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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장편소설)의 표지 이미지

섬에 있는 서점

개브리얼 제빈 지음
문학동네 펴냄

에이제이의 책방은 앨리스 섬에서 유일한 서점이다.
아일랜드 서점은 문학 서적을 주로 취급하고 있고, 수완이 좋았던 안주인 니콜이 죽은 후 판매 실적이 신통치 않다.

나이틀리 출판사 영업사원인 어밀리아는 아일랜드 서점에 영업 도서 목록과 카탈로그를 들고 에이제이를 만난다.
에이제이의 사무실에서 어밀리아는 도서 목록을 소개하면서 겨울 시즌의 책 중 ‘늦게 핀 꽃’이라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책을 추천한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밀리아와 에이제이는 책 취향과 서점 영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티격태격한다.
이 둘의 첫 만남은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인상으로 남는다.

에이제이는 아내 니콜의 사고사 이후 제대로 된 일상을 꾸려나가지 못한다.
우연히 벼룩시장에서 구한 에드거 앨런 포의 희귀 시집 ‘태멀레인’을 만취한 상태에서 꺼낸 이후 책이 사라져 버린 일을 겪게 된다.
아내의 사고사와 희귀본 도난 신고를 하면서 섬의 경찰관인 램비에이스를 만나게 된다. 이 둘은 이후에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절친이 된다.
이웃 주민들의 궁금증은 서점의 방문으로 이어지고 에이제이에게 책 추천을 부탁하면서 도난 사건 이전의 매출로 회복된다.
이른바 ‘호기심 많은 동네 사람들’의 궁금증으로 인한 방문 때문이었다. ‘호기심 많은 동네 사람들’ 행동은 섬에 있는 단 하나의 서점이기에 일어날 수 있는 지역성이다.

어릴 때 학교 앞 책방에서 참고서와 문제집 외에 다른 책들도 훑어보던 공간의 기억이 연상된다. 자주 다니던 서점은 주인과 친해지기도 했다. 더 커서는 음반가게나 헌책방이기도 했던 그런 공간들. 이런 공간은 그 공간이 갖는 목적성과 문화적 행위와 경험을 맛볼 수 있는 공간으로 상업과 문화가 만나는 교차점의 공간이다.
각각의 인연들의 일화 속에서 등장하는 책들과 책들의 인물들은, 주인공의 직업이 서점상이라는 것, 주변 인물들도 그와 함께 엮이면서 책의 일상을 함께 하게 되어가는 점이 흥미롭게 읽혔다.

마야의 등장은 이 책에서 가장 큰 사건이며, 에이제이의 인생에 변곡점이 된다.
그의 서점에 마야의 엄마가 아이를 몰래 놔두고 떠난다. 에이제이는 마야의 인형에 적혀 있던 마야 엄마의 편지를 읽게 되고, 그렇게 마야와 새로운 가족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아이의 양육에 대해 백지상태였던 그가 주변의 도움과 정식으로 마야를 입양, 양육하는 과정에서 혈연만이 가족이라는 환상을 깨트린다.
마야의 엄마가 아이가 책에 둘러싸여 그런 것들을 중요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기 바란다(66-67쪽)는 편지에서는 마지막까지 아이의 성장에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했던 마음이 엿보였다.

홀아비인 에이제이가 아이를 입양해서 키운다는 소식에 또 한 번 아일랜드 서점은 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방문을 받게 된다.
느슨하지만 방치하지 않는 공동체의 모습을 엿본다. 아이의 양육에 대한 걱정과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동정이 아닌 함께 연대해서 아이를 기르고 관심을 가져주는 공동체의 이상향이다. 섬의 육아맘들이 방문해서 경험과 조언을 나누고 그런 방문이 또 책 읽기와 연결되는 모습은 힐링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이 어릴 때 잠자리 의식으로 읽어주던 책 읽기에 대한 추억들이 마야의 어린 시절에도 에이제이와 함께 나온다. 사춘기 전 아이들과의 일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잠자리 책 읽어주기에 대한 추억과 양육에 있어서의 관계의 밀도는 무엇일까 들여다본다. 스킨십과 함께 하는 시간 즉 대면의 순간은 양육에 있어서의 기본값이 아닐까!

그가 육아를 하면서 도움을 받았던 죽은 아내의 언니인 처형 이즈메이와 이즈메이의 남편이자 친구인 대니얼은 마야의 친부라는 사실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드러나는데 플롯상 대니얼의 죽음이 이해됐다. 그의 죽음 이후 십여 년 후 램비에이와 이즈메이는 연인이 되고, 그 인연이 맺어지는 날 드러난 사라진 ‘태멀레인’ 사건 전말이 마야와 에이제이의 인연의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태멀레인’의 소환은 에이제이 인생에 의미 있는 물건으로 그 쓰임을 하게 된다. 램비에이와 이즈메이의 이야기는 2부에 시작된다.

