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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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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정아은 지음
마름모 펴냄

읽었어요
쓰기의 기술부터 작가로 먹고사는 법까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글쓰기 세계의 리얼리티

정아은 작가가 등단 이후 10년 동안 작가로서 살면서 글쓰기에 관한 자신의 생각과 실제의 경험을 함께 엮은 에세이다.
작가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를 먼저 읽었는데, 동년배에 글 쓰는 여성이면서 엄마이기도 한 작가의 정체성에, 당시 육아의 한 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릴 때 왠지 모를 내적 친밀감과 궁금증으로 작가의 독서 에세이를 인상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후에 등단작인 ‘모던 하트’는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 세태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은 1,2부는 쓰기의 기술 즉 작법서로 작가 자신의 글 쓰는 방법에 대해 3,4부는 글 쓰는 이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1장 어떻게 시작하는가
24쪽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과한 욕심을 낳는다. 어떤 욕심인가? 여러 번의 퇴고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을 처음부터 통째로 거머쥐겠다는 불가능한 욕심이다. 세상에 단번에 완성도 높은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죽하면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는 말이 있겠는가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은 일시적으로 존재하다 사라질 어설픈 가건물을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의 건물을 만들겠다는 불가능한 소망이다.

; 첫 장부터 쓰는 자의 마음을 간파한 문장들로 시작한다.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심리는 어디에서 기인하고 왜 그런 심리상태가 시작되고 흐르는지를 너무 잘 집어서 이야기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잘 쓰지 않겠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끝까지 쓰겠다.’라는 작가의 말이 그냥 들리지 않는다. 끝까지 쓰는 용기의 정여울 작가의 책도 떠오르고 많은 작가들이 이구동성 말하는 끝까지, 매일, 일정 시간을 앉아서 쓰려는 의지와 루틴을 만들어가는 직업적 태도와 실천의 무게감이 더없이 인정된다.


31쪽
글쓰기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글 쓰는 주체의 개인적 특성을 잘 드러냈느냐가 관건일 뿐, 정답 같은 건 꿈에서조차 있을 수 없는 것이 글쓰기라는 장르의 본질이다. 인문학 강연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은 ‘사람’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파고들어도 파고들어도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의 마음을 파헤치는 데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한순간도 ‘인문학’이라 불려선 안 될 것이다. 요컨대 글쓰기와 인문학은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문화유산 가운데 ‘정답’과 가장 거리가 먼 장르일 것이다.

;흔히 정답의 유무에 따라서, 이과형 문과형 유형의 사람으로 분류해 말하곤 한다. 작가의 말처럼 정답이 없는 글쓰기의 장르적 특성에도 글을 쓰기 시작하는 초반부에는 어떤 정답을 찾아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런 마음에 대해서 가차없는, 그런 한편으로 글쓰기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히 집어서 이야기를 해 주는 작가의 말이 쏙쏙 들린다.


33~34쪽
왜 자꾸 잘 쓰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는지 이렇게 길게 설명한 것은, 그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해해 보여줌으로써 그 요인을 하나하나 격파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글쓰기는 혁명이다. 서서히 진행되는 혁명. 내 내면의 지층을 이루는 요소들을 들여다보고 조금씩 바꾸어나가는, 끝내는 지층 위에 세워진 구조물 전체의 성격을 바꾸어나가는 혁명.

; 잘 쓰고자 하는 마음은 끝까지 쓰면서 대척점을 지나서 스스로 구조물 하나하나를 만들어 가는 혁명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글쓰기란 끝까지 쓰는 자기에 이르는 혁명이라는 것이다.

40쪽
내가 말한 도약이란, 내가 무엇을 쓰고 싶어하는지 알고, 그것을 쓰는 과정을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으며, 어떻게든 써내게 만드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의미다.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장악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분명히 ‘도약’이라고 칭할 만한 것이었다.

