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연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주연

@yijuyeonxm0c

+ 팔로우
상처 없는 계절의 표지 이미지

상처 없는 계절

신유진 지음
마음산책 펴냄

읽었어요
부서졌으나 아주 망가지지는 않겠다는 각오로, 상처 입었으나 병들어 죽지 않을 마음으로, 오래 가난하지 않을 희망으로.

;책의 첫 장을 열면 실린 글이다. 처음부터 감성을 일깨우는 문장들이 들어온다. 각오와 죽지 않을 마음, 가난하지 않을 희망이라는 글들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소회와 지금과 앞으로 살아갈 태도가 전해진다.



문맹의 시간 42쪽
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믿음으로 기억한다.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쓴다는 작가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가 대단한 작품을 쓴 직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문맹의 시간을 살아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시 오래전 내가 간직했던 바깥 언어를 떠올리며 나의 믿음을 적어본다.

‘쓴다’

이 말에는 과거형도 미래형도 필요하지 않다.

;자신의 경험과 공감대가 있을 때 더 들어오는 글들이 있다. 독서모임에서 현재 중국에 파견 나가 있는 분이 있다. 이 장은 그분이 공감이 많이 된다고 했다. 전에 읽었던 크리스토프의 책 이야기와 작가 자신이 이방인으로서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가 함께 덧씌워지면서, 그럼에도 쓰고자 하는 이의 마음도 다가오고, 이방인으로서의 느꼈을 고독감도 함께 전해진다. 외국에서의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은 없으나, 살면서 느끼는 삶의 이방인의 고독감이 종종 느껴진다. 지금 이 삶에서 이방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순간순간의 느낌이 전해져 올 때, 두 작가처럼 이 시간을 잘 견디고 살아낼 수 있을까 스스로 질문해 본다.


아름답게 어긋나기 47쪽
누군가 내 일을 물으면 번역이라는 말보다 글을 ‘옮긴다’라는 동사를 써서 말한다. 동사로 말하는 나는 몸으로 말을 살아내는 사람이 된다. 의자에 앉아 더 오래 엉덩이로 버티고, 납작한 활자가 아닌 피와 살과 뼈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만지는 마음으로 단어를 고른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창작일 것이다. ‘옮긴다’는 말속에는 머물던 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을 향하는 이동의 의미가 있고 그 걸음에는 새로운 시선과 발견, 길의 확장이 있으니 그것이 창작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번역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창작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이다. 두 번역가의 에세이 제목을 빌려 작가이면서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번역에 대한 사유가 작가 자신의 삶의 여정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꿈이 진실이 될 때까지 67쪽
꿈은 이야기의 영감이다. 영감과 계시는 다르다. 계시의 주체는 ‘나’가 아닌 ‘그 누군가’이고, 삶이 그가 정해놓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그의 뜻을 미리 안다고 달라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영감’은 다르다. 누군가 살짝 불어넣어 준 ‘숨’처럼, 그것은 형체 없이 내게 온다. 그러니까 형체를 만드는 주체가 ‘나’인 것이다. 꿈을 재료로 쓴, 영감으로 쓴 모든 문학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진실한 무언가로 바꾸어 놓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거짓은 아니라는 엄마의 말은 분명 틀리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창작자의 몫이니까. 물론 문학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라는 커다란 창작품에 비하면 문학은 그저 작은 극이지 않은가.

;누군가 살짝 불어넣어 준 숨을 통해서 인생이란 창작품을 잘 만들고 있는 걸까?
영감과 계시에 대한 표현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초점이 쏠린다. 신의 계시는 주체가 나가 아닌 신이기에 영감이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듯하지만 다른 간극의 계시와 영감은 영감을 통해서 스스로 꿈을 찾아가려는 인간의, 인생이 모습이 보인다.


