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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속으로 (언니에게 부치는 편지)의 표지 이미지

경찰관속으로

원도 지음
이후진프레스 펴냄

읽었어요
총 3장으로 구성된 현직 경찰관의 직업 에세이 및 사회비판 에세이.

은유 작가의 책이었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책에 대한 추천으로 리스트 업을 해놓았는데, 새해 독서모임의 첫 책으로 읽게 되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분량의 책으로, 언니에게 부치는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작가가 일기로 썼던 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경찰관이라는 정형화된 사람의 말과 글이 아니라 여성이면서 현직 경찰관으로, 경찰 공무원도 회사원이라는 문장들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직업관과 의식들을 보게 되었다.

1장 산 사람 2장 죽은 사람 3장 남은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산 사람
양치기 소녀중에서
솔직히 나도 같은 마음이야, 언니. 어린 나이에 나쁜 것만 배우고 다니는데 제대로 된 인간이 되겠어? 그런데, 그래도, 인간이 안 돼도 괜찮으니까, 그런 식으로 죽지는 마라. 너에게 주어진 목숨 오래오래 술주정하면서 잘 유지해라. 주어진 명만큼 건강하게 살다 가라. 앞으로 허위 신고는 안 하면 좋겠고, 악의적으로 허위 신고를 지속할 경우 형사처벌도 할 거지만, 네가 언제 어디서 신고를 해도 나는 또다시 너를 발 벗고 찾아 나설 거다. 그러니까 부디 잘 살아라. 이를 꽉 물며 되뇌었지. 그리고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살길 바라면서.

; 어쩌면 허위 신고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시켜놓은 칼국수가 다 불어 터져서 먹지 못한 일화로 연결된 이 에피소드는 ‘그런데, 그래도,’라는 접속사 다음의 문장들에서 저자의 직업윤리와 인간적 갈등이 함께 드러나는 지점이다. 혹여나 사건이나 시체로 발견될까 두려워서 미치도록 최선을 다해 수색했지만, 끝내 허탕으로 끝나고 배달된 칼국수를 먹지 못했다는 전언으로 끝난다. 나라면 어땠을까 견주어 보면 저자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까. 허탕은 싫지만 신고자가 최악의 상태에 치닫는 상황은 아니었으면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

말로 중에서
법은 문지방을 넘을 수 없다는 말로 ‘그래도 가족이잖아’ 따위의 말로, 가정 안에서 일어난 명백한 범죄 상황을 간단히 정리하는 게 더 이상 허용돼선 안돼. 우리는 그런 말을 그만두고 가정폭력 피해자, 특히 아이들이 받을 상처를 해결해 주어야만 해. 그것이 아이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덥썩 미래를 맡겨버린 어른들이 해야 할 책임이니까.

; 어른들의 가족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인 대부분 부모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현장에서 본 제일 약자고 소외된 아이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선택한 삶이 아닌데 폭력의 삶으로 던져진 아이들의 어떻게 제대로 성장해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덤덤한 듯하지만 놓치지 않는 시선을 통해서 함께 생각해 본다. 연대라는 것, 공동체가 어떻게 굴러가야 하는지, 또한 시스템의 오류 속에서도 타인에 대한 현장에서의 관점과 태도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당신이라는 존재 중에서
언니, 그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정말 아내로, 한 명의 사람으로 대했다면 한국말부터 배우도록 돕지 않았을까? 한국에서 살게 됐으면 말을 할 줄 알아야 아프면 병원에 가고, 배가 고프면 식당에 가고, 급하면 택시도 타고 할 거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이 평생 캄캄하게 글자 하나 읽지 못하도록 살게 내버려 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건 어느 형태로 봐서도 사랑이 아닌데.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는데.

“나 ... 노력했어... 남편...”이라고 하시더라. 내가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슬픈 세 단어였어.

