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620페이지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 속에서 거대한 역사가 파도친다.
한국 근현대 삼대에 이르는 노동자를 전면에 내세워 그들이 투쟁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절대 달라질 것 같지 않은 처우가 지금 와 보니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듯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결국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는 작가의 말은 현실보다는 바람에 가까운 말일 터.
긴 세월에 걸쳐 노동자 이야기를 전하다 보면 우울하고, 사상 얘기는 따분하고, 수많은 사건들의 나열은 사건일지처럼 단조롭게 느껴지기 마련인데 할머니들의 옛날이야기들이 흥미를 돋는다. 덩치 크고 기운 좋은 주안댁 큰할머니, 죽은이를 보기도 하고 과거나 앞날을 맞추는 신통방통 신금이 할머니 이야기가 그렇다. 마지막 대에서 굴뚝농성 중에 죽은이들을 불러내어 대화하는 장면들도 흥미롭다. 이런 미신적인 이야기들이 나올 때면 나도모르게 자세를 고쳐잡고 책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고증도 뛰어나고 묘사도 무척 사실적이어서 영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돼지를 잡는 모습, 기차를 달리게 하는 모습, 고공농성 중 체력을 단련하고 숙식을 해결하는 모습, 오체투지, 고문 방식, 거리 곳곳의 묘사 등등.
다만 조선 해방 이후 복잡한 시절의 이야기들이 요약되어 빠르게 지나간 점이 아쉽다. 이일철의 월북 이후 그의아들 이진오 이야기는 전쟁의 비참함을 잘 알려주는 장이 될 수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간략하게 요약하는 정도로만 지나갔다.
그리고 책에선 연락책에 한정되었지만 실제 남성만큼 치열했던 여공들의 노동 운동 이야기도 살려주었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랬다면 아마 1000페이지가 넘는 책이 되었을지도.
그래도 이미 연로하시기에 더 바라면 나의 욕심이겠지. (ㅜ.ㅜ) 부커상이 불발되어 안타깝다. 더 많은 나라의 독자들이 함께 읽으면 좋을텐데.
[617쪽 작가의 말:]
방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살던 시대와 삶의 흔적은 몇 점 먼지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은 느리게 아주 천천히 변화해갈 것이지만 좀더 나아지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