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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과 현실이 수시로 엇갈리는 가운데 변치 않는 순수를 간직한 현보가 어느 순간 철없는 아이처럼 보이게 되기까지 나는 봄 같은 소녀에서 여름 같은 처녀를 지나 깊은 가을 낙엽 떨어지는 시절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제가 자리를 마련해준 옆집 아이는 미군 병사들의 애를 여러 차례 뗀 양공주가 되어버리고, 가혹한 시선을 견디다가 마침내는 미국으로 훌쩍 떠난 뒤 또 악착같이 제 조카들을 한국인과만 결혼시켜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할머니가 되어버린다.
소설 속 집은 사대문 안 기풍 있는 기와집과 신발을 벗지 않고 부엌으로 갈 수 있는 일본식 적산가옥, 공간이 비할 바 없이 넓게 빠진 신형 양옥들로 변화한다. 재산은 막힘없이 불어나고 돈보다도 다른 무엇들이 훨씬 빨리 몸집을 불리는 풍요의 시대가 이어진다. 급변하는 시대상 가운데 사람을 대하는 인간들의 태도며 마음가짐 또한 변해간다. 보는 위치가, 관점이 달라지고 그로부터 태도며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은 그녀의 작품이 인간과 삶의 본질을 슬며시 건든다고 이야기한다. 본질이란 시간이 지난다 해도 변치 않는 무엇이고, 바로 그것이 이 소설이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 가운데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관계를 특별하게 담아낸 이유일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빨리 변한다 해도 결코 변치 않는 것이 몇 개쯤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물음, 그에 대한 답을 독자들은 이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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