; 결혼이주로 한국에 온 여성이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한 신고 현장에서 본 상황을 쓴 글이다. 농촌으로 결혼을 통해 온 동남아 여성들의 삶이라는 것이 학대와 폭력, 매매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다큐나 시골을 배경으로 한 결혼 이민여성과 남성의 예능을 방송을 통해서 볼 때도, 결혼 이주 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인식이 화면 밖으로도 전해졌다. 작가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 사회에서 적응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말을 배우지 못한 채, 글을 익히지 못한 채 타국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건지. 매매혼이라고 느낀 건 그래서 그렇다. 돈을 주고 사 온 노동력과 성욕을 해소하는 물건 같은 존재. 그런 인식이 나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확인된다는 점 또한 씁쓸한 일이다.
가장 슬픈 세 단어라는 마지막 문장이 그래서 더 슬픈 왜곡된 결혼이주 여성의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천원짜리 인생 중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죄를 짓지 않으며 자신이 쓸 수 있는 능력으로 버는 돈의 가치는 ‘천한 직업’ 정도의 천한 말로 폄하할 수 없음을, 삶의 현장 한 가운데에 놓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거야.

좋은 차를 타고 다녀도 그 차에서 나오는 매연만큼의 더러움을 선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 위를 전전해도 고고한 양심과 태도까지 길 위에 두고 다니진 않았던 사람이 있었어.

;택시 기사와의 일화를 통해서 귀천에 대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좋은 책을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아닌 듯, 일에 있어서 천하고 귀함의 기준이나 구별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누군가에게 천원짜리 인생이라고 단언하듯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강늡때기 중에서
교육이 주는 힘은 알 수 없어도, 교육이 왜 존재하는지 알 것 같던 밤이었어. 적어도 세상을 깜깜하게만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할 수 있는 말이 많아지고 볼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발걸음을 옮길 곳이 넓어지도록 하기 위한 원동력. 결국 민들레 홀씨를 날려주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를 멀리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뒤에서 받쳐주는 바람과 같은 역할. 그게 교육의 중요성이며 존재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어.
언니, 언니라도 알아줬으면 해. 아는 것을 넘어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얼굴이 네모난 편인, ‘강늡때기’라는 이름을 가진 할머니의 존재를 말이야.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다. 이른바 무적자 출생자라는 할머니의 삶을 알게 되면서 교육에 대한 작가의 견해에 대해서 이런 상황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발화하는 자세가 현재의 여성들의 삶의 태도의 경지를 보았다고나 할까.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교육에 대한 인식이 슬픈 현실에서, 타인의 슬픔을 연민으로만 끝나지 않는 사고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진폭이 보인다. 지식이, 앎이, 교육이 결코 자랑하거나 젠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지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어쩌면 너무 진부한, 그러나 진부하지만은 않는 교육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2장 죽은 사람

나는 사냥개나 미친개가 아니다 중에서
잊혔고, 잊히고 있는 수많은 현장 영웅들과 지금 이 시각에도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경찰관들. 하늘의 별을 다 헤아린대도 현장 영웅들의 숫자는 결코 헤아릴 수 없을 텐데, 그 사람들 모두 미친개였으며 몽둥이로 다스려야만 하는 존재였던 걸까, 언니. 경찰청 인터넷 사이트의 ‘순직경찰관추모’웹페이지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수많은 순직 경찰관은 무얼 위해서 죽었던 걸까.

나는, 우리는, 사냥개나 미친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찰관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나와 내 동료, 선배, 후배들의 최종 목적지가 죽음이 아니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 업무 중 죽음을 맞이했는데, 순직이 인정되지 않아서 유가족이 직접 증명해야 하는 시스템인 곳에서 자신의 업무를 제대로 잘 수행해 낼 수 있을까? 경찰관의 공권력이 공권력으로서의 정당한 수행이나 수용이 되지 않을 때, 그 조직의 조직원을 어떤 마음이 들까? 작가는 경찰관으로서 느낀 현장의 불합리나 허점을 말하지만, 꼭 경찰관이 아닐지라도 이런 시스템의 허점과 불합리는 꽤 자주 마주치지 않는가. 경찰 공무원이라는 기대와 요구만 있을 뿐, 그들의 수행능력과 현실에서의 오는 갭과 허점은 보지 못했던 게 더 많다. 비난은 쉽지만, 잘못된 것에 대한 지적뿐만 아니라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지켜보고 확인해 보아야 하지 않은가. 잘못된 관행이나 절차도 시정되어 안착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뿐더러 작가는 경찰관 역시 회사원이라는 말로 경찰관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경찰 공무원이라는 이름 아래 희생과 봉사를 당연한 것으로 사회적 인식이 있다는 걸 지적한다.
경찰이기 전에 사람이고, 사람이라는 인식 아래 경찰관으로서의 정체성이 함께 성립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3장 남은 사람