; 등단을 하고 청탁을 받고 원고를 쓰고, 강연도 하면서 작가는 도약의 순간을 인지하게 되는 이야기한다. 어떻게든 본능적으로 파악해서 써낸다는 지점에서는 10년을 작가 생활을 하고, 공모전에 여러 번 떨어지면서 수없이 엄청난 양의 글쓰기가 체화되어 스스로를 파악할 수 있었기에 이런 확실한 자기 인식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쓰고 싶은 분야와 써내는 능력이 함께 가야 하고, 그런 수없이 많은 시간과 양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쓰는 사람 작가가 될 수 있겠는가


대량 생산의 견인장치들
이 장에서는 블로그와 인터넷 서점, 오마이뉴스 등에서 서평을 3년 정도 했다는 경험을 말하면서, 계속해서 쓰게 하는 강력한 닻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더 강력하고 직접적인 닻은 글쓰기 모임이라고 한다.
글쓰기 모임에서 타인의 시선으로 내 글에 대한 공개와 더불어 평을 들으면서 성장할 수도 있지만, 그 평으로 인한 상처도 받을 수 있음을 말하면서 덜 상처받는 방법에 대한 이야길 넘어간다. 사실 이런 모임에서 제일 무서운 게 타인의 평가다. 질타, 비판이 연이어 제기되면 글쓰기에 대한 마음과 공개에 대한 마음은 휘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어떻게 지나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다음 장으로 계속 읽게 된다.

다치지 않고 합평하기 1, 2
1에 실린 내용들은 내가 타인의 글에 대해서 합평을 할 때도 갖추어야 하는 예의이며, 합평을 해야 하는 태도와 지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짚어주고 있다.
2에서는 합평의 자리에서 상처를 받을 수밖에는 없는 자리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방의 합평의 진정성을 파악해서 수용 여부를 가려야 한다고 말한다. ‘자존감 높이기 운동 욕구’에 이른 상대방인지, 내 글에 도움을 주려는 평가인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부분에서는 작가가 상담심리학을 공부했던 바탕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아야 알 수 있는 타인의 마음에 대해서, 훈련하는 방법으로는 독서를 통해서 속성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에서는 작가로서의 생각이 드러난다.

2장
서평
80쪽
다른 사람이 쓴 책을 매개로 자기 얘기를 풀어놓는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 생각을 큰 줄기로 내세워 독립적으로 글쓰기를 이끌어나가는 순간이 온다.

;작가의 말대로 가장 진입 장벽이 낮은 글쓰기의 형태로 글쓰기를 하고 싶을 때 처음으로 접근하기에 가장 접근성이 좋다. 어느 정도 기초가 쌓인 형태 위에 자신의 생각과 경험, 저자의 사유에 대한 공감과 다른 시선의 관찰도 함께 할 수 있고, 그런 생각들을 정리해서 쓰면 된다는 것이 다른 장르에 비해서 쉽다. 학교 과제 중 독후감은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학교 과제다. 왜일까 생각하면 독후감은 책을 읽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과제로 접해지기 때문이다. 어른이 돼서 스스로 독후감 이른바 서평을 쓸 때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저자의 생각과 사유를 따라가고 있는 건지 혹은 저런 생각이나 사유의 맥락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의문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가장 진입 장벽이 낮은 서평쓰기라도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칼럼
81쪽
칼럼은 난이도가 높다. 공적인 뉘앙스를 유지하면서 한정된 분량에 메시지를 담아내야 한다. 그러면서도 뻔한 윤리 담론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하니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대체 원고지 8매 분량에 무슨 내용을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작가의 말처럼 쓰는 입장에서는 8매 안에서 자기의 생각과 주장을 다 드러내야 하는 글쓰기 장르라서 무척이나 어렵다. 그러나 읽는 독자로서는 신문 칼럼을 즐겨서 찾아 읽는 필진도 있어서 8매 안에서 자신의 생각과 주장의 명료함을 만날 때, 그런 칼럼집의 책들을 만날 때 반갑기도 하고 흐름을 읽고 사회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글의 맛을 보게 된다. 이런 글은 어떻게 쓰는지 이 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퇴고의 기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85쪽
칼럼은 ‘빼기’의 기예가 중요한 글쓰기이고, ‘빼기’의 기예는 모든 종류의 글쓰기에 세련미를 입혀주는 일급 병기이다.

