 말했을 때, 은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사실 빠른 철렁은 아니고 철-렁이나 처얼-렁에 가까운 편이었다. 느린 하강을 감지하는 마음이랄까. 부러지거나 휘거나 쓰러지지 않으려면 직장과 주거지를 계속 옮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떤 날은 그 시기가 아직 먼 것 같았고, 가끔은 그 시기가 가깝게 느껴졌으며, 우울한 날은 이미 지난 것처럼도 여겨졌다. 저승으로 가는 통로 위에 세워졌나 싶게 매번 나빠지는 오래된 학교에서 지나치게 소모적으로 살고 있었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별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하는 그런 넌더리야. 수백만 해외 동포는 다정하게 생각하지만 너는 딱 싫어. 그 어떤 오해도 다른 맥락도 끼어들 필요 없이 누군가를 해치는 너의 행동 때문에 네가 싫어.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홍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휠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두 사람은 몇 년새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있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길게 말하지 않아도 쉽게 좋은 호흡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나 연인은 아니었다. 매주 손을 잡고 걸어도 연인은 아니었다. 은영은 살아 내는 일이 버거워서 먼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모든 상황이 임시적이라는 걸 늘 암시했다. 여기엔 잠시 있는 거예요, 라고 항상 내비치는 여자를 향해 감정적인 경계선을 넘기에는 인표가 너무 현명했다.
은영에게 아주 미약하게나마 모진 의도가 없었다 해도, 머물지 않겠다는 그 표정만으로 지난 몇 년간 인표는 신경통 비슷한 것을 않아야 했다. 쉬운 게하나도 없는 관계라면 놓아야 하는 관계겠지. 그런 말 그대로. 기운 뺏기는 관계는.

마음속에서 부실한 선반 같은 것들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곳에서 눕은 나사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내려앉는 그런 소리였다.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도 있을 듯한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게 용의 몸이 떠올랐다. 10센티쯤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인표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용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힘내, 떠 봐. 이번엔 끌어내리지 않을게. 한 번 더 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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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나는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이런 식이었구나. 이게 나였구나. 나는 사는 동안 내 이야기의 완벽한 '외부인'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흉내. 그것은 흉내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내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내 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단자 온전한 슬픔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해나는 해나대로 대진의 진정성을 폄훼했고 대진은 대진대로 해나의 삶을 대진의 세계에서 아주 쉬운 방식으로 추방했다.

언젠가 태수씨가 보는 유튜브 쇼츠를 함께 본 적이 있는데 유독 그런 내용이 많이 나왔다. 메갈이 어쩌고 한국 여자들이 어쩌고... 나는 태수씨에게 이런 것들을 정말 믿느나고 물었고 태수씨는 실제로 여자들이 그렇지 않으냐며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나는 태수씨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왜냐하면 태수씨는 자식이라곤 나를 포함해 딸믄 둘이었기 때문이었다. 자꾸 요즘 여자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가 요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태수씨는 가까이 있는 나를 두고도 저멀리 있는 요즘 여자들을 보는 식이었다.

그래도 나는 태수씨를 사랑했다. 인셀은 사랑하지 못해도 그런 태수씨 정도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역사를 알면 그 사람을 쉬이 미워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소연의 소설에는 비슷한 여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계급적 유사함으로 인한 아비투스 때문이지만, 당사자들에게 그것은 몰개성의 표지인 동시에 동일시의 표적이 된다. 문제적 행동을 수정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비난 섞인 충고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여성에게 내재화된 검열의 표현이자 여성 동성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고질적인 형태의 애정이다.

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문학동네 펴냄

1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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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아픔이일 때는 읽는 것을 추천하지 않음.

그때 니는 부영이 정원을 지켜주는 방식이 에전과 달라진 것 같디는 생각을 했다. 그게 부영이 변해서인지 정원이 변해서인지 아니면 부영과 정원의 거리가 달라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부영은 자신이 도저히 손쓸 수 없는 먼 곳을 항해 치달려가는 정원을 보며 알 수 없는 불길함에 훠싸였는지도 모르겠다.

-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

멋있어. 반희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풍경이 괜찮지?

아니. 채운씨가 멋있다고.

내가 멋있다고?
채운은 웃음이 났다.

참, 별게 다. 지금 우리가 가는 데는 예전에 내가 촬영지 헌팅 다니다알게 된 집인데 말이 펜션이지 진짜 절간이 따로 없어.

멋있어.

또뭐가?
채운이 실실 웃었다.

이런 데도 다 알고 정말 멋있어. 채운씨

아, 그만해! 웃겨서 운전을 못하겠어.

-

엄마. 밤새 무슨 일 있었어? 말투도 막 바뀐 거 같아.
뭔 소리야? 반희가 채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 이거 너한테 배운건데.
와. 채운이 과장되게 손백을 쳤다. 내가 그렇게 덧있게 말한다
고?

-

내가 동생에게 경탄하는 동시에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대목이
이것이다.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렇게 금세 풀고 마는가.

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문학동네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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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너울 지음
안전가옥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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