그들이라는 파편 중에서
민원이라는, 그들이 던진 말의 파편에 맞은 나는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지만 경찰이라는 이유로, 세금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이유로 아프다는 소리를 낼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했어. 그들은 자신의 혀가 날카로운 칼인 줄도 모르고 나에게 휘둘렀고, 난 그 칼을 능숙하게 받아낼 실력도, 갖춰 입은 갑옷도 없어서 무척이나 많이 베였어. 언니, 누군가는 경찰 월급에 욕먹는 값이 포함되어 있다고들 해.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억대 연봉자가 아닐까? 어쩌면 웬만한 기업의 순이익만큼 벌지도 몰라.

;공무원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라고 할까. 내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으니까 이 정도는 해도 돼 라는 갑질의 행태들은 사람에 대한 생각, 존중이 배제된 채 대하는 태도나 말들이다. 가장 힘든 업무가 민원인 상대라는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 공무원인 친구도 가장 싫고 어려운 업무가 민원 업무라고 한다. 소위 진상 혹은 갑질 민원인은 서로의 입장이 바뀌는 순간이 오면 생각이 좀 달라질까?
내가 너에게 돈을 주니 이런 무례도 된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어느 직종에서도 다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욕바지로서의 연봉은 억대 연봉자가 되어야 한다는 문장에서 얼마나 많은 민원에 시달리는지가 짐작된다.

비겁함을 배운다 중에서
이런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비겁함을 택한 나의 동료, 선배, 그리고 나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참 괴로워. 현장에서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주춤하는 발걸음, 회피하게 되는 시선을 언제쯤 벗어던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경찰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비겁함이야. 구조가 바뀌어야 해. 사회가, 법이 나서서 경찰관의 얼굴에 쓰인 비겁함이란 가면을 하나씩 벗겨줘야만 해. 부디 피해자의 얼굴에서 눈물을 거두고 미소를 선물해 줄 수 있는 경찰관이 되도록, 나의 후배 경찰관들은 비겁함이란 태도를 배울 일이 없도록 도와줘. 그게 비겁한 나의 비겁한 부탁이야.

; 혼자서는 바꿀 수 없는 조직 구조의 문제점을 피해자의 얼굴을 통해서 또렷이 깨닫는 작가는 비겁함이라 키워드를 내세워 꽤 통렬하게 전한다. 몸담고 있는 조직의 문제점에 쓴소리를 한다는 건 아직은 애정이 있기에,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을 소리 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맺는 글중에서

때때로 과거를 정리해 주어야 앞으로 채워나갈 현재도 더 많아진다는 걸.

;아직은 젊음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작가의 마음결과 생각들, 삶의 태도들이 우울하고 힘든 현실 속에서도 대단한 희망은 아닐지라도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삶에 대한 성장을 놓지 않는 모습이 경찰관으로서의 직업적 딜레마와 인권을 인정받고 일하고 싶은 젊은 세대의 에세이로 의미있게 읽었다. 자신의 조직의 문제를 비난 혹은 비판 이후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의 구조의 문제를 개선되기 바라는 마음이 전해진다. 또한 앞으로를 나아가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맺는 글에서 낙관의 한 빛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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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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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방학 숙제 책 중 하나였다. 여전히 독서록 쓰기를 몹시도 귀찮아하지만, 엄마도 읽고 같이 반응해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으로 읽고 아이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읽어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관계’라는 점에 생각이 맴돌았다. 코로나19를 거쳐왔기에 그런 까닭일까! 유독 ‘관계’라는 키워드가 많이 들어온다. 점점 살면서 타인과 또 나 자신과의 관계에 생각이 많아지고 변한다.

