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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저항 (지배하는 ‘피해자’들,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의 표지 이미지

타락한 저항

이라영 지음
교유서가 펴냄

읽었어요
책 속의 문장들


들어가며: 진지충의 탄생
9쪽
이러한 진지함이 부정될 때 유머의 질도 하락하기 마련이다. 비판적 성찰 없이 타인의 수치심을 재료 삼은 유머(라는 이름의 차별 발언)에 익숙해진다. 진지함에 낙인을 찍는 언어의 증가는 생각하는 사람을 향한 조롱과 경멸이 점점 만연해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진지함에 대한 불편함을 우리는 불편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지함이 위선이 되변 의구심과 회의를 표출하기 어려워진다.

13쪽_ 마르쿠제에 따르면 "일차원적 사유는 정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과 대량 정보의 조달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정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여가와 놀이가 일상에 들어왔지만, 소비로 비판 욕구를 없애버리는 체제가 일차원적 인간을 양성한다. 이 '기만적 자유'속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사유의 습관'이 점차 낯설어진다.

14쪽_ 그러나 경제적으로 말하고 경제적으로 읽다가 생각도 경제적으로 하게 생겼다. 요약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한 후 새롭게 소화시킨 독자적인 결과물이어야 한다. 다른 이가 해 주는 요약은 전체 맥락을 누락하기에 사안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기 쉽다.

16쪽_ 정보보다는 화두가 필요하다. 화두는 질문의 근원지다. 화두가 있는 삶을 산다는 게 쉬운 노릇은 아니다. 어쩌면 이 빠름과 요약을 권하는 시대에 부응하지 않으려면 더욱 불친절하고 느리게 생각하는 태도를 고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제 생각의 지도를 스스로 작성하면 길을 잃지 않는다.

24쪽_ 정치적 진보와 문화적 자유는 누구를 기준으로 한 진보와 자유일까. 이 '지배하는 피해자'의 시각이 쉽게 '보편'의 위치를 차지해 여러 관점과 목소리를 깔아 뭉갠다. 보편과 객관, 중립의 위치에서 자신이 발화한다고 생각할 때 타인에 대한 지적, 윤리적 폭력은 쉽게 정당화된다.

; 글의 논리가 계속 따라가면서 읽게 한다. 무슨 말을 어떤 근거를 들어서 끌고 갈지가 궁금해진다. 또한 읽으면서 수긍할 수 있는 글도 있고, 이런 관점과 사유가 있어서 이런 논리를 펼친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했던 부분의 문장을 옮겼다. 진지충에 대한 사유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는 이 책의 성격과 논의될 주제에 대한 명확한 저자의 관점이 보여서 읽기의 집중성이 더 좋았다.


1장 블랙리스트와 저항
54쪽
자신이 맡은 업무에서 일어난 과실이 그의 성별로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이때 성별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으로 '남성이 아닌'몸에 대한 조롱을 낳는다. 여기서 성별의 자리에 다른 개념을 넣어보자. 장애인이 정치를 했는데 실정을 했을 때 그의 장애가 있는 몸으로 조롱받아야 할까. 박근혜를 비판하다는 그림들은 출산부터 누드까지 그의 성별에 집착했다. 여성을 몸으로 비난하지 않고서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 이 장을 읽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자리에 최고층에 있을 때 다루어지거나 평가받는 이중의 시선과 사고를 발견했다. 가장 의식이 번쩍하게 되었던 부분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실정과 능력 없음으로 평가돼야 할 문제에서 '여성'으로만 평가와 대가를 받는다는 것을.


2장 <나꼼수>와 무학의 통찰
94쪽_ 반지성주의자는 사유보다 감각에 의지한다. 그것이 솔직함으로 수렴된다. 사유가 고고한 먹물의 허세라면 감각은 때묻지 않은 잡놈의 순수함으로 여겨진다. 이 순수함이 곧 인간적이다. 자신이 느끼는 '기분'이 곧 진리다.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이들이 곧 적이다. 현상은 단순해진다.

106쪽_ 미디어 환경이 변하면서, 우리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자극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정리된 언어보다는 영상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더 크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영상은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다.