마야의 성장과 함께 에이제이와 어밀리아도 시간을 거쳐 연인에서 부부로, 마야와 함께 가족의 관계를 이룬다.
이 가족의 형태를 사회적 서류상으로 본다면 비정상적인 가족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 본다면 가족의 층위와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시야와 사회적 수용에 대한 모델로서 그 의미가 깊다고 본다.
어밀리아와 에이제이의 연예를 보면 서점 주인과 영업사원이라는 관계이긴 하지만, 그 물꼬가 어밀리아가 권했던 책을, 마야를 간병하는 밤에 읽게 되고 그게 계기가 되어 다시 교류의 물꼬가 트인다는 설정이 마야와 에이제이, 어밀리아 세 사람의 관계가 연결되리라는 복선으로 보였다. 아이를 통해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느낀 상대와 함께 하는 삶으로 가는 여정에서 세 사람의 관계는 마치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과한 연상인 걸까!

여하튼 서점 주인과의 이른바 문과 남자, 싱글대디인 에이제이와 어밀리아의 연예가 순탄치는 않았지만, 마야와 함께 이룬다.
아이 때문에 자신의 삶을 미루려 할 때 주변에서 그에게 도움과 조언을 주며 삶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구성이, 돌봄을 희생의 모습이나 의미로 그리지 않아서 좋았다.

마야와 대니얼이 대화하는 장면을 완독 후 다시 읽으니, 대니얼이 마야의 생물학적 친부라는 사실에서 그가 부모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인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에이제이가 열었던 저자 낭독회의 에피소드에서 어밀리아와 저자의 이야기 속에서 숨겨진 이야기 역시 흥미로웠다.
저자 낭독회 이후 에이제이는 어밀리아에게 청혼을 한다. 어밀리아는 친구에게 결혼식에서 저자 낭독회를 했던 책의 한 구절을 낭독을 부탁했다. ‘늦게 핀 꽃’의 책과 저자는 이 두 사람의 결혼에 한 지분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즈메이는 에이제이의 결혼식 이후 대니얼에게 마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마야의 친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대니얼이라는 인물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는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았고, 일말의 양심도 없다. 그저 하룻밤의 일이었고, 자신이 마야의 친부라는 사실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이즈메이는 마야의 친모를 만났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마야의 친모가 자살하자 죄책감을 갖게 된다. 대니얼은 마야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즈메이가 대모가 되어 마야를 지켜보는 복잡한 그러나 사랑으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이 보인다.
대니얼은 이즈메이와 자동차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차량 충돌 사고로 죽게 된다. 1부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2부에서 고등학생이 된 마야는 학교에 제출한 작문 과제가 카운티 소설 고등부 응모작으로 제출된다.

마야의 제출작 ‘바닷가 나들이’의 내용은 자신의 친모와 자신의 이야기를 쓴 자전적 이야기였다. 친모가 바닷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바닷가 나들이로 표현한 글에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친모의 마지막을 그린 문장은 헤어짐을 죽음을 암시한다.

자전적 이야기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이 소설 속 소설이 또 잊히지 않고 마야의 내면 속에 있을 친모에 대한 이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비슷한 나이가 되어가는 마야는 친모의 선택을, 친모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램비에이스와 이즈메이가 연인이 되는 첫날 ‘태멀레인’의 사건 전모와 그동안의 소설 속 퍼즐들이 완성되는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에이제이는 병에 걸린다. 의식을 잠깐씩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병원에서 희귀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희귀암은 수술의 비용도, 수술 이후의 예후도 좋지 않다. 에이제이는 아내와 딸에게 빚을 남겨주기 싫어 수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절친이 된 램비에이스와 만난 술자리에서 이런 사실들을 털어놓고, 램비에이스는 그 문제의 ‘태멀레인’을 다시 에이제이에게 돌려보낸다.

여기서 ‘태멀레인’에 얽힌 각 인물들의 이야기들이 나오고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되어 ‘태멀레인’은 또 하나의 플롯이 된다. 마야의 중간 이름인 된 ‘태멀레인’은 에이제이의 목숨 값과 그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준다.

에이제이는 수술 후 ‘실어증’을 앓는다. 실어증을 말을 못 한다는 의미로 알고 있었는데, 이 소설 속에서 그것이 또한 적절한 단어를 잃어버리고 언어 구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를 지칭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에이제이는 뇌 속에서 생각하는 단어와 발화되는 단어의 오류를 앓는다.