88쪽
분량이 정해진 짧은 글쓰기는 글쓰기의 ‘테크닉’에 해당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화해 준다.

89쪽
짧은 글쓰기는 생각을 다듬고 문장을 경제적으로 추리는 유용한 훈련이 될 수 있다.

에세이

①이 글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가.
②메시지 전달을 위해 내게 있었던 일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밝힐 것인가.
③이 에피소드를 이 정도 밝히는 것이 나 자신에게 소화가능한가.
④이 에피소드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에게 이 내용이 소화 가능한가.

;네 가지의 에세이를 쓸 때 생각해야 하는 부분들을 말하고, 작가 자신의 경우인 ‘엄마의 독서’라는 에세이를 썼던 경험을 풀어놓았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첫 책으로 읽었던 책이고 꽤 인상적이었다. 엄마이지만 나이고 싶은 욕구가 육아와 충돌하면서 나의 욕구인 책 읽기에 대한 에세이라는 지점에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다. 같은 상황과 같은 욕구에 놓여 있는 작가의 에세이는 그래서 공감이 컸다.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 일기 같던 글이 독서 에세이로 출간될 수 있었던 흐름의 사연들을 읽다 보면 써놓은 글과 더불어 편집자와의 협업의 중요성도 보았다.

102쪽
결국 에세이는 ‘거리 두기’의 예술이라는 것. 내게 일어난 일을 기술하되, 그 일을 어느 정도까지 드러낼지를, 어떤 톤으로 드러낼지지를 저울질하는 기예라는 것. 내 이야기를 공개하되 있었던 일 그대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맞게 정제된 형태로 기술해야 한다는 것. 즉 주제에 봉사하는 선 안에서만 개인사를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104쪽
에세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힘이 강한 장르다. 자신을 열어 보여주고, 그렇게 세계를 열어 보여준 작가에게 독자가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에세이의 출간 과정에서 내 내면에서 일어난 일을 ‘치유’라고 한다면, 에세이 출간 뒤 독자들과 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소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치유와 소통은 어느 부분에서 연결점을 가진 친척 같은 개념이기도 하니, 에세이를 치유와 소통을 불러오는 글쓰기라 해도 좋으리라.

;박완서 선생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저평가된 이유를 서술한 내용에는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연신 동조하게 된다. 장강명 작가와 김현진 작가의 에세이의 인용도, 여성의 서사가, 에세이가 지금 이 시대에 왜 독자들에게 호응 받는지를 정확하게 분석해서 서술한 문장은 더 할 수 없는 연대감과 공감이 들어온다.
대의를 위해 가족을 버렸던 계백의 서사가 아니라 따뜻한 밥 한 끼를 위해, 더러워진 집을 청소하고 돌아올 가족, 가까운 이들을 위한 일상 서사가 ‘솔직함’과 ‘디테일’로 에세이를 쓸 때 가져가야 할 것들이라고 정리해 준다.

논픽션
132쪽
논픽션은 이곳저곳 뚫린 공백이 많은 블루오션 같은 분야다. 마음속에 이글거리는 메시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언어로 코딩해 전달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세상에 자료는 널려 있다. 손 뻗으면 도와줄 사람도 지천에 포진해 있다.

;작가의 최근작이 논픽션이다. 처음 해본 논픽션 글쓰기에 대해서 블루오션 같은 분야라는 말에 필자가 아직은 많지 않은 분야임을 확인한다. 문학 안에서도 이과적 글쓰기라는 표현이 적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확실한 근거와 아름다운 문장이 어우러진다면 논픽션의 최고의 책이 되지 않을까!


소설
136쪽
타인의 삶을 엿보고 내 삶의 밑거름으로 삼는데 소설은 가장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도구이다. 작은 소설책 한 권을 손에 쥔다면, 우리는 어디서든 타인의 삶에 빠져들 수 있다.

