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처음 만났고 의례히 시나리오 어떻게 봤냐고 물었더니 "소희가 꼭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순간 말문이 막혔습니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이 대답은 이미 많은 걸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객관화하여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 영화의 본질이 소희라는 아이의 죽음에 관해 고찰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는 것. 어떻게 하면 내가 이 배역을 맡고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잘 해낼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소희가 영화로 살아남아 관객들을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이 차분하게 그녀를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범하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대화들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만난 날 소희를 캐스팅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날, 내가 찾던 소희를 만났다기보다는 김시은이라는 배우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소희를 보여준 것 같습니다.
화재 현장에 고립된 소방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화염 속에 갇힌 그는 동료가 와서 구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불길과 연기 밖에서는 그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습니다. "고립된 사람에게 다른 이가 다가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스스로 생을 접는 많은 이들의 상황이 이와 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 다가갈 수 있다면, 어느 순간 어느 곳에서 간절히 보내고 있을 그 구조신호를 지나치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쩌면 달라질 수도 있다는 희망. 오직 그 희망을 생각해보며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