현실을 카메라가 '직접' 만나면 '진실'을 보여준다는 믿음은 카메라에 포착된 현상의 단면을 과잉 신뢰하게 만든다. 여기에 애니메이션을 덧붙여 상상의 영역을 시각화 해 보여주면 더 강렬한 진실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인상적인 논제는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와, 고김광석이 아내 서혜순을 다른 무비 저널리즘에 대한 것이다. 언론 보도로 접한 사건에 대해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이끌어 가는 사유의 폭이 닫힌 문이 아닌 여러 문들이 있고, 어떤 관점이 필요한지 개인적으로 새롭게 환기된다.


3장 메갈리아: 침묵당하기에서 교란시키기로
128쪽, 129쪽
'메갈리아'의 활동은 사라졌지만 '메갈리아'라는 이름은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수단이며 여성의 입을 틀어막는 검열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메갈'은 어느새 낙인의 이름이 되었다. '메갈'은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세상을 해석하든, 변화시키든,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진짜인지를 두고 겨루는 인정투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좌파를 감별하는 좌파 감별사, 페미니스트를 감별하는 진짜 페미니스트.

나름 기본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겉으로는 페미니즘 자체를 결코 부정하진 않는다. 대신 페미니즘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하려고 애를 쓴다. 이들은 프랑스의 마린 르펜처럼 극우의 얼굴 한 '페미니스트'를 부정적 사례로 언급하기 좋아한다. 그리고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강조하며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145쪽_ 젠더 문제를 두고 '본능'을 옹호하며, 자연법칙을 내세울 때가 많다. 운동과 지성의 흐름을 거부한 채 '남성의 본능'에 갇혀 알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성차별을 인식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애 아니면 개'가 된다. 그래서 본능, 욕망, 날것, 야성, 사냥꾼이라는 개념을 자주 들먹인다. 본능을 옹호하는 이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원시'로 돌아가 무지를 선택한다. 앎보다는 권력 유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150쪽_ '이해'는 언제나 약자의 몫으로 남는다. 성소수자는 이성애 사회를 이해해야 하며, 여성은 가부장제를 이해해야 하며,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이해해야 한다. 반면 이해받는 이들은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을 휘두른다.

162쪽_ 서사의 권한이 없다는 것은 제 삶에 대해, 제 생각에 대해 독자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남성 사회는 여성의 생각이나 의견, 삶에 대해 알려고 하지는 않지만 여성을 정의하려는 의지는 강하다. 여성은 늘 남성과의 관계속에서만 정의 '되는' 존재다.

; 넥슨 성우 교체 사건이라는 사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사건의 내용대로라면 사상검증을 하는 것인데, 저자처럼 정교한 논리를 내세워 발화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남성이 남성정당이나 남성만이 하는 취미나 활동 관련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업무에서 배제된다는 것인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착잡함과 억압이 느껴진다.
얼마 전에 뉴스에서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생의 머리 스타일이 짧다고 남성혐오자냐며 손님인 남성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걸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럼 남자가 긴 머리를 하면 여성혐오자이고 그런 이유로 여성에게 폭력을 당해야 한다는 건가. 그 뉴스에서 짧게 언급되고 지나간 사건이었지만, 순간적으로 굉장히 불쾌했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부분이 아닌데, 여전히 여성을 복종, 지배하려는 남성의 의식이 사회적으로 발현이 되는구나 생각이 든다.

나오며: 생각하는 인간에 대하여
189쪽_ 나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없을 때 공감은 때로 폭력의 얼굴로 등장한다. 때로 공감하고 연대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슬퍼하는 나, 고통스러운 사안 앞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말하며 결국 자신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비극을 자신의 정의감의 매개로 삼는 행위는 일종의 속임수다. 정치 예능이나 무비 저널리즘 형식은 이러한 무제를 꾸준히 드러냈다.

192,193쪽
증오는 반지성과 연대한다. 가상의 적의를 부추긴다. 왜곡된 평등주의는 뒤섞임을 인정하지 않고 분리와 제거를 통한 '정상화'를 추구한다. 비판을 진압하고, 진영 논리에 기대어 증오와 혐오를 확산하면서 이를 대의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한다.

반지성주의라는 하나의 사회현상을 짚어보면서 많은 문제를 언급했지만, 진보의 허위와 모순을 인식하되 깊은 회의와 냉소, 환멸을 꾸준히 경계한다.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나와 타자의 관계를 고민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질문이 위험하지 않은 사회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억압은 꾸준히 기록되고 있다.

195쪽_ 나의 일상과 사회구조는 연결되어 있다. 구조의 문제가 개인에게 온전히 면죄부를 주지도 않지만, 진짜 구조의 문제가 개인의 일탈로 왜곡되어서도 안된다.

