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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두려움만이 가득해 보이는 파멸 이후의 세계에 아직 어린 아들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부성애라기보다는 일종의 원초적인 죄책감에 가까울 듯하다.
파멸과 재앙, 그 자체보다 그 이후 생명력을 잃어버린 흑백의 세계를 그려낸 코맥 매카시의 상상력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소설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들과 서로를 약탈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애쓰는 선한 부자를 그린다. 아버지는 아들이 있어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고 아들은 아버지가 있어 살아낼 수 있었던 그들.
혼자가 아니기에, 지키고 돌봐야 할 타인이 있기에, 그 미약하면서도 거대한 체온이 있어 이 식어버린 지구에서도 살아가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이 진지하고 담담한 드라마는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 때문인지, 작품 자체의 한계 때문인지 베스트셀러치고는 대중 일반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크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매력을 지닌 작품이란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저 파괴된 세상을 표현하기 위해 문법까지 의도적으로 파괴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남지만. 추가로 소설 속 유일하게 선명한 색채로 읽혔던, 아들이 코카콜라를 마시던 장면은 각별히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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