137~138쪽
설명하기는 이야기의 진행 방향이나 인물의 마음, 혹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직접 말해주는 기술방식이고, 보여주기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기술 방식이다.

139쪽
소설의 표현 기법에서 ‘보여주기’가 ‘설명하기’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유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자유의지’ 차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내 몸과 내 몸 안에 깃든 생명, 혹은 정신이라 불릴 진한 덩어리의 주인이다.

140쪽
‘설명하기’는 은연중에 독자에게 나아갈 바를 정해준다는 인상을 준다.
사람들이 ‘보여주기’기법이 잘 들어간 소설에 감화를 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모든 마음의 작용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는 느낌, 독서의 경험이 ‘나’에 의해 주관되었다는 뿌듯함 때문이다.

143쪽
소설가는 전체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장면의 비중과 특성에 따라 설명하기와 보여주기를 선택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이 비율을 잘 조정해 반영한 소설이 가독성과 개연성을 확보하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은 쉽지 않다.

;소설 쓰기의 흐름을 작가가 아주 자세하게 다섯 편이 장편 소설을 썼던 경험을 바탕으로 예시와 대비를 담아서 설명하고 있어서 술술 읽어 나가게 되고, 이런 구조적 흐름을 독자로서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런 구조와 문장에 끌려서 소설을 읽게 된다는 걸 역으로 깨닫게 된다.

3장 쓰는 마음
이 장은 등단 이후에 차기작을 출간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꽃길만이 있을 거라는 장밋빛 전망과는 달리 메일로 원고를 송고 후 거절 메일을 받기도 하고, 편집자에게 원고 거절의 대면과 메일들에 상처받기도 했다며 전한다. 그 이후 원고 거절을 극복하는 분투의 과정과 마음들에 대해서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원고를 거절당한 후 실패한 자신의 모습을 다시 글로 쓴 후 자신의 원고를 읽고 스스로 만족해하다가 눈물을 흘리고는 경고음을 깨달았다는 장면은 처절하기도 하면서 작가일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모습으로 느껴졌다.
그 이후 동아줄 활동이라고 한 사이버대학 수강과 화분 기르기, 피아노 치기의 대한 이야기에서는 지나간 과정에 대한 묘사 이상의 뭉클함과 짠함이 함께 전해져 왔다.
2년 후 원고 거절의 상황을 다른 작가들은 어떻게 감당했는지 궁금해하면서 그런 사례를 찾아 나선다. 예상처럼 작가들이 자신의 실패, 원고 거절에 대한 사례들은 쉬이 찾아낼 수 없었다. 그 사례를 찾는 과정에 대한 고백을 듣다 보면, 집요하면서도 어떤 위안과 지표를 찾고 싶어 하는 작가의 모습이 짙게 전해진다.
작가가 아니라는 정체성을 간직한 책, 여전히 글을 쓰고 있었고, 직업을 바꾸기 위한 준비로 상담심리학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 진하을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어쩌면 상담심리사로 만날 수도 있었던 작가가 입학 원서를 제출하러 가려고 했던 순간 멈추고 자신의 마음의 밑바닥을 본마음을 들여다보고 자기를 다시 깨닫게 되는 과정들에서 나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고 깨닫는 시간과 과정의 녹록지 않은 여정을 함께 느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 이후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장면들이 다시 소설이 되어 장편 소설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서사는 정말이지 작가의 정체성의 재정립의 시기로, 앞으로는 쭉 쓰는 작가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장은 정아은이라는 사람이 작가로서 정체성을 쌓아가는 이야기로 너무 솔직하기도 하고 기행적인 마음 상태와 당시의 행동들에 대한 이야기가 우프기도 하면서도 좋아하는 일 또는 인정욕구의 일을 이루는 것의 분투기로 읽었다.

228쪽
나를 존속시키겠다는 욕망은, 폼 나게 잘 존속시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절대로 꺼뜨릴 수 없고 꺼뜨려서도 안되는 ‘생명체의 핵심 욕망’이다. 내게도 있고 네게도 있는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보다 근사하게 실현시킬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더 세련된 대응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231쪽
그러니 내가 글을 쓰는 두 번째 이유 ‘자본주의에 지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는 결국 인정욕구에 귀속된다고 볼 수 있다.