꿈 바깥의 삶 71~72쪽
꿈의 자리를 채웠던 것들이 다 빠져나간 뒤, 내게는 남은 게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애썼을 뿐이다. 그것은 꿈 바깥의 삶이었고, 나의 배움은 꿈이 사라지자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한동안 텅 빈 사람을 살았다. 모든 게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난 후에야 내가 단 한 번도 꿈 바깥의 사람을 살뜰하게 돌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왜 아무도 우리에게 꿈 바깥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에도 무엇이 되지 않았을 때의 삶을 사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무엇을 하든 나로서 사는 일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연극을 그만두고 현실을 살기 위한 바깥의 삶이 시작되면서 보지 못했던 현실의 삶이 보이기 시작하고 의문이 든다. 꿈이란 걸 이룬 이보다는 현실에 발 딛기 위한 바깥의 삶이 더 보편적일 텐데. 꿈을 이루던 현실을 살던 ‘나로서 사는 일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 맴돈다. 성취만을 삶이라고 한다면, 성취에 이르지 못한 것들은 다 무의미한 일인 걸까. 바깥의 삶일지라도 그것 역시 나이므로 존중과 인정을 스스로 놓치지 말아야겠다.


나의 여름과 당신의 여름이 만나면 81쪽
심보르스카가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했던 것처럼, 사랑도 별들의 시간이 아닌 풀벌레의 시간을 살아야 하니까, 사람의 시간은 늘‘오늘’이어야 하니까.

;요즘에 읽는 책 속에서 많이 등장하는 시인 심보르스카다. 인용되는 시인의 시어들은 소박하지만 지금을, 오늘을 더 소중하게 살아가는 의지가 느껴진다. 이 에피소드 역시 작가의 기억 속 여름들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지금 읽는 당신은 어떤 여름을 살고 있는지, 어떤 ‘오늘’을 살고 있는지 묻는다.


다시 한 살을 사는 마음으로 89~90쪽
돌이켜보면 누군가를 향해 썼던 모든 글이 내게로 되돌아왔던 것 같다. 기쁜 이야기는 내 마음의 기쁨의 자국으로, 슬프고 아픈 이야기는 작은 성장으로. 그러니 글쓰기란 결국 보내는 말이 아니라 맞이하는 말이 아닐는지.

다시 한 살을 사는 마음으로 자라고 싶다. 사랑하는 것들을 끌어안으면서. 끌어안으면 온전히 내 것이 되는 게 있다고 믿으면서.


;돌잡이 축사의 글을 쓰면서 자신의 글이, 글쓰기가 삶 속에 어떤 의미인지 깨닫는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아기에게 보내는 축사의 문장이 결국은 자신에게 보내고 싶은 문장이기 때문이다. 축복의 말을 보내는 행위를 통해, 자신조차도 축복을 받는다는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마지막 문장은 돌쟁이 아기를 끌어안으면서 삶에 대한 기쁨을 느끼는 이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포옹할 수 있는 관계와 삶의 모습들이.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에 대하여 94쪽
그의 말에 지난 몇 달 동안 기쁘면서 불안했던 나의 마음에 시원하게 길 하나가 뚫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천재 구두 디자이너가 아니라 구두를 고치는 장인이 되는 것이고, 타고난 것이 아닌, 시간이 완성하는 게 장인의 재능이라면 나 역시 꿈꿔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오직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일 테다.

;구두를 수선하면서 ‘시간의 힘’을 말하는 구두 수선 아저씨와의 대화에서 작가는 통찰을 얻는다. 재능이 아니라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다 보면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본다.


다른 나라 105~106쪽
그르니에는 청춘이라면 누구든 ‘다른 곳에 가서 살리라’는 첫 번째 욕망을 품는다고 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았고, 때로는 그 욕망을 질책하는 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들은 내게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실패의 맛을 보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는 물론 그들의 말처럼 크고 작은 실패들을 경험했고 또 절망했지만, 그것은 결코 ‘후회’는 아니었다. 내게는 아직 닿지 못하는 ‘다른 나라’가 있었으니까. 그때 다른 세계를 향한 동경이 없었더라면 내 젊은 어땠을까? 설령 그것이 현실도피였다고 해도 그르니에는 말하지 않았던가. 도피가 없다면 삶은 멈춰버린다고.