소설의 화자 류담은 타인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부모님의 교통사고 이후로 얻게 된다. 원하지 않는 능력을 얻고, 그 능력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열었던 친구의 ‘죽음의 디데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디데이의 초록색 링 숫자대로 죽는다. 이 사건 이후로 담은 자발적 아싸가 된다. 관계를 맺는 이의 '죽음의 디데이'가 보이게 된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타인과 다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초, 중교 시절을 지나 고등생이 된 담에게 같은 반 반장 소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선다. 학교에서도 이미 자발적 아싸로 인식되는 담에게 미소는 반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같은 조별 과제를 하게 되면서 담의 일상에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담과 같은 능력을, 같은 불행의 대가로 얻게 된 털보 아저씨 상두를 만나면서 담의 삶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털보 아저씨 상두가 불행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능력으로 무당 같은 업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의 단축된 수명을 바꾸는 방법을 알게 되고 도우면서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담과의 만남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를 속을 헤쳐 나가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설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같이 읽는 이들에겐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물꼬가 된다. 타인을 위해서 얼마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희생할 수 있는 이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일 때 가능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들.

이야기의 흐름이나 각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연결되고 교차되는 구조들이 이야기 속으로 계속 빠져들게 한다. 복선과 암시가 있어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지도 가늠이 되긴 했다. 유일한 어른으로 나오는 인물 털보 아저씨 상두는 담과 ‘친구’가 되어서 혈연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조력자 혹은 동반자로서, 어른에 대한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고 필요한 현실적 모습으로 등장해서 좋았다.

담이 미소와의 관계가 변화되는 일련의 일들은 작은 인연의 조각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듯, 관계의 그림 또는 깊이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서 새삼 대면의 세계가 갖는 힘을 새삼 느낀다.

담이 미소와 우정에서 설레는 첫사랑의 관계로, 그리고 목숨을 나누어주고 싶은 존재로 변화되는 관계의 변화는 담 역시 엄마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라는 걸 깨닫고 그 덤의 삶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게 나누려 한다는 흐름이 인간의 성선설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담을 싫어하던 친구와의 오해 혹은 묶은 감정들이 해소되는 사건 역시 타인의 선의 혹은 본능적인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깨닫게 되는 담과의 대척점에 있던 소현의 변화도 그런 부분에서 이해가 된다. 담과 소현이 처음 맺는 관계에서 오는 서투름과 오해가 싫은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과 해소의 과정 모두 이 소설의 주제라고 느꼈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해준다.

청소년 소설다운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 혹은 성장과 화해,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열린 결말.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이르는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 변화하는 담의 모습이 아픈 모습만 있지 않기에 엄마 마음에는 안도했다.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게 완결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천진난만하지도 하고 그렇다고 상처에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체된 상태로 끝나지 않기에, 성장과 고난 또는 고통은 한묶음처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너에게 남은 시간 죽음의 디데이

이혜린 지음
풀빛 펴냄

읽었어요
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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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부제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이 제목의 역설과 잘 어울렸다. 흥미롭게 읽었다.
건축가인 두 사람이 나뉘어서 ‘집’에 관한 개인적 시선에서부터 인문사회적인 사유로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일견 30대들의 전월세의 이사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계속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소유하게 될 집에 대한 의미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는 이윤석이 에필로그는 김정민이 썼는데, 도입부의 글과 마무리의 글이 책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여는 맛과 마무리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1장 솔직하게 만들어가는 집
'여지의 여지 '편에서 공간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스며들듯 수긍하게 된다.
넓은 평수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공간의 여지가 그곳에서 사는 이의 생각과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영향으로 더 긍정적이고 더 창의적으로 사고가 넓어질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에 대한 논의들을 읽다 보면 자본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 해석한 공간의 ‘최소성’은 생활하는 이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다. 간혹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이 제품을 디자인 한 이는 이런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나 동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실제 사용하는 경험치가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불편하거나 참신해지는 상반되는 경우 모두 다.

