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그것이 르포르타주가 아닌 이상 작가는 사실에 매달리면 안 된다. 창작이란 작가의 주관적 산물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결국 진부한 얘기가 된다.”
— 박경리,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요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소설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주제에는 공감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소설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는 것. 위안과 공감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남지 않는다. 더군다나 표현까지 진부하다면, 박경리 선생님이 말했듯 결국 평범한 이야기로 남고 만다. 문학이 예술이라면, 단순한 기록을 넘어 고정관념을 흔들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다. 가정폭력, 종군위안부, 한국전쟁 같은 익숙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북한 사람들의 삶이나 남파 공작원의 이야기 같은 낯선 요소를 결합해 뻔한 전개를 피한다. 주인공의 독특한 상황과 성격 덕분에 예상하기 어려운 흐름을 만들고, 초반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무거운 주제지만 가볍게 읽힌다. 결국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단순한 흥미 요소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이야기 속 한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가끔은 말이다. 가장 큰 속임수, 그리고 가장 친절한 속임수는 속아주는 거란다. 그것이 상대에게 소중한 위안이 될 수 있단다.”
이 문장은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역사와 현실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진실은 그대로 마주하기엔 너무 가혹하고, 어떤 거짓은 누군가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복잡한 감정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러면서도 내가 가진 피상적인 역사 지식의 빈틈을 채워주었고, 문장의 표현과 단어 선택에서도 문학적 재능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 스토리라인의 독창성 + 세부적인 고증 + 표현의 독창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소설을 좋아하는데, 이 책이 그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다만, 책의 제목이 다소 익숙한 주제를 떠올리게 해서인지, 서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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