;다른 나라,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꿈은 젊음이 실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삶의 모험이자 낭만이 아닐까. 작가가 이방인으로서의 고독을 느끼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 다른 나라에서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았던 경험은 작가의 삶에서 자양분으로 뿌리내렸다고 느껴진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여정 속에서 자기를 대면하는 여행이라는 말에 다른 나라, 다른 세계의 여정을 꿈꿔보게 된다.


두 사람 편에 책의 첫 문장의 구절이 나온다.

이 에피소드는 작가의 사랑 이야기이다. 파리에서 만난 반려자와의 젊은 날의 가난하지만 반짝이면서 꿈을 좇던 두 사람이, 꿈을 버리고 프랑스의 시골에서 버려진 물건이 아닌 예쁜 식탁과 물이 새지 않는 욕실의 집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결혼을 했으며,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이야기와 다시 반려인이 편지로 작가는 일어선 듯한다. 그리고 책의 포문을 연 첫 문장을 만나다. 읽다가 다시 문장을 발견하니, 생의 한 시절을 통과하는 여정에서의 이야기가 코끝을 시큰거리게 한다. 작가는 그녀는 ‘거기에 그리고 지금 여기에’ 두 사람으로 오래 함께 있음을 고즈넉하게 말한다.

두 사람 일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반려인으로서 함께인 그들에게 어떤 안온함 같은 게 느껴진다.

미움의 역사 149쪽
그러나 지금은 그저 미움을 쓰겠다. 미움을 그리워한다고 딱 거기까지만 말하겠다. 낯간지러워 다정한 말 한마디 못했던 할머니와 나에게는 그 정도가 어울리지 않겠는가. 그렇게 미워했던 사람을 간직해도 되지 않겠는가.

서로를 미워했던 우리를 오래 기억하겠다.

어쩌면 사랑보다 더 오래.

;미움의 역사라니. 다른 말로 애증의 관계라고도 부르는 그런 관계. 미움 아래에 깔려 있는 서투른 사랑의 다른 모습을 할머니를 통해서 본다. 가족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런 관계들은 아프면 아픈 데로 애써 회복하거나 돌이키지 않고 흘러가는 게 좋다. 각각의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성장하고 변하고 죽음으로 이별하지만, 그 안의 미움의 역사는 미움이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된다.


좋은 섬유 유연제를 사는 일 167쪽
이제 나는 손에 쥘 수 없는 ‘질서’나 ‘안정을 꿈꾸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모두 내게 섬유 유연제 광고만큼이나 허상일 뿐이다. 서랍 속에 정돈된 삶이 아닌 바람 부는 언덕 위에서 흔들리는 삶을 살아도 좋다. 춤을 추듯 자유롭게 흔들리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쨍한 햇빛, 시원한 바람, 맑은 공기를 누릴 수 없는 삶이 성큼성큼 다가온다는 사실을 하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잘 알고 있다. 다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야 할지를 모르겠다. 아니, 그것도 잘 알고 있다. 아직 포기하지 못한 편안한 삶을 향한 욕망이 남았을 뿐. 나는 반드시 나의 욕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냄새 또는 향이 계층을 표현하고, 낮은 계층은 열악한 주거로 인해 환기에 취약한 주거 공간에서 살아간다. 이 에피소드는 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불러왔다. 가난했던 젊은 시절의 주거 환경은 세탁을 마음대로 할 수 없거나 하기 힘든 구조인 곳에서 살았다. 그런 까닭에 섬유 유연제를 사용하게 된 이유와 그 마음을 듣게 된다. 질서와 안정이라는 삶에 대한 원대한 꿈. 감성적 에세이를 읽다가 사회적 관점을 보게 된다. 빈곤과 향기. 주거공간과 계층. 사회 비판적 이야기조차 마지막 문장은 또 문학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고독을 위한 의자 172~173쪽
그 후로도 고독과 나는 오랜 시간 많은 것을 나눴다. 당연히 하루아침에 삶이 나아질 리 없었지만, 나아지지 않는 삶으로도 나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고독에게 배웠다. 고독과 내가 함께 읽고 쓰는 동안 울음이 노래로 바뀌었다면, 그것은 고독이 내게 상처도 음표와 쉼표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내 안에 보기 싫게 그려진 검은 줄도 오선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기 때문이 아닐까.

