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문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서문

@yiseomoon

+ 팔로우
아무튼, 하루키 (그만큼 네가 좋아)의 표지 이미지

아무튼, 하루키

이지수 지음
제철소 펴냄

어째서 육아는 더럽게 고생스럽고 피눈물 나게 힘든 일이라고 말해주는 이가 여태 없었을까. 분명 인류 멸망을 막기 위한 모종의 엠바고 같은 거겠지. 아니면 육아에 뒤따르는 희생을 모성과 부성으로 승화시키려 하는 사회 분위기상 갖은 고생담은 경험자들끼리만 쉬쉬하며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증거로 내가 출산하자 주위의 육아 선배들이 아련한 눈빛으로 "많이...힘들지?" 하며 지옥 구경이라도 하고 온 듯한 경험담을 들려줬으니까. 그들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마지막에는 꼭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시간은 가더라." 아이의 미소를 보면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는 거짓말은 누가 먼저 퍼트렸던가. 내 경험상 미소가 사랑스러운 것과 피로는 별개다. 꽃향기가 아무리 좋아도 그걸 맡았다고 결린 어깨가 풀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스물여섯의 나는 자아를 업무용과 개인용으로 분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내가 속한 팀에서는 선배가 후배에게 당연하다는 듯 반말을 했고 그 앞뒤로 종종 "야 이 씨..."가 따라붙었다('발'이 마저 붙지 않았던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심지어 팀장은 자신보다 직급은 낮지만 나이는 많았던 차장을 "야! 김XX!"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화를 참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서열이 상대보다 위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사고가 터지면 자기보다 직급 낮고 힘 약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렸다. 인간에 대한 환멸이라는 것을 철저히 맛보던 나날이었다. 더 심각한 점은 그 안에 있다 보니 나도 여지없이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의 노벨상 수상 여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늘 몹시 아름다웠던 그의 수상 연설문을 못 보는 것 정도일까. 실은 내 청춘의 한 조각(?)이 그런 영예로운 자리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보는 건 괜스레 멋쩍을 듯도 하다(라기에는 이미 다른 문학상을 너무 많이 받았지만!). 하루키는 나에게 작가가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경험을 안겨줬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그 작가의 저작과 함께 보내게 해준 것. 그리하여 나의 내면과 삶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일으킨 것. 그것만으로도 노벨문학상을 받든 말든 하루키는 나에게 언제까지나 가장 특별한 작가일 터다.
0

이서문님의 다른 게시물

이서문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서문

@yiseomoon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 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

"내가 회사 생활 십오년 하면서 한번도 운 적이 없었거든요. 루바 공연 건 때문에 특진 취소되고, 팀 옮겨지고, 강남에서 판교로 짐 싸서 올 때도 눈물이 안 났어요. 그런데 그 포인트를 보고 있는데 눈물이 나더라구요.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너무 막막해서."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속한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억지로 출근해서 하루를 보낸 그날 저녁, 이상하게도 거북이알은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포인트로 모닝커피 마시고, 포인트 되는 식당에서 점심먹고, 포인트로 장 보고, 부모님 생신선물도 포인트로 결제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더 보내고 나서 그녀는 모든 것을 한결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원래 내가 받았어야 하는 건 포인트가 아닌 돈인데......사실 돈이 뭐 별건가요? 돈도 결국 이 세계,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의 포인트인 거잖아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죠."
"어떻게요?"
"포인트를 다시 돈으로 바꾸면 되는 거잖아."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지음
창비 펴냄

3일 전
0
이서문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서문

@yiseomoon

그가 우리에게 알려준 가장 큰 비밀은, 인간이 사건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인간을 이끌어 간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간을 엄습하는 사건들은 모두 앞선 또 다른 인간들에 의해 경험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느껴졌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어떤 사건도, 심각한 혹은 유익한 사건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는 느낌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모든 사람은 유일한 존재이다. 한 나무에서 자란 모든 잎들이 유일한 존재이듯.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수액을 나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각자 다르게 수용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듯이, 새로운 일이 진정으로 새롭진 않더라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세대, 그 다음 세대, 파도, 그 다음 파도에겐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따라서 인생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을 찾기 위해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지나치게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의무를 배신하는 것이다. 이 인생의 비밀을 이해하는 자는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도 확실한 것은 없다.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다비드 디옵 지음
희담 펴냄

1주 전
1
이서문님의 프로필 이미지

이서문

@yiseomoon

어떤 알러지가 있거나 확고한 철학이 있어 음식을 가려 먹는 건 아니다. 한번 싫어지면, 한번 멀리하게 되면, 영원히 그런 채로 굳어버리는 성격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누군가에게 한번 실망하게 되면 그게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 일이 종종 있다. 하기 싫은 일은 어떻게든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경우도 꽤 많다. 자동차에 하이패스를 설치하는 일, 고지서의 자동이체 계좌를 등록하는 일, 아이폰의 동기화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일처럼 명확한 이유는 없지만 어쩐지 꼭꼭 씹어 먹기 싫은, 굳이 그 허들을 뛰어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먹는 일이야말로 가장 투명한 유희이니, 개인의 성격이 덕지덕지 묻어날 수밖에. 앞으로 내 편식이 고쳐질 확률은 더욱 더 낮아질 듯하다.

식재료를 다루는 능력과 팀원들끼리 협업하는 능력을 모두 최고치로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최상으로 유지하고 모험과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셰프들은 어떤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걸까? 나는 휴대폰 카메라로 한 번, 입으로 두 번 정도 그 요리를 즐기는데, 셰프들은 얼마나 많은 겹의 노력을 투자해 이 요리를 만들었을까?
그래선지 나는 레스토랑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나면 "오늘 좀 행복하네."라고 습관처럼 말한다. 집에서 먹을 때도 물론 행복하지만 다이닝을 경험하면 "와씨, 진짜 행복하네."가 된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좋은 사람들과 식사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배달음식과 구독 서비스, 간편 냉동식품과 밀키트가 앞으로 우리의 식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겠지만, 그리고 이미 내 식생활의 엄청나게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았지만, 레스토랑에서 느끼는 행복은 그 자체로 고유할 것이다.
최근엔 누군가와 레스토랑에서 무릎을 붙이고 앉아 "와, 행복하네."를 읊조려본 적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내 삶도 다시 여유를 찾고 레스토랑도 위기를 이겨내서 외식의 기쁨을 흠뻑 느껴보고 싶다.
적절한 설명으로 좋은 와인을 찾아주는 소믈리에, 유쾌함과 친절함의 비율을 최적으로 블렌딩한 서비스, 입 안에서 하나하나 춤추는 식재료를 모두 한꺼번에 경험하고 싶다.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손기은 지음
드렁큰에디터 펴냄

2주 전
0

이서문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