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벌레식 문답**
p.36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 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p.37 나는 주문을 외우듯 다시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돌아간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은 의젓한 방어의 멘트도 아니고,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고 윽박지르는 강요도 아닐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실버들 천만사**
p.79 사랑해서 얻는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소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
**하늘 높이 아름답게**
p. 103 몸이란 게 움직이자 달래면 움직여져요.
p. 114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p.199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 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기억의 왈츠**
p.241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었따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p.242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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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삶은 저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고, 그 길을 가려는 시도이며, 하나의 좁은 길에 대한 암시이다. 일찍이 그 누구도 완벽하게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저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세계, 나의 즐겁고 행복한 삶이 어떻게 과거가 되고 어떻게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지 얼어붙는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내가 저 바깥의 어둡고 낯선 곳에 자양분을 빨아들일 새로운 뿌리를 어떻게 단단하고 깊게 내리는지 감지해야 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죽음을 맛보았다. 죽음의 맛은 씁쓸하다. 죽음은 탄생이며 섬뜩한 갱생에 대한 두려움이고 공포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불행에 빠짐으로써 아버지보다,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높이 있다고 착각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이 세상에 결코 없다는 사실을!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하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 두면 좋아.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힘겹게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희열과 공포, 남자와 여자가 뒤섞여 있었으며, 더없이 신성한 것과 추악한 것이 한데 얽혀 있었고, 깊은 죄가 더없이 섬세한 무죄를 가르며 움찔했다.
그들이 그 가능성을 예감하고 또 어느 정도 의식하는 법을 배워야만 비로소 그 가능성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지요.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스스로 타조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 돼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요.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 법이오.
나는 내 꿈속에서 살고 있는데, 네가 그걸 느꼈나 보지. 다른 사람들도 꿈속에서 살지만, 자기 자신의 꿈속에서 살지는 않아. 그게 다른 점이지.
누구에게나〈직분〉이 있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직분을 스스로 선택하고 규정하고 임의로 수행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여기에서 갑자기 맹렬한 불꽃처럼 나를 불태웠다.
각성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을 확고하게 다지고 결국 어디에 이르든지 간에 자신만의 길을 계속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그 한 가지 말고 다른 의무는 결코, 결코, 결코 없었다.
그 자신의 책무는 임의의 운명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어 그 운명을 자신 안에서 흐트러짐 없이 끝까지 살아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꿈은 없어요. 어떤 꿈이든 새로운 꿈에 밀려나기 마련이죠. 어떤 꿈도 붙잡으려고 해서는 안 돼요.
우리의 노력은 점점 더 완벽하게 깨어 있음을 지향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추구는 자신들의 의견, 자신들의 이상과 의무, 자신들의 삶과 행복을 집단의 것에 점점 더 단단히 옭아매는 것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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