;고독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고립과 고독이 개념이 혼재되어 있어 부정적 의미로 인식되는 게 더 크다. 고독이 상처이기만 한 것이 아닌 음표와 쉼표로 쓸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고독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구하게 한다.


풍경 속으로 203~205쪽
산책과 사색을 즐기고 살롱에서 낭독회를 열거나 카페에서 토론을 즐겼던 작가들의 지적인 언어, 속도나 술이나 마약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우아한 현악기 같은 소리를 내는 언어, 그런 말들은 내가 듣고 자라는 말과 달랐다. 그런 말들은 멀리 있었고, 멀리 있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 말을 손에 쥐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던가. 그러고 보면 읽는 일은 내가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했던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 독서는 저 멀리 있는 아름다움에 손을 뻗어보는 일이었고, 더 나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일이었으며, 내게 없는 말을 감히 훔쳐 오는 일이었으니까. 아, 얼마나 탐스러운 말들이 그 안에 있었던가. 게걸스럽게 삼키고 싶었던 말들. 내 것과 바꾸고 싶었던 말들. 지금 내 안에 축적되어 나를 쓰게 하는 말들.


;이처럼 절절히 책 읽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문장이라니. 멀리 있는 것의 아름다움의 사랑이 책 읽기로 확장되어 뻗어나가고 결국은 책과 관련된 이가 된 작가의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독서에 빠진 사람이라면, 특히나 문학적 독서에 빠졌던 사람이라면 이 문장 속의 열렬함에 함께 도취되지 않을까. 단순하고 간결한 행위처럼 보이는 책 읽기에 대한 찬가를 나는 이 문장 속에서 발견했고, 덩달아 기쁨에 전이된다.


내가 사는 동안 멈추지 않는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지금은 태어날 이야기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듣는다. 때대로 그것은 침묵으로 자라기도 한다. 나무처럼, 내 안에 한 그루, 두 그루, 침묵의 나무가 자란다. 이 나무들이 자라 숲을 이루면 고요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때 나는 끄덕임을 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마지막 임종의 말 끄덕임을 통한 사유가 이렇게 전개된다. 사는 동안 멈추지 않는 이야기 그리고 고요를 통해 얻게 되는 끄덕임이라니.

작가의 사유와 감성, 시선들이 아팠던 힘들었던 젊음, 그리고 그 여정을 지나와 젊음을 반추하지만 앞으로의 날들에 대한 귀 기울여 말하는 문장들이 여기 담겨 있다. 펼치면 그 세계 속에서 함께 유영하기도 하고 나 자신의 날들과 대비하여 문장들을 가져와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상처 없는 계절이라는 제목은 반어법적 표현이 아니었을까. 상처를 지나왔던 계절이 이제 상처 없는 계절로 치환된 계절, 삶의 이야기들로.
0

이주연님의 다른 게시물

이주연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주연

@yijuyeonxm0c

아이의 방학 숙제 책 중 하나였다. 여전히 독서록 쓰기를 몹시도 귀찮아하지만, 엄마도 읽고 같이 반응해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으로 읽고 아이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읽어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관계’라는 점에 생각이 맴돌았다. 코로나19를 거쳐왔기에 그런 까닭일까! 유독 ‘관계’라는 키워드가 많이 들어온다. 점점 살면서 타인과 또 나 자신과의 관계에 생각이 많아지고 변한다.