그의 마지막 등장 신에서 사랑을 장갑으로 잘못 발화하지만, 마야가 그의 손을 포개는 장면에서는 잘못된 발화이지만 사랑이 전해지는 울컥하는 장면이었다.

에이제이의 죽음으로 소설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이 ‘서점’이라는 설정이 마지막 장에서 드러난다. 섬에 있는 서점은 에이제이의 죽음 이후에 램비에이스와 이즈메이가 운영을 하게 된다. 램비에이스의 서점은 에이제이와는 다른 취향의 서점으로 운영될 것이다. 어말리아와 마야는 그들의 삶을 또 꾸려나가게 될 것이다. 흔히 예상되는 결말이 아니었으며 서점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졌다. 열린 결말로 맺는다. 또 다른 에이제와 어말리아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은 그런 여유가 느껴졌다.

각 장에 들어가기 전에 마야 앞으로 쓴 에이제이의 편지글 구성도 마야에 대한 사랑과 아빠가 딸에게 주는 선물 같은 글로 읽혔다.

서점, 출판사, 출판마케팅, 저자 낭독회, 문학, 공모작, 초판본 시집, 많은 문학작품들, 영국 tv 드라마, 영상물들의 소설 속에서 밑바탕이 되어 흘러가는 이야기들은 서사와 재미가 가득했다. 서점의 아이로 자라난 마야의 설정, 서점 주인과 마케터의 사랑과 일생의 공간이었던 서점 이야기에는 가족, 사랑, 일, 삶에 관한 모든 것들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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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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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방학 숙제 책 중 하나였다. 여전히 독서록 쓰기를 몹시도 귀찮아하지만, 엄마도 읽고 같이 반응해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으로 읽고 아이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읽어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관계’라는 점에 생각이 맴돌았다. 코로나19를 거쳐왔기에 그런 까닭일까! 유독 ‘관계’라는 키워드가 많이 들어온다. 점점 살면서 타인과 또 나 자신과의 관계에 생각이 많아지고 변한다.

소설의 화자 류담은 타인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부모님의 교통사고 이후로 얻게 된다. 원하지 않는 능력을 얻고, 그 능력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열었던 친구의 ‘죽음의 디데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디데이의 초록색 링 숫자대로 죽는다. 이 사건 이후로 담은 자발적 아싸가 된다. 관계를 맺는 이의 '죽음의 디데이'가 보이게 된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타인과 다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초, 중교 시절을 지나 고등생이 된 담에게 같은 반 반장 소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선다. 학교에서도 이미 자발적 아싸로 인식되는 담에게 미소는 반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같은 조별 과제를 하게 되면서 담의 일상에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담과 같은 능력을, 같은 불행의 대가로 얻게 된 털보 아저씨 상두를 만나면서 담의 삶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털보 아저씨 상두가 불행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능력으로 무당 같은 업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의 단축된 수명을 바꾸는 방법을 알게 되고 도우면서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담과의 만남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를 속을 헤쳐 나가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설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같이 읽는 이들에겐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물꼬가 된다. 타인을 위해서 얼마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희생할 수 있는 이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일 때 가능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들.

이야기의 흐름이나 각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연결되고 교차되는 구조들이 이야기 속으로 계속 빠져들게 한다. 복선과 암시가 있어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지도 가늠이 되긴 했다. 유일한 어른으로 나오는 인물 털보 아저씨 상두는 담과 ‘친구’가 되어서 혈연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조력자 혹은 동반자로서, 어른에 대한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고 필요한 현실적 모습으로 등장해서 좋았다.

담이 미소와의 관계가 변화되는 일련의 일들은 작은 인연의 조각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듯, 관계의 그림 또는 깊이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서 새삼 대면의 세계가 갖는 힘을 새삼 느낀다.

담이 미소와 우정에서 설레는 첫사랑의 관계로, 그리고 목숨을 나누어주고 싶은 존재로 변화되는 관계의 변화는 담 역시 엄마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라는 걸 깨닫고 그 덤의 삶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게 나누려 한다는 흐름이 인간의 성선설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담을 싫어하던 친구와의 오해 혹은 묶은 감정들이 해소되는 사건 역시 타인의 선의 혹은 본능적인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깨닫게 되는 담과의 대척점에 있던 소현의 변화도 그런 부분에서 이해가 된다. 담과 소현이 처음 맺는 관계에서 오는 서투름과 오해가 싫은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과 해소의 과정 모두 이 소설의 주제라고 느꼈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해준다.