;천천히 씹어서 먹어야 맛이 제대로 음미되고, 맛의 본연을 알게 된다. 이 책도 그런 류의 책이라고 생각된다. 인스턴트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게 아니라 맛을 조금씩 보면서 어떨 때는 꿀꺽 넘어가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분은 이런 맛이 있었던가 싶어서 주춤거리는 부분도 있다.
키워드로 말하자면 알려고 하지 않는 반지성주의가 혐오와 차별의 사회를 만든다. 소수자들에 대한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억압의 사회다. 나의 일상은 내가 살고 있는 사회구조와 연결되어 있고, 그 사회 구조의 모순에 눈 감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또한 나의 사유와 행동만이 옳다는 자기 아집에 빠져서도 안된다. 나에게는 꿀떡 삼켜 버릴 수 없는 맛이었다. 주춤거리면서도 내뱉지 않고 씹어서 삼키고, 그 삼킨 후에 느껴지는 맛의 온전함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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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juyeonxm0c

아이의 방학 숙제 책 중 하나였다. 여전히 독서록 쓰기를 몹시도 귀찮아하지만, 엄마도 읽고 같이 반응해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으로 읽고 아이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읽어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관계’라는 점에 생각이 맴돌았다. 코로나19를 거쳐왔기에 그런 까닭일까! 유독 ‘관계’라는 키워드가 많이 들어온다. 점점 살면서 타인과 또 나 자신과의 관계에 생각이 많아지고 변한다.

소설의 화자 류담은 타인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부모님의 교통사고 이후로 얻게 된다. 원하지 않는 능력을 얻고, 그 능력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열었던 친구의 ‘죽음의 디데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디데이의 초록색 링 숫자대로 죽는다. 이 사건 이후로 담은 자발적 아싸가 된다. 관계를 맺는 이의 '죽음의 디데이'가 보이게 된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타인과 다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초, 중교 시절을 지나 고등생이 된 담에게 같은 반 반장 소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선다. 학교에서도 이미 자발적 아싸로 인식되는 담에게 미소는 반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같은 조별 과제를 하게 되면서 담의 일상에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담과 같은 능력을, 같은 불행의 대가로 얻게 된 털보 아저씨 상두를 만나면서 담의 삶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털보 아저씨 상두가 불행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능력으로 무당 같은 업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의 단축된 수명을 바꾸는 방법을 알게 되고 도우면서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담과의 만남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를 속을 헤쳐 나가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설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같이 읽는 이들에겐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물꼬가 된다. 타인을 위해서 얼마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희생할 수 있는 이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일 때 가능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들.

이야기의 흐름이나 각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연결되고 교차되는 구조들이 이야기 속으로 계속 빠져들게 한다. 복선과 암시가 있어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지도 가늠이 되긴 했다. 유일한 어른으로 나오는 인물 털보 아저씨 상두는 담과 ‘친구’가 되어서 혈연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조력자 혹은 동반자로서, 어른에 대한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고 필요한 현실적 모습으로 등장해서 좋았다.

담이 미소와의 관계가 변화되는 일련의 일들은 작은 인연의 조각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듯, 관계의 그림 또는 깊이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서 새삼 대면의 세계가 갖는 힘을 새삼 느낀다.

담이 미소와 우정에서 설레는 첫사랑의 관계로, 그리고 목숨을 나누어주고 싶은 존재로 변화되는 관계의 변화는 담 역시 엄마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라는 걸 깨닫고 그 덤의 삶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게 나누려 한다는 흐름이 인간의 성선설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담을 싫어하던 친구와의 오해 혹은 묶은 감정들이 해소되는 사건 역시 타인의 선의 혹은 본능적인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깨닫게 되는 담과의 대척점에 있던 소현의 변화도 그런 부분에서 이해가 된다. 담과 소현이 처음 맺는 관계에서 오는 서투름과 오해가 싫은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과 해소의 과정 모두 이 소설의 주제라고 느꼈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해준다.