소설의 화자 류담은 타인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부모님의 교통사고 이후로 얻게 된다. 원하지 않는 능력을 얻고, 그 능력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열었던 친구의 ‘죽음의 디데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디데이의 초록색 링 숫자대로 죽는다. 이 사건 이후로 담은 자발적 아싸가 된다. 관계를 맺는 이의 '죽음의 디데이'가 보이게 된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타인과 다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초, 중교 시절을 지나 고등생이 된 담에게 같은 반 반장 소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선다. 학교에서도 이미 자발적 아싸로 인식되는 담에게 미소는 반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같은 조별 과제를 하게 되면서 담의 일상에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담과 같은 능력을, 같은 불행의 대가로 얻게 된 털보 아저씨 상두를 만나면서 담의 삶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털보 아저씨 상두가 불행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능력으로 무당 같은 업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의 단축된 수명을 바꾸는 방법을 알게 되고 도우면서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담과의 만남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를 속을 헤쳐 나가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설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같이 읽는 이들에겐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물꼬가 된다. 타인을 위해서 얼마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희생할 수 있는 이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일 때 가능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들.

이야기의 흐름이나 각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연결되고 교차되는 구조들이 이야기 속으로 계속 빠져들게 한다. 복선과 암시가 있어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지도 가늠이 되긴 했다. 유일한 어른으로 나오는 인물 털보 아저씨 상두는 담과 ‘친구’가 되어서 혈연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조력자 혹은 동반자로서, 어른에 대한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고 필요한 현실적 모습으로 등장해서 좋았다.

담이 미소와의 관계가 변화되는 일련의 일들은 작은 인연의 조각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듯, 관계의 그림 또는 깊이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서 새삼 대면의 세계가 갖는 힘을 새삼 느낀다.

담이 미소와 우정에서 설레는 첫사랑의 관계로, 그리고 목숨을 나누어주고 싶은 존재로 변화되는 관계의 변화는 담 역시 엄마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라는 걸 깨닫고 그 덤의 삶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게 나누려 한다는 흐름이 인간의 성선설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담을 싫어하던 친구와의 오해 혹은 묶은 감정들이 해소되는 사건 역시 타인의 선의 혹은 본능적인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깨닫게 되는 담과의 대척점에 있던 소현의 변화도 그런 부분에서 이해가 된다. 담과 소현이 처음 맺는 관계에서 오는 서투름과 오해가 싫은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과 해소의 과정 모두 이 소설의 주제라고 느꼈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해준다.

청소년 소설다운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 혹은 성장과 화해,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열린 결말.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이르는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 변화하는 담의 모습이 아픈 모습만 있지 않기에 엄마 마음에는 안도했다.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게 완결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천진난만하지도 하고 그렇다고 상처에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체된 상태로 끝나지 않기에, 성장과 고난 또는 고통은 한묶음처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너에게 남은 시간 죽음의 디데이

이혜린 지음
풀빛 펴냄

읽었어요
1주 전
0
이주연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주연

@yijuyeonxm0c

부제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이 제목의 역설과 잘 어울렸다. 흥미롭게 읽었다.
건축가인 두 사람이 나뉘어서 ‘집’에 관한 개인적 시선에서부터 인문사회적인 사유로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일견 30대들의 전월세의 이사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계속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소유하게 될 집에 대한 의미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는 이윤석이 에필로그는 김정민이 썼는데, 도입부의 글과 마무리의 글이 책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여는 맛과 마무리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1장 솔직하게 만들어가는 집
'여지의 여지 '편에서 공간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스며들듯 수긍하게 된다.
넓은 평수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공간의 여지가 그곳에서 사는 이의 생각과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영향으로 더 긍정적이고 더 창의적으로 사고가 넓어질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에 대한 논의들을 읽다 보면 자본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 해석한 공간의 ‘최소성’은 생활하는 이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다. 간혹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이 제품을 디자인 한 이는 이런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나 동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실제 사용하는 경험치가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불편하거나 참신해지는 상반되는 경우 모두 다.