청소년 소설다운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 혹은 성장과 화해,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열린 결말.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이르는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 변화하는 담의 모습이 아픈 모습만 있지 않기에 엄마 마음에는 안도했다.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게 완결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천진난만하지도 하고 그렇다고 상처에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체된 상태로 끝나지 않기에, 성장과 고난 또는 고통은 한묶음처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너에게 남은 시간 죽음의 디데이

이혜린 지음
풀빛 펴냄

읽었어요
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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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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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이 제목의 역설과 잘 어울렸다. 흥미롭게 읽었다.
건축가인 두 사람이 나뉘어서 ‘집’에 관한 개인적 시선에서부터 인문사회적인 사유로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일견 30대들의 전월세의 이사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계속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소유하게 될 집에 대한 의미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는 이윤석이 에필로그는 김정민이 썼는데, 도입부의 글과 마무리의 글이 책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여는 맛과 마무리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1장 솔직하게 만들어가는 집
'여지의 여지 '편에서 공간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스며들듯 수긍하게 된다.
넓은 평수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공간의 여지가 그곳에서 사는 이의 생각과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영향으로 더 긍정적이고 더 창의적으로 사고가 넓어질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에 대한 논의들을 읽다 보면 자본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 해석한 공간의 ‘최소성’은 생활하는 이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다. 간혹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이 제품을 디자인 한 이는 이런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나 동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실제 사용하는 경험치가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불편하거나 참신해지는 상반되는 경우 모두 다.

17쪽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삶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 시대라는 도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삶은 과정일 뿐이라 여기고, 과정이 된 삶들은 아무렇게나 최소로 방치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념이 다시 정의되고 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양은 서서히 청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고 있다. 박제된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정붙이고 녹붙이고'편의 에피소드도 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공간과 물건에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의 역사를 쌓아가는 모습들이 새삼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취향’에 대한 김정민의 생각은 취향조차도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어 평가하려 하지만, 자기의 솔직함과 생활감이 있는 인테리어가 더 좋은 취향의 인테리어라는 문장에서는 30대의 젊은 건축가의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엿본다.
두 저자는 고양이를 기른다는 점과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집과 방에 대한 생각과 지금까지의 전월세 이사 여정기를 말하고 있다. 책 집필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지인들과 관련인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집들을 탐방하면서 느끼고 접한 생각들도 실려 있다.

자신의 집이 싫다고 하면서 가는 내내 왜 ‘내 집이 싫은지’를 말하는 이를 통해서 집을 긍정하려고만 했던 이유를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 젖어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또 마주친 것은 자본주의는 소비주의이고 소비가 나를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에 살기에, 나의 소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나쁘다는 또는 별 볼일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문장에 새삼 환기하면서 동의하게 된다.

2장 셋방일지
아파트의 창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인해 계층과 사회적 구분을 읽게 된다. 동일한 크기와 효율성으로 정착한 아파트 창호의 크기의 반대편에 빌라라는 집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용의 풍경을 던져준다.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막고 보완해야 하는 빌라들. 이런 논의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읽어내고 말하고 기록하면서 건축가로서 어떤 반영과 개선을 할지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뷰’에 관한 논의에서도 자연을 담는 뷰, 경관도 특정 계층이 소유하게 되는 것의 불평등 지적한다. 녹지공간인 공원이나, 경관을 더 많은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시, 주거지 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공유하는 자연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집이라고 불리는 많은 집들이 매트리스만으로 인식되는 저자의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을 제시하면서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최소의 집에서는 수면과 화장실 사용만이 가능하며 나머지 다른 것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은 축소 또는 축약된 채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점들을 지적한다. 빨래방과 스타벅스의 방문이 일상이 되는 젊은 층의 생활 문화도 이런 주거 형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빨래를 널고 차를 마시고 화분을 키운 베란다의 공간을 갖기 힘든 구조의 주거 형태들이 가져온 공유 공간의 외주화를 만들었다.
‘안행복주택’편지글에서는 정책 입안자의 태도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키워드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책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운용과 실용이 필요한 지점을 집는다.