232쪽
어찌나 세련된 방식을 취했는지 인정의 대상이 되는 행위가 애초에 행위자의 인정 욕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주는 이들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되는 그런 방식의 인정을.

;작가의 본심을 가감 없이 쓴 문장들을 읽으면서, 인정욕구의 멋진 발현,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박수를 치고 싶다. 인정욕구에 매달려 삶을 망치는 이들이 있는데, 작가가 말하는 인정욕구의 의식들은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박상영 작가도 팟빵에서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관종의 성향이 있다는 맥락의 말을 했다. 관종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부정적에서 재기발랄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인정욕구, 관종을 같은 맥락의 의미로 올려놓고 바라보니, 작가는 꽤나 힘든 업이지만 한편으로는 멋지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작가는 독자와 함께 호흡하는 결과 장이 더 많아진 시대여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4장 작가를 둘러싼 사람들

편집자
편집자와의 일화들도 그들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쌓게 되는 경우, 삐걱대었던 경우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같은 관점을 지닌 사람과의 작업이, 과정에서 오는 힘듦이나 문제를 함께 겪어낼 수 있다는 믿음과 신뢰가 쌓인다는 것이다.
일화에 등장한 편집자들의 이야기는 출판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는 재미가 있었다. 각각의 직업적 태도에 대한 모습과 출판계 직장인들을 들여다보는 흥미도 있었다.

독자
277쪽
작가가 쓴 책을 호의적으로 읽은 독자는 작가에게 일종의 동창생과 같다. ‘같은 생각’이라는 하교를 거쳐간 동창생. 머릿속에 일정한 패턴의 사고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정신적 친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의적 독자에 대한 더할 수 없는 찬사이고, 독자로서 작가가 이런 생각으로 대해준다는 점이 내적 친밀감의 상승을 맛본다.

작가
예술의 본질은 무상성이며, 작가는 현대 자본주의 체에서 상품성과 무상성을 동시에 갖춘 존재라고 말한다.

기자
상대에게 질문할 권한을 핵심 정체성으로 가지고 있는 직업인으로서, 인터뷰이로서 그들을 만날 때 자신이 도출한 의제를 대화를 통해 사회적 공감대를 높이는 방향으로 변주해낼 줄 아는 이들이면 그런 모습의 기자를 만날 때 기쁘고 한 뼘 확장된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타인의 모습을 통해서 내가 보지 못한 지점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다.

동료작가
309쪽
같은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처지이기에, 우리는 서로 공감하고 연민한다.
불구덩이인지 뻔히 알면서도 뛰어드는 작가들에게, 동료 작가들은 그 자체로 나를 작아지게 만드는 비교 대상이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유일하게 동일한 입장에 서본 자로서 깊게 보듬어 줄 수 있는 희귀한 생물들이다.

;여러 감정이 드는 동료 작가들은 그럼에도 서로 공감과 연민을 하는 존재로 동료애가 진하게 느껴진다. 어떤 분야나 홀로 존재할 수 없고, 동료가 있기에 경쟁과 성장이 함께 있다. 경쟁을 작가의 말로 바꾼다면 인지도의 차이, 유무라고 할 수 있다. 더 인지도 있고 대중에게 더 인식된 작가들이 있기에 질투나 부러움의 감정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서로 애환을 듣고 나눌 수 있는 같은 업을 가진 이들로서의 공감대는 어디나 중요하지 않은가.