17쪽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삶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 시대라는 도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삶은 과정일 뿐이라 여기고, 과정이 된 삶들은 아무렇게나 최소로 방치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념이 다시 정의되고 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양은 서서히 청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고 있다. 박제된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정붙이고 녹붙이고'편의 에피소드도 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공간과 물건에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의 역사를 쌓아가는 모습들이 새삼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취향’에 대한 김정민의 생각은 취향조차도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어 평가하려 하지만, 자기의 솔직함과 생활감이 있는 인테리어가 더 좋은 취향의 인테리어라는 문장에서는 30대의 젊은 건축가의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엿본다.
두 저자는 고양이를 기른다는 점과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집과 방에 대한 생각과 지금까지의 전월세 이사 여정기를 말하고 있다. 책 집필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지인들과 관련인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집들을 탐방하면서 느끼고 접한 생각들도 실려 있다.

자신의 집이 싫다고 하면서 가는 내내 왜 ‘내 집이 싫은지’를 말하는 이를 통해서 집을 긍정하려고만 했던 이유를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 젖어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또 마주친 것은 자본주의는 소비주의이고 소비가 나를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에 살기에, 나의 소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나쁘다는 또는 별 볼일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문장에 새삼 환기하면서 동의하게 된다.

2장 셋방일지
아파트의 창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인해 계층과 사회적 구분을 읽게 된다. 동일한 크기와 효율성으로 정착한 아파트 창호의 크기의 반대편에 빌라라는 집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용의 풍경을 던져준다.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막고 보완해야 하는 빌라들. 이런 논의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읽어내고 말하고 기록하면서 건축가로서 어떤 반영과 개선을 할지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뷰’에 관한 논의에서도 자연을 담는 뷰, 경관도 특정 계층이 소유하게 되는 것의 불평등 지적한다. 녹지공간인 공원이나, 경관을 더 많은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시, 주거지 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공유하는 자연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집이라고 불리는 많은 집들이 매트리스만으로 인식되는 저자의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을 제시하면서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최소의 집에서는 수면과 화장실 사용만이 가능하며 나머지 다른 것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은 축소 또는 축약된 채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점들을 지적한다. 빨래방과 스타벅스의 방문이 일상이 되는 젊은 층의 생활 문화도 이런 주거 형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빨래를 널고 차를 마시고 화분을 키운 베란다의 공간을 갖기 힘든 구조의 주거 형태들이 가져온 공유 공간의 외주화를 만들었다.
‘안행복주택’편지글에서는 정책 입안자의 태도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키워드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책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운용과 실용이 필요한 지점을 집는다.

3장 일상의 발명가들
식탁테리어라는 말은 아마도 저자가 만든 단어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혼자 살면서 시작된 식탁인테리어로 식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바뀌거나 모으고,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2장에서 언급되었던 주방 공간의 축약과 축소가 요리라는 행위를 멀게 하고 간단하게 데워먹는 간편식의 식생활을 유도한다. ‘감히, 요리를 해먹어.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라는 거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요리는 개인 취향이다. 선호 여부에 따라서 즐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주거의 구조는 사유의, 사고의 폭도 움츠러들게 한다.
반려동물을 기르기도 하고 실제로 기르는 이들의 집을 탐방한 경험은 건축가로서 집을 설계할 때, 기존의 인간만을 기본으로 한 설계에서 한 걸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현성의 싱크로율은 아직 낮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현장성이 넓어질 때 주거에 대한 집에 대한 의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4장 우리를 담을 집
어차피로 만든 세상편에서의 에피소드는 집에 관한 따뜻한 관점의 한 갈래를 마주하게 한다. 평수나 크기로만 말해지는 주거지가 아닌 동네라는 의미로 거주하고 생활했던 곳의 생활정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의 메모, 깨끗한 이사 정리로 입주 청소비를 아낄 수 있고 그런 기분을 전해주고 싶다고 탐방했던 곳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인터뷰라서 감동이 더했다.