17쪽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삶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 시대라는 도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삶은 과정일 뿐이라 여기고, 과정이 된 삶들은 아무렇게나 최소로 방치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념이 다시 정의되고 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양은 서서히 청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고 있다. 박제된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정붙이고 녹붙이고'편의 에피소드도 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공간과 물건에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의 역사를 쌓아가는 모습들이 새삼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취향’에 대한 김정민의 생각은 취향조차도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어 평가하려 하지만, 자기의 솔직함과 생활감이 있는 인테리어가 더 좋은 취향의 인테리어라는 문장에서는 30대의 젊은 건축가의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엿본다.
두 저자는 고양이를 기른다는 점과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집과 방에 대한 생각과 지금까지의 전월세 이사 여정기를 말하고 있다. 책 집필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지인들과 관련인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집들을 탐방하면서 느끼고 접한 생각들도 실려 있다.

자신의 집이 싫다고 하면서 가는 내내 왜 ‘내 집이 싫은지’를 말하는 이를 통해서 집을 긍정하려고만 했던 이유를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 젖어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또 마주친 것은 자본주의는 소비주의이고 소비가 나를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에 살기에, 나의 소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나쁘다는 또는 별 볼일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문장에 새삼 환기하면서 동의하게 된다.

2장 셋방일지
아파트의 창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인해 계층과 사회적 구분을 읽게 된다. 동일한 크기와 효율성으로 정착한 아파트 창호의 크기의 반대편에 빌라라는 집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용의 풍경을 던져준다.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막고 보완해야 하는 빌라들. 이런 논의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읽어내고 말하고 기록하면서 건축가로서 어떤 반영과 개선을 할지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뷰’에 관한 논의에서도 자연을 담는 뷰, 경관도 특정 계층이 소유하게 되는 것의 불평등 지적한다. 녹지공간인 공원이나, 경관을 더 많은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시, 주거지 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공유하는 자연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집이라고 불리는 많은 집들이 매트리스만으로 인식되는 저자의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을 제시하면서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최소의 집에서는 수면과 화장실 사용만이 가능하며 나머지 다른 것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은 축소 또는 축약된 채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점들을 지적한다. 빨래방과 스타벅스의 방문이 일상이 되는 젊은 층의 생활 문화도 이런 주거 형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빨래를 널고 차를 마시고 화분을 키운 베란다의 공간을 갖기 힘든 구조의 주거 형태들이 가져온 공유 공간의 외주화를 만들었다.
‘안행복주택’편지글에서는 정책 입안자의 태도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키워드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책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운용과 실용이 필요한 지점을 집는다.

3장 일상의 발명가들
식탁테리어라는 말은 아마도 저자가 만든 단어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혼자 살면서 시작된 식탁인테리어로 식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바뀌거나 모으고,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2장에서 언급되었던 주방 공간의 축약과 축소가 요리라는 행위를 멀게 하고 간단하게 데워먹는 간편식의 식생활을 유도한다. ‘감히, 요리를 해먹어.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라는 거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요리는 개인 취향이다. 선호 여부에 따라서 즐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주거의 구조는 사유의, 사고의 폭도 움츠러들게 한다.
반려동물을 기르기도 하고 실제로 기르는 이들의 집을 탐방한 경험은 건축가로서 집을 설계할 때, 기존의 인간만을 기본으로 한 설계에서 한 걸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현성의 싱크로율은 아직 낮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현장성이 넓어질 때 주거에 대한 집에 대한 의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4장 우리를 담을 집
어차피로 만든 세상편에서의 에피소드는 집에 관한 따뜻한 관점의 한 갈래를 마주하게 한다. 평수나 크기로만 말해지는 주거지가 아닌 동네라는 의미로 거주하고 생활했던 곳의 생활정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의 메모, 깨끗한 이사 정리로 입주 청소비를 아낄 수 있고 그런 기분을 전해주고 싶다고 탐방했던 곳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인터뷰라서 감동이 더했다.