청소년 소설다운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 혹은 성장과 화해,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열린 결말.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이르는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 변화하는 담의 모습이 아픈 모습만 있지 않기에 엄마 마음에는 안도했다.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게 완결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천진난만하지도 하고 그렇다고 상처에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체된 상태로 끝나지 않기에, 성장과 고난 또는 고통은 한묶음처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너에게 남은 시간 죽음의 디데이

이혜린 지음
풀빛 펴냄

읽었어요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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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부제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이 제목의 역설과 잘 어울렸다. 흥미롭게 읽었다.
건축가인 두 사람이 나뉘어서 ‘집’에 관한 개인적 시선에서부터 인문사회적인 사유로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일견 30대들의 전월세의 이사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계속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소유하게 될 집에 대한 의미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는 이윤석이 에필로그는 김정민이 썼는데, 도입부의 글과 마무리의 글이 책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여는 맛과 마무리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1장 솔직하게 만들어가는 집
'여지의 여지 '편에서 공간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스며들듯 수긍하게 된다.
넓은 평수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공간의 여지가 그곳에서 사는 이의 생각과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영향으로 더 긍정적이고 더 창의적으로 사고가 넓어질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에 대한 논의들을 읽다 보면 자본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 해석한 공간의 ‘최소성’은 생활하는 이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다. 간혹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이 제품을 디자인 한 이는 이런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나 동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실제 사용하는 경험치가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불편하거나 참신해지는 상반되는 경우 모두 다.

17쪽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삶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 시대라는 도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삶은 과정일 뿐이라 여기고, 과정이 된 삶들은 아무렇게나 최소로 방치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념이 다시 정의되고 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양은 서서히 청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고 있다. 박제된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정붙이고 녹붙이고'편의 에피소드도 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공간과 물건에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의 역사를 쌓아가는 모습들이 새삼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취향’에 대한 김정민의 생각은 취향조차도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어 평가하려 하지만, 자기의 솔직함과 생활감이 있는 인테리어가 더 좋은 취향의 인테리어라는 문장에서는 30대의 젊은 건축가의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엿본다.
두 저자는 고양이를 기른다는 점과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집과 방에 대한 생각과 지금까지의 전월세 이사 여정기를 말하고 있다. 책 집필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지인들과 관련인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집들을 탐방하면서 느끼고 접한 생각들도 실려 있다.

자신의 집이 싫다고 하면서 가는 내내 왜 ‘내 집이 싫은지’를 말하는 이를 통해서 집을 긍정하려고만 했던 이유를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 젖어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또 마주친 것은 자본주의는 소비주의이고 소비가 나를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에 살기에, 나의 소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나쁘다는 또는 별 볼일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문장에 새삼 환기하면서 동의하게 된다.

2장 셋방일지
아파트의 창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인해 계층과 사회적 구분을 읽게 된다. 동일한 크기와 효율성으로 정착한 아파트 창호의 크기의 반대편에 빌라라는 집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용의 풍경을 던져준다.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막고 보완해야 하는 빌라들. 이런 논의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읽어내고 말하고 기록하면서 건축가로서 어떤 반영과 개선을 할지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뷰’에 관한 논의에서도 자연을 담는 뷰, 경관도 특정 계층이 소유하게 되는 것의 불평등 지적한다. 녹지공간인 공원이나, 경관을 더 많은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시, 주거지 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공유하는 자연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집이라고 불리는 많은 집들이 매트리스만으로 인식되는 저자의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을 제시하면서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최소의 집에서는 수면과 화장실 사용만이 가능하며 나머지 다른 것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은 축소 또는 축약된 채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점들을 지적한다. 빨래방과 스타벅스의 방문이 일상이 되는 젊은 층의 생활 문화도 이런 주거 형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빨래를 널고 차를 마시고 화분을 키운 베란다의 공간을 갖기 힘든 구조의 주거 형태들이 가져온 공유 공간의 외주화를 만들었다.
‘안행복주택’편지글에서는 정책 입안자의 태도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키워드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책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운용과 실용이 필요한 지점을 집는다.

3장 일상의 발명가들
식탁테리어라는 말은 아마도 저자가 만든 단어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혼자 살면서 시작된 식탁인테리어로 식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바뀌거나 모으고,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2장에서 언급되었던 주방 공간의 축약과 축소가 요리라는 행위를 멀게 하고 간단하게 데워먹는 간편식의 식생활을 유도한다. ‘감히, 요리를 해먹어.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라는 거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요리는 개인 취향이다. 선호 여부에 따라서 즐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주거의 구조는 사유의, 사고의 폭도 움츠러들게 한다.
반려동물을 기르기도 하고 실제로 기르는 이들의 집을 탐방한 경험은 건축가로서 집을 설계할 때, 기존의 인간만을 기본으로 한 설계에서 한 걸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현성의 싱크로율은 아직 낮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현장성이 넓어질 때 주거에 대한 집에 대한 의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4장 우리를 담을 집
어차피로 만든 세상편에서의 에피소드는 집에 관한 따뜻한 관점의 한 갈래를 마주하게 한다. 평수나 크기로만 말해지는 주거지가 아닌 동네라는 의미로 거주하고 생활했던 곳의 생활정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의 메모, 깨끗한 이사 정리로 입주 청소비를 아낄 수 있고 그런 기분을 전해주고 싶다고 탐방했던 곳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인터뷰라서 감동이 더했다.

