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님의 프로필 이미지

김보경

@wandukongu

+ 팔로우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소설집)의 표지 이미지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창비 펴냄

읽었어요
0

김보경님의 다른 게시물

김보경님의 프로필 이미지

김보경

@wandukongu

-거기 그만두면 안 돼?
강선이 말했을 때, 은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사실 빠른 철렁은 아니고 철-렁이나 처얼-렁에 가까운 편이었다. 느린 하강을 감지하는 마음이랄까. 부러지거나 휘거나 쓰러지지 않으려면 직장과 주거지를 계속 옮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떤 날은 그 시기가 아직 먼 것 같았고, 가끔은 그 시기가 가깝게 느껴졌으며, 우울한 날은 이미 지난 것처럼도 여겨졌다. 저승으로 가는 통로 위에 세워졌나 싶게 매번 나빠지는 오래된 학교에서 지나치게 소모적으로 살고 있었다.

내가 너를 싫어하는 것은 네가 계속 나쁜 선택을 하기 때문이지 네가 속한 그 어떤 집단 때문도 아니야. 이 경멸은 아주 개별적인 경멸이야. 바깥으로 번지지 않고 콕 집어 너를 타깃으로하는 그런 넌더리야. 수백만 해외 동포는 다정하게 생각하지만 너는 딱 싫어. 그 어떤 오해도 다른 맥락도 끼어들 필요 없이 누군가를 해치는 너의 행동 때문에 네가 싫어.


"있잖아, 다음 선거에는 너희들한테도 선거권이 있어."
대흥의 설명을,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를 특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끄트머리에 그렇게 덧붙여 주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이의 눈 안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대홍은 그 반짝임 때문에 늘 희망을얻었다. 뒤에 오는 이들은 언제나 더 똑똑해. 이 아이들이라면 우리보다 휠씬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그 바보 같은 교과서를 막길 잘했어.

두 사람은 몇 년새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되어 있었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길게 말하지 않아도 쉽게 좋은 호흡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나 연인은 아니었다. 매주 손을 잡고 걸어도 연인은 아니었다. 은영은 살아 내는 일이 버거워서 먼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모든 상황이 임시적이라는 걸 늘 암시했다. 여기엔 잠시 있는 거예요, 라고 항상 내비치는 여자를 향해 감정적인 경계선을 넘기에는 인표가 너무 현명했다.
은영에게 아주 미약하게나마 모진 의도가 없었다 해도, 머물지 않겠다는 그 표정만으로 지난 몇 년간 인표는 신경통 비슷한 것을 않아야 했다. 쉬운 게하나도 없는 관계라면 놓아야 하는 관계겠지. 그런 말 그대로. 기운 뺏기는 관계는.

마음속에서 부실한 선반 같은 것들이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곳에서 눕은 나사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내려앉는 그런 소리였다. 여기 계속 있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도 있을 듯한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드럽게 용의 몸이 떠올랐다. 10센티쯤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인표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용의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힘내, 떠 봐. 이번엔 끌어내리지 않을게. 한 번 더 떠 봐.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지음
민음사 펴냄

4개월 전
0
김보경님의 프로필 이미지

김보경

@wandukongu

천천히 읽어도 된다고 했지만,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읽히길 기다리는 그 초조한 마음을.

<초록 고래>와는 다른 장르의,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이전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고, <초록 고래>가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 힘 풀어, 도연 씨. 힘 풀어.

한 모금만 할까, 딱 한 모금만? 끈질긴 통증과 그보다 더 끈질기게 이어지는 갈등.



그러나 유미 씨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선 탓에 부엌으로 갈 수가 없었다. 정작 유미 씨는 자신이 나를 막아서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그런 유미 씨의 얼굴을 마주하자 온갖 감정이 뒤섞였다. 수치심과 분노, 좌절감과 그에 동반되는 이상하게기대고 싶어지는 마음까지. 이해가 안 되죠? 단 몇 시간도 참지 못하는 게. 내가 물었다. 그러자 유미 씨는 특유의 커다랗고 맑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럴리 가요. 저는 지금 낙타인데요.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의 마음이 그토록 무수히 찢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낱낱이 다른 천 개의 슬픔과 만 개의 슬픔이 생겨났다는 뜻이라고.

//

영하 없이도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니. 돌을 토하는 것이 병이라면, 나는 영원히 낫고 싶지 않았다.

그때 양하는 아주 작고 약해져 있었다. 영하가 그런 상태가 아니었더라도 나와 함께일 수 있었을까. 그 질문 앞에서 나는 매번 자신이 없었다.

그럼 장국영 돌봐주는 대신에 돌을 조금만 더 줄 수 있어? 희조는 훔치고 싶은 충동이 들 때 잠재우는 용도로만 쓰겠다고 덧붙였다. 나는 고민 끝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음번에 내 머리도 잘라주라. 그래. 이번 달 월세도 좀 내주라. 적당히 해.

나는 오랜만에 보는 영하의 얼굴, 그물무늬비단밤에게 수십 번 잡아먹히고 나서도 멀쩡한 그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봉투를 열어보자 현금 백이십만 원이 들어 있었다. 작년 겨울에 영하가 들고 갔던 생활비 통장에 남아 있던 금액이었다. 그 돈을 보자 웃음이 났다. 웃음이 나다가, 온 몸이 추워졌다.

처치 곤란한 동물을 산호에게 넘겨준 것만 같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머리가 완성되었을 때 산호는 말했다. 친구가 비단뱀을 이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내가 말했다. 원래 나쁜 일은 좋게 끝나.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쁘게 끝나는 거고. 그렇게 말하는 영하 언니의 얼굴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많이 피곤해요? 시차 적응이 안 됐나 봐. 언니는 무슨 일본에서 시차를 얘기해요... ... .

그 점은 내가 영하 언니를 좋아하는 이유이자 영하 언니를 미워하는 이유였다.

초록은 어디에나

임선우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4개월 전
0
김보경님의 프로필 이미지

김보경

@wandukongu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관절과 같은 것이라 활액이 없이는 삐걱거리며, 그에 따른 통증과 불편은 실제로 느끼고 감당하는 쪽이 으레 따로 있다는 게 단희의 주된 불만이었다.

발화 당사자의 미묘한 제스처나 그 자리의 공기, 청자의 심리가 지워진다는 점이. 언어 자체가 지닌 약점이었다.

물 새는 구멍이 따로 있었는데 교원은 무엇을 위해 악착같이 일상의 틈마다 접착제를 바르고 살아왔는지 알 수 없어졌다.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지음
민음사 펴냄

4개월 전
0

김보경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