3장 일상의 발명가들
식탁테리어라는 말은 아마도 저자가 만든 단어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혼자 살면서 시작된 식탁인테리어로 식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바뀌거나 모으고,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2장에서 언급되었던 주방 공간의 축약과 축소가 요리라는 행위를 멀게 하고 간단하게 데워먹는 간편식의 식생활을 유도한다. ‘감히, 요리를 해먹어.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라는 거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요리는 개인 취향이다. 선호 여부에 따라서 즐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주거의 구조는 사유의, 사고의 폭도 움츠러들게 한다.
반려동물을 기르기도 하고 실제로 기르는 이들의 집을 탐방한 경험은 건축가로서 집을 설계할 때, 기존의 인간만을 기본으로 한 설계에서 한 걸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현성의 싱크로율은 아직 낮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현장성이 넓어질 때 주거에 대한 집에 대한 의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4장 우리를 담을 집
어차피로 만든 세상편에서의 에피소드는 집에 관한 따뜻한 관점의 한 갈래를 마주하게 한다. 평수나 크기로만 말해지는 주거지가 아닌 동네라는 의미로 거주하고 생활했던 곳의 생활정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의 메모, 깨끗한 이사 정리로 입주 청소비를 아낄 수 있고 그런 기분을 전해주고 싶다고 탐방했던 곳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인터뷰라서 감동이 더했다.

전월세 집이라도 사는 동안은 내가 거주하므로 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듯 하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짚은 것이 아닐까?
벽돌로 쌓은 집과 지푸라기로 엮은 집편의 논의처럼 늑대집만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의 집은 지푸라기 집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 들어온다. 집안이든 밖이든 안전할 권리가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의 흐름은 그저 집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느낀다.

217~218쪽
도시는 거름망으로 걸러진 사람들끼리 사는 곳이 아니다. 도저히 서로 겹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것을 억지로 구분하고 나누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상한 형태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다름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다름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성별은 같지만 국적은 달라, 나는 너와 언어는 같지만 피부색은 달라... 이렇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협소한지 가늠하게 할 뿐이다.
‘언어’라는 단어를 알았을때, ‘자가 주거’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성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다르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감각’을 체화하는 일이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 외 1명 지음
다산북스 펴냄

읽었어요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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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어느덧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50대의 그들은 강릉 여행을 통해 각자의 삶에 대한 겹치는 부분과 여전히 가려졌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동갑 혹은 같은 또래라는 동질성의 키워드로 들어온 소설의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이 20대를 지나 50대를 살아왔던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강릉에서, 이곳이 아닌 여행지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여행지일까? 일탈 같기도 하면서 일탈이지 못한 중년이 된 3명의 대학 동창의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난주, 정은, 미경.
난주는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정은은 동창인 남편이 코로나로 인하여 퇴직 후 오픈했던 키즈카페의 폐업으로 경제적 파산에 이른 상태로 빚을 갚기 위한 생업전선에서 시달리며 살고 있다.
미경은 아픈 엄마를 홀로 돌보면서 직장인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녹록지 않다. 오랜 친구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공유하거나 말한 이야기들이 각각이다.

난주의 빈둥지증후군, 남아도는 시간의 공허감, 여성으로서의 성적 박탈감.
정은의 경제적 파탄, 생활고, 빚투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적 상황. 요실금으로 인한 수치심.
미경의 간병 돌봄에 혼자 고립감 속에 지나가는 시간들, 관계들.

세 명의 인물들의 서사를 읽다 보면 50대에 이른 삶의 모습들이 빛나지도 안정되지도 못함을 본다. 나름 노력하면서 시절을 살아온 왔는데, 어쩌다가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절에 충실했건만,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것일까!

가장 측은지심이 느껴진 인물은 미경이다. 동성 연인의 결혼으로 관계가 정리되고, 어머니와의 간병 생활이 시작되고, 자매인 언니의 사라짐, 독박 간병의 고립무원 같은 생활로 이어진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미경에게는 가족은 있지만 가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하지 않을 때 혼자가 되는 건 별로였다.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여야 혼자라는 사실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이 그립지 않았다. 그저 그리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난주가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일시적 관계의 단절 이후 기다려준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장면이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된다.
난주는 입사라는 사회생활 없이 바로 결혼과 출산, 육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활 패턴은 많은 관계들의 정리와 변화가 오는 시기다. 그때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느껴지던 고마움과 왠지 모를 어깃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정은은 난주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의 안락한 삶이라고 자신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빈둥지증후군과 여성성의 상실로 허한 난주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 파산에 이른 정은이나, 독박 간병의 미경보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인물들은 다 각자의 행과 불행을 지고 오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여행지가 강릉인 이유는 각자의 사연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강릉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가 강릉과 연결되면서 그녀들의 삶과 포개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그런데 오십대를 앞두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꾸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50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았는데, 남은 시간마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헛헛했다.

오십이 된다는 것 소설의 문장처럼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은 시간을 그냥 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늙음을 이제 삶의 중심부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십을 앞두고 함께 할 친구들이 있고, 나눌 서사가 있다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가 어떤 삶이었을지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삶을 안도하면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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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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