전월세 집이라도 사는 동안은 내가 거주하므로 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듯 하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짚은 것이 아닐까?
벽돌로 쌓은 집과 지푸라기로 엮은 집편의 논의처럼 늑대집만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의 집은 지푸라기 집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 들어온다. 집안이든 밖이든 안전할 권리가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의 흐름은 그저 집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느낀다.

217~218쪽
도시는 거름망으로 걸러진 사람들끼리 사는 곳이 아니다. 도저히 서로 겹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것을 억지로 구분하고 나누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상한 형태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다름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다름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성별은 같지만 국적은 달라, 나는 너와 언어는 같지만 피부색은 달라... 이렇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협소한지 가늠하게 할 뿐이다.
‘언어’라는 단어를 알았을때, ‘자가 주거’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성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다르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감각’을 체화하는 일이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 외 1명 지음
다산북스 펴냄

읽었어요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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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어느덧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50대의 그들은 강릉 여행을 통해 각자의 삶에 대한 겹치는 부분과 여전히 가려졌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동갑 혹은 같은 또래라는 동질성의 키워드로 들어온 소설의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이 20대를 지나 50대를 살아왔던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강릉에서, 이곳이 아닌 여행지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여행지일까? 일탈 같기도 하면서 일탈이지 못한 중년이 된 3명의 대학 동창의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난주, 정은, 미경.
난주는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정은은 동창인 남편이 코로나로 인하여 퇴직 후 오픈했던 키즈카페의 폐업으로 경제적 파산에 이른 상태로 빚을 갚기 위한 생업전선에서 시달리며 살고 있다.
미경은 아픈 엄마를 홀로 돌보면서 직장인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녹록지 않다. 오랜 친구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공유하거나 말한 이야기들이 각각이다.

난주의 빈둥지증후군, 남아도는 시간의 공허감, 여성으로서의 성적 박탈감.
정은의 경제적 파탄, 생활고, 빚투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적 상황. 요실금으로 인한 수치심.
미경의 간병 돌봄에 혼자 고립감 속에 지나가는 시간들, 관계들.

세 명의 인물들의 서사를 읽다 보면 50대에 이른 삶의 모습들이 빛나지도 안정되지도 못함을 본다. 나름 노력하면서 시절을 살아온 왔는데, 어쩌다가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절에 충실했건만,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것일까!

가장 측은지심이 느껴진 인물은 미경이다. 동성 연인의 결혼으로 관계가 정리되고, 어머니와의 간병 생활이 시작되고, 자매인 언니의 사라짐, 독박 간병의 고립무원 같은 생활로 이어진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미경에게는 가족은 있지만 가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하지 않을 때 혼자가 되는 건 별로였다.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여야 혼자라는 사실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이 그립지 않았다. 그저 그리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난주가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일시적 관계의 단절 이후 기다려준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장면이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된다.
난주는 입사라는 사회생활 없이 바로 결혼과 출산, 육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활 패턴은 많은 관계들의 정리와 변화가 오는 시기다. 그때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느껴지던 고마움과 왠지 모를 어깃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정은은 난주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의 안락한 삶이라고 자신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빈둥지증후군과 여성성의 상실로 허한 난주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 파산에 이른 정은이나, 독박 간병의 미경보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인물들은 다 각자의 행과 불행을 지고 오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여행지가 강릉인 이유는 각자의 사연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강릉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가 강릉과 연결되면서 그녀들의 삶과 포개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그런데 오십대를 앞두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꾸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50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았는데, 남은 시간마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헛헛했다.

오십이 된다는 것 소설의 문장처럼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은 시간을 그냥 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늙음을 이제 삶의 중심부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십을 앞두고 함께 할 친구들이 있고, 나눌 서사가 있다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가 어떤 삶이었을지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삶을 안도하면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읽었어요
4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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