전월세 집이라도 사는 동안은 내가 거주하므로 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듯 하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짚은 것이 아닐까?
벽돌로 쌓은 집과 지푸라기로 엮은 집편의 논의처럼 늑대집만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의 집은 지푸라기 집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 들어온다. 집안이든 밖이든 안전할 권리가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의 흐름은 그저 집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느낀다.

217~218쪽
도시는 거름망으로 걸러진 사람들끼리 사는 곳이 아니다. 도저히 서로 겹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것을 억지로 구분하고 나누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상한 형태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다름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다름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성별은 같지만 국적은 달라, 나는 너와 언어는 같지만 피부색은 달라... 이렇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협소한지 가늠하게 할 뿐이다.
‘언어’라는 단어를 알았을때, ‘자가 주거’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성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다르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감각’을 체화하는 일이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 외 1명 지음
다산북스 펴냄

읽었어요
1개월 전
0
이주연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주연

@yijuyeonxm0c

어느덧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50대의 그들은 강릉 여행을 통해 각자의 삶에 대한 겹치는 부분과 여전히 가려졌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동갑 혹은 같은 또래라는 동질성의 키워드로 들어온 소설의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이 20대를 지나 50대를 살아왔던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강릉에서, 이곳이 아닌 여행지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여행지일까? 일탈 같기도 하면서 일탈이지 못한 중년이 된 3명의 대학 동창의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난주, 정은, 미경.
난주는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정은은 동창인 남편이 코로나로 인하여 퇴직 후 오픈했던 키즈카페의 폐업으로 경제적 파산에 이른 상태로 빚을 갚기 위한 생업전선에서 시달리며 살고 있다.
미경은 아픈 엄마를 홀로 돌보면서 직장인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녹록지 않다. 오랜 친구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공유하거나 말한 이야기들이 각각이다.

난주의 빈둥지증후군, 남아도는 시간의 공허감, 여성으로서의 성적 박탈감.
정은의 경제적 파탄, 생활고, 빚투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적 상황. 요실금으로 인한 수치심.
미경의 간병 돌봄에 혼자 고립감 속에 지나가는 시간들, 관계들.

세 명의 인물들의 서사를 읽다 보면 50대에 이른 삶의 모습들이 빛나지도 안정되지도 못함을 본다. 나름 노력하면서 시절을 살아온 왔는데, 어쩌다가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절에 충실했건만,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것일까!

가장 측은지심이 느껴진 인물은 미경이다. 동성 연인의 결혼으로 관계가 정리되고, 어머니와의 간병 생활이 시작되고, 자매인 언니의 사라짐, 독박 간병의 고립무원 같은 생활로 이어진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미경에게는 가족은 있지만 가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하지 않을 때 혼자가 되는 건 별로였다.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여야 혼자라는 사실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이 그립지 않았다. 그저 그리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난주가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일시적 관계의 단절 이후 기다려준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장면이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된다.
난주는 입사라는 사회생활 없이 바로 결혼과 출산, 육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활 패턴은 많은 관계들의 정리와 변화가 오는 시기다. 그때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느껴지던 고마움과 왠지 모를 어깃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정은은 난주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의 안락한 삶이라고 자신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빈둥지증후군과 여성성의 상실로 허한 난주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 파산에 이른 정은이나, 독박 간병의 미경보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인물들은 다 각자의 행과 불행을 지고 오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여행지가 강릉인 이유는 각자의 사연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강릉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가 강릉과 연결되면서 그녀들의 삶과 포개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그런데 오십대를 앞두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꾸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50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았는데, 남은 시간마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헛헛했다.

오십이 된다는 것 소설의 문장처럼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은 시간을 그냥 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늙음을 이제 삶의 중심부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십을 앞두고 함께 할 친구들이 있고, 나눌 서사가 있다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가 어떤 삶이었을지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삶을 안도하면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읽었어요
2개월 전
0

이주연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