에필로그에 작가의 핵심 정체성을 ‘거절’이라고 말하면서 같은 정체성을 가진 직업군에 대한 이야기와, 마지막 구절에서 이 책의 서사를 실존 서사로 칭하면서 한 조각 웃음, 한 조각 위로, 한 조각 정보, 혹은 한 조각 심정적 지지라는 문장이 유머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작가의 이번 책은, 피 땀 눈물의 실존서사가 가득하면서도 심리에 대한 분석과 작가적 관찰의 시점들이 돋보여서 읽는 내내 재미, 흥미, 집중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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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아이의 방학 숙제 책 중 하나였다. 여전히 독서록 쓰기를 몹시도 귀찮아하지만, 엄마도 읽고 같이 반응해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으로 읽고 아이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읽어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관계’라는 점에 생각이 맴돌았다. 코로나19를 거쳐왔기에 그런 까닭일까! 유독 ‘관계’라는 키워드가 많이 들어온다. 점점 살면서 타인과 또 나 자신과의 관계에 생각이 많아지고 변한다.

소설의 화자 류담은 타인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부모님의 교통사고 이후로 얻게 된다. 원하지 않는 능력을 얻고, 그 능력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열었던 친구의 ‘죽음의 디데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디데이의 초록색 링 숫자대로 죽는다. 이 사건 이후로 담은 자발적 아싸가 된다. 관계를 맺는 이의 '죽음의 디데이'가 보이게 된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타인과 다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초, 중교 시절을 지나 고등생이 된 담에게 같은 반 반장 소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선다. 학교에서도 이미 자발적 아싸로 인식되는 담에게 미소는 반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같은 조별 과제를 하게 되면서 담의 일상에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담과 같은 능력을, 같은 불행의 대가로 얻게 된 털보 아저씨 상두를 만나면서 담의 삶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털보 아저씨 상두가 불행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능력으로 무당 같은 업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의 단축된 수명을 바꾸는 방법을 알게 되고 도우면서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담과의 만남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를 속을 헤쳐 나가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설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같이 읽는 이들에겐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물꼬가 된다. 타인을 위해서 얼마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희생할 수 있는 이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일 때 가능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들.

이야기의 흐름이나 각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연결되고 교차되는 구조들이 이야기 속으로 계속 빠져들게 한다. 복선과 암시가 있어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지도 가늠이 되긴 했다. 유일한 어른으로 나오는 인물 털보 아저씨 상두는 담과 ‘친구’가 되어서 혈연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조력자 혹은 동반자로서, 어른에 대한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고 필요한 현실적 모습으로 등장해서 좋았다.

담이 미소와의 관계가 변화되는 일련의 일들은 작은 인연의 조각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듯, 관계의 그림 또는 깊이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서 새삼 대면의 세계가 갖는 힘을 새삼 느낀다.

담이 미소와 우정에서 설레는 첫사랑의 관계로, 그리고 목숨을 나누어주고 싶은 존재로 변화되는 관계의 변화는 담 역시 엄마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라는 걸 깨닫고 그 덤의 삶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게 나누려 한다는 흐름이 인간의 성선설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담을 싫어하던 친구와의 오해 혹은 묶은 감정들이 해소되는 사건 역시 타인의 선의 혹은 본능적인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깨닫게 되는 담과의 대척점에 있던 소현의 변화도 그런 부분에서 이해가 된다. 담과 소현이 처음 맺는 관계에서 오는 서투름과 오해가 싫은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과 해소의 과정 모두 이 소설의 주제라고 느꼈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해준다.

청소년 소설다운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 혹은 성장과 화해,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열린 결말.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이르는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 변화하는 담의 모습이 아픈 모습만 있지 않기에 엄마 마음에는 안도했다.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게 완결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천진난만하지도 하고 그렇다고 상처에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체된 상태로 끝나지 않기에, 성장과 고난 또는 고통은 한묶음처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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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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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부제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이 제목의 역설과 잘 어울렸다. 흥미롭게 읽었다.
건축가인 두 사람이 나뉘어서 ‘집’에 관한 개인적 시선에서부터 인문사회적인 사유로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일견 30대들의 전월세의 이사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계속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소유하게 될 집에 대한 의미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는 이윤석이 에필로그는 김정민이 썼는데, 도입부의 글과 마무리의 글이 책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여는 맛과 마무리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1장 솔직하게 만들어가는 집
'여지의 여지 '편에서 공간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스며들듯 수긍하게 된다.
넓은 평수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공간의 여지가 그곳에서 사는 이의 생각과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영향으로 더 긍정적이고 더 창의적으로 사고가 넓어질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에 대한 논의들을 읽다 보면 자본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 해석한 공간의 ‘최소성’은 생활하는 이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다. 간혹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이 제품을 디자인 한 이는 이런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나 동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실제 사용하는 경험치가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불편하거나 참신해지는 상반되는 경우 모두 다.