전월세 집이라도 사는 동안은 내가 거주하므로 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듯 하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짚은 것이 아닐까?
벽돌로 쌓은 집과 지푸라기로 엮은 집편의 논의처럼 늑대집만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의 집은 지푸라기 집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 들어온다. 집안이든 밖이든 안전할 권리가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의 흐름은 그저 집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느낀다.

217~218쪽
도시는 거름망으로 걸러진 사람들끼리 사는 곳이 아니다. 도저히 서로 겹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것을 억지로 구분하고 나누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상한 형태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다름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다름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성별은 같지만 국적은 달라, 나는 너와 언어는 같지만 피부색은 달라... 이렇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협소한지 가늠하게 할 뿐이다.
‘언어’라는 단어를 알았을때, ‘자가 주거’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성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다르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감각’을 체화하는 일이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 외 1명 지음
다산북스 펴냄

읽었어요
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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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어느덧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50대의 그들은 강릉 여행을 통해 각자의 삶에 대한 겹치는 부분과 여전히 가려졌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동갑 혹은 같은 또래라는 동질성의 키워드로 들어온 소설의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이 20대를 지나 50대를 살아왔던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강릉에서, 이곳이 아닌 여행지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여행지일까? 일탈 같기도 하면서 일탈이지 못한 중년이 된 3명의 대학 동창의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난주, 정은, 미경.
난주는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정은은 동창인 남편이 코로나로 인하여 퇴직 후 오픈했던 키즈카페의 폐업으로 경제적 파산에 이른 상태로 빚을 갚기 위한 생업전선에서 시달리며 살고 있다.
미경은 아픈 엄마를 홀로 돌보면서 직장인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녹록지 않다. 오랜 친구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공유하거나 말한 이야기들이 각각이다.

난주의 빈둥지증후군, 남아도는 시간의 공허감, 여성으로서의 성적 박탈감.
정은의 경제적 파탄, 생활고, 빚투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적 상황. 요실금으로 인한 수치심.
미경의 간병 돌봄에 혼자 고립감 속에 지나가는 시간들, 관계들.

세 명의 인물들의 서사를 읽다 보면 50대에 이른 삶의 모습들이 빛나지도 안정되지도 못함을 본다. 나름 노력하면서 시절을 살아온 왔는데, 어쩌다가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절에 충실했건만,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것일까!

가장 측은지심이 느껴진 인물은 미경이다. 동성 연인의 결혼으로 관계가 정리되고, 어머니와의 간병 생활이 시작되고, 자매인 언니의 사라짐, 독박 간병의 고립무원 같은 생활로 이어진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미경에게는 가족은 있지만 가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하지 않을 때 혼자가 되는 건 별로였다.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여야 혼자라는 사실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이 그립지 않았다. 그저 그리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난주가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일시적 관계의 단절 이후 기다려준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장면이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된다.
난주는 입사라는 사회생활 없이 바로 결혼과 출산, 육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활 패턴은 많은 관계들의 정리와 변화가 오는 시기다. 그때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느껴지던 고마움과 왠지 모를 어깃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정은은 난주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의 안락한 삶이라고 자신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빈둥지증후군과 여성성의 상실로 허한 난주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 파산에 이른 정은이나, 독박 간병의 미경보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인물들은 다 각자의 행과 불행을 지고 오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여행지가 강릉인 이유는 각자의 사연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강릉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가 강릉과 연결되면서 그녀들의 삶과 포개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그런데 오십대를 앞두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꾸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50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았는데, 남은 시간마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헛헛했다.

오십이 된다는 것 소설의 문장처럼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은 시간을 그냥 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늙음을 이제 삶의 중심부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십을 앞두고 함께 할 친구들이 있고, 나눌 서사가 있다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가 어떤 삶이었을지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삶을 안도하면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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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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