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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말한다.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고, '안중근은 약육강식하는 인간세의 운명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고 말이다. 말을 거는 것은 작가 그 자신이 아닌 이미 죽어버린 안중근이고, 작가는 그를 되살려 오늘의 독자에게 그 말을 전하는 것으로 제 사명을 이룩한 것이다. 소설 <하얼빈>은 안중근과 이 시대 독자의 만남이며, 그로부터 우리가 안중근의 진면목을 한 걸음 이해할 수 있는 드물고 귀한 계기라고 하겠다.
소설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극적으로 그려내지 않는다. 소설이 보다 집중하는 건 이토를 죽이기까지 안중근이 넘어서야 했던 압박들이며, 다시 그 뒤로 지켜내야만 했던 뜻이다. 당대의 천주교는 끝내 그를 용서하려 들지 않았고 나라 또한 그를 외면했다. 온 세상이 저를 외면하는 가운데 안중근은 홀로 감옥소 안에서 제 뜻이 틀리지 않았음을 주장하며, 제가 나고 살아온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길임을 다시금 싸워나가야만 했다.
소설이 황해도 산골 마을 성당의 주임신부인 빌렘이 주교의 명을 어겨가며 멀리 여순감옥으로 와 안중근을 면담하기까지를, 또 그들이 끝내 좁혀지지 않는 뜻을 넘어 교감하기까지를, 그럼에도 천주교회가 안중근의 죽음을 제 품 안에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을 끈덕지게 그려내고 있는 것은 이 소설과 작가 김훈이 지향하는 바가 그저 이토의 죽음이란 사건에 머물지 않고 있음을 증명한다.
안중근의 죽음과 빌렘의 기도, 서로 닿지 않는 사건들로 맺음되는 이 소설은 마지막 장이 덮인 뒤에야 진정으로 끝을 맺는다. 하얼빈 거사를 죄악으로 단정하고 안중근에게 성사를 베푼 빌렘 신부를 중징계한 뮈텔 주교의 이야기며, 1993년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미사를 통해서야 가톨릭 교인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추모된 안중근의 이야기, 다시 수년이 흘러서야 민족독립을 위해 싸운 신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잘못을 인정한 교회의 이야기, 그리고 참담하기만 한 안중근 일가며 후손들의 뒷일을 작가는 소설 뒤 짤막한 후기를 통해 빼어놓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 <하얼빈>은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거사를 호쾌한 승리의 이야기로 그리지 않는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하려 했던 비극을 되살리며, 그럼에도 뜻을 꺾지 않고 마침내 이뤄낸 청년의 이야기를 새겨내고야 만다. 어느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안중근과 공범 우덕순이 스스로를 포수이고 무직이며 담배팔이였다고 증언한 사실로부터 이 소설을 쓸 동력을 얻었다는 작가 김훈의 말은 이 소설이 다름 아닌 청년들의 이야기임을, 같은 방식으로 미래를 도모하는 그들에 대한 응원임을 선명히 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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