17쪽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삶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 시대라는 도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삶은 과정일 뿐이라 여기고, 과정이 된 삶들은 아무렇게나 최소로 방치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념이 다시 정의되고 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양은 서서히 청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고 있다. 박제된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정붙이고 녹붙이고'편의 에피소드도 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공간과 물건에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의 역사를 쌓아가는 모습들이 새삼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취향’에 대한 김정민의 생각은 취향조차도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어 평가하려 하지만, 자기의 솔직함과 생활감이 있는 인테리어가 더 좋은 취향의 인테리어라는 문장에서는 30대의 젊은 건축가의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엿본다.
두 저자는 고양이를 기른다는 점과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집과 방에 대한 생각과 지금까지의 전월세 이사 여정기를 말하고 있다. 책 집필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지인들과 관련인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집들을 탐방하면서 느끼고 접한 생각들도 실려 있다.

자신의 집이 싫다고 하면서 가는 내내 왜 ‘내 집이 싫은지’를 말하는 이를 통해서 집을 긍정하려고만 했던 이유를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 젖어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또 마주친 것은 자본주의는 소비주의이고 소비가 나를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에 살기에, 나의 소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나쁘다는 또는 별 볼일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문장에 새삼 환기하면서 동의하게 된다.

2장 셋방일지
아파트의 창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인해 계층과 사회적 구분을 읽게 된다. 동일한 크기와 효율성으로 정착한 아파트 창호의 크기의 반대편에 빌라라는 집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용의 풍경을 던져준다.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막고 보완해야 하는 빌라들. 이런 논의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읽어내고 말하고 기록하면서 건축가로서 어떤 반영과 개선을 할지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뷰’에 관한 논의에서도 자연을 담는 뷰, 경관도 특정 계층이 소유하게 되는 것의 불평등 지적한다. 녹지공간인 공원이나, 경관을 더 많은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시, 주거지 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공유하는 자연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집이라고 불리는 많은 집들이 매트리스만으로 인식되는 저자의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을 제시하면서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최소의 집에서는 수면과 화장실 사용만이 가능하며 나머지 다른 것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은 축소 또는 축약된 채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점들을 지적한다. 빨래방과 스타벅스의 방문이 일상이 되는 젊은 층의 생활 문화도 이런 주거 형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빨래를 널고 차를 마시고 화분을 키운 베란다의 공간을 갖기 힘든 구조의 주거 형태들이 가져온 공유 공간의 외주화를 만들었다.
‘안행복주택’편지글에서는 정책 입안자의 태도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키워드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책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운용과 실용이 필요한 지점을 집는다.

3장 일상의 발명가들
식탁테리어라는 말은 아마도 저자가 만든 단어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혼자 살면서 시작된 식탁인테리어로 식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바뀌거나 모으고,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2장에서 언급되었던 주방 공간의 축약과 축소가 요리라는 행위를 멀게 하고 간단하게 데워먹는 간편식의 식생활을 유도한다. ‘감히, 요리를 해먹어.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라는 거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요리는 개인 취향이다. 선호 여부에 따라서 즐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주거의 구조는 사유의, 사고의 폭도 움츠러들게 한다.
반려동물을 기르기도 하고 실제로 기르는 이들의 집을 탐방한 경험은 건축가로서 집을 설계할 때, 기존의 인간만을 기본으로 한 설계에서 한 걸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현성의 싱크로율은 아직 낮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현장성이 넓어질 때 주거에 대한 집에 대한 의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4장 우리를 담을 집
어차피로 만든 세상편에서의 에피소드는 집에 관한 따뜻한 관점의 한 갈래를 마주하게 한다. 평수나 크기로만 말해지는 주거지가 아닌 동네라는 의미로 거주하고 생활했던 곳의 생활정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의 메모, 깨끗한 이사 정리로 입주 청소비를 아낄 수 있고 그런 기분을 전해주고 싶다고 탐방했던 곳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인터뷰라서 감동이 더했다.

전월세 집이라도 사는 동안은 내가 거주하므로 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듯 하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짚은 것이 아닐까?
벽돌로 쌓은 집과 지푸라기로 엮은 집편의 논의처럼 늑대집만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의 집은 지푸라기 집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 들어온다. 집안이든 밖이든 안전할 권리가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의 흐름은 그저 집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느낀다.

217~218쪽
도시는 거름망으로 걸러진 사람들끼리 사는 곳이 아니다. 도저히 서로 겹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것을 억지로 구분하고 나누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상한 형태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다름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다름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성별은 같지만 국적은 달라, 나는 너와 언어는 같지만 피부색은 달라... 이렇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협소한지 가늠하게 할 뿐이다.
‘언어’라는 단어를 알았을때, ‘자가 주거’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성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다르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감각’을 체화하는 일이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 외 1명 지음
다산북스 펴냄

읽었어요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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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어느덧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50대의 그들은 강릉 여행을 통해 각자의 삶에 대한 겹치는 부분과 여전히 가려졌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동갑 혹은 같은 또래라는 동질성의 키워드로 들어온 소설의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이 20대를 지나 50대를 살아왔던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강릉에서, 이곳이 아닌 여행지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여행지일까? 일탈 같기도 하면서 일탈이지 못한 중년이 된 3명의 대학 동창의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난주, 정은, 미경.
난주는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정은은 동창인 남편이 코로나로 인하여 퇴직 후 오픈했던 키즈카페의 폐업으로 경제적 파산에 이른 상태로 빚을 갚기 위한 생업전선에서 시달리며 살고 있다.
미경은 아픈 엄마를 홀로 돌보면서 직장인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녹록지 않다. 오랜 친구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공유하거나 말한 이야기들이 각각이다.

난주의 빈둥지증후군, 남아도는 시간의 공허감, 여성으로서의 성적 박탈감.
정은의 경제적 파탄, 생활고, 빚투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적 상황. 요실금으로 인한 수치심.
미경의 간병 돌봄에 혼자 고립감 속에 지나가는 시간들, 관계들.

세 명의 인물들의 서사를 읽다 보면 50대에 이른 삶의 모습들이 빛나지도 안정되지도 못함을 본다. 나름 노력하면서 시절을 살아온 왔는데, 어쩌다가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절에 충실했건만,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것일까!

가장 측은지심이 느껴진 인물은 미경이다. 동성 연인의 결혼으로 관계가 정리되고, 어머니와의 간병 생활이 시작되고, 자매인 언니의 사라짐, 독박 간병의 고립무원 같은 생활로 이어진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미경에게는 가족은 있지만 가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하지 않을 때 혼자가 되는 건 별로였다.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여야 혼자라는 사실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이 그립지 않았다. 그저 그리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난주가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일시적 관계의 단절 이후 기다려준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장면이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된다.
난주는 입사라는 사회생활 없이 바로 결혼과 출산, 육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활 패턴은 많은 관계들의 정리와 변화가 오는 시기다. 그때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느껴지던 고마움과 왠지 모를 어깃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정은은 난주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의 안락한 삶이라고 자신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빈둥지증후군과 여성성의 상실로 허한 난주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 파산에 이른 정은이나, 독박 간병의 미경보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인물들은 다 각자의 행과 불행을 지고 오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여행지가 강릉인 이유는 각자의 사연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강릉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가 강릉과 연결되면서 그녀들의 삶과 포개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그런데 오십대를 앞두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꾸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50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았는데, 남은 시간마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헛헛했다.

오십이 된다는 것 소설의 문장처럼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은 시간을 그냥 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늙음을 이제 삶의 중심부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십을 앞두고 함께 할 친구들이 있고, 나눌 서사가 있다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가 어떤 삶이었을지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삶을 안도하면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읽었어요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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