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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의 표지 이미지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이모부가 돌아가시고 하루 뒤였다.

문상가는 날, 나는 기차에서 읽을 책을 찾아 역 책방에 들렀다.

상실의 시대. 항상 인간은 무엇인가를 잃어 왔지만 그렇다고 상실의 시대라고 까지 부를만한 시대가 있었던가.

기차시간도 다 되었고 눈에 띄는 다른 책들도 없었던 터라 계산을 하고 나왔다.

그리고 대합실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이런 느낌의 작품에서는 결코 빠지지 않는 열 일곱살의 봄날에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 기즈키가 죽었다. 주인공은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 때, 나를 태운 밤기차는 어딘지 모르는 곳을 끊임없이 벗어나고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기차에서 도시락을 파는 아저씨가 내 곁을 다섯 번 쯤 아니면 그 두배쯤 지나쳤고 그래서 기차가 대전역 아니면 논산역에서 멈췄을 즈음에 레이코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런 식으로 고민하지 말아요.
내버려 둬도 만사는 흘러갈 방향으로 흘러가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은 상처 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입게 마련이지.
인생이란 그런 거야.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와타나베도 그런 인생살이를 슬슬 배워도 좋을 때라고 생각해.
와타나베는 때때로 인생을 지나치게 자기 방식으로만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 같아.
정신 병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좀더 마음을 열고,
인생의 흐름에 자신의 몸을 맡겨 봐.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산다는 게 근사하다고 생각하며 산다구. 정말이야, 그건!
그러니, 와타나베도 더욱더 행복해져야 해.
행복해지려는 노력을 해봐."

다음 날 밤, 내가 향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고 있을 때, 나오코가 죽었다. 향불이 다 타들어갔다. 그래서 계속 그래왔던대로 향에 불을 붙여 다시 꽂았다. 평소보다 하나 더 많이 꽂았다.

그리고 '무엇인가 잃는다'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슬프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감정이 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이런저런 일이 생기고 하다가 이야기는 재미없게 끝나버렸다.

내 열 일곱살의 봄처럼. 끝나버렸다.
2023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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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starsky

대단한 도입을 가졌다 했다. 그런 평을 듣는 작품이 제법 있지만 솔직히 동의한 적은 없었다. 유명세가 평범한 문장조차 유명하게 하였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명문이었다. 그것도 대단한. 첫 문장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있고, 주인공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꽤나 노력을 들여 옮겨왔음을 알린다. 처음이 수평이었다면 다음은 수직, 밑바닥부터 것도 밤의 밑바닥부터 제 색을 발한다. 다음 문장에 이르러 이야기는 본격 막을 올린다. 이보다 완전한 세 문장이 또 있을까. 덜 것도 더할 것도 없는 완전한 균형. 이를 가리켜 일본문학의 정수라 한 말이 틀리지가 않다.

그러나 뒤는 오로지 이 세 문장이 쌓은 공으로 과대평가되었다. 그럴 법한 일이다. 나 또한 이 허랑한 소설을 첫 세 문장을 쓴 이의 작품이라 믿을 수 없었으니.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민음사 펴냄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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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걸어온 길이 그가 세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대하는 시각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기자 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기자 또한 길러내는 것이다.

저널리즘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원하는 독자에겐 실망이 따를 수도 있겠다. 다루고 있는 많은 주제가 어떤 관점에선 흔한 것이고, 다루는 시각 또한 새롭지는 않다. 인용한 여러 서적을 고려하면 과연 이 정도 문제의식을 위하여 책 한 권을 읽는 것이 가치가 있는가, 그와 같은 쉬운 평가가 나올 법도 하다.

왜 김애란이 '추천의 말'에서 다 아는 말을 전하는 일의 미덕을 거론했는지 알겠다. 내게는 아니었지만 다른 누구에겐 좋은 독서일 수도 있으리라고, 그런 생각에 이르렀으니.

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낮은산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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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경계인이라고 표현하는 김나리의 글 가운데서 한국의 오늘이 읽힌다. 독일에선 자연스러운 것이 한국에선 그렇지 않을 때다.

글로써 뒤따른 저자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부모의 이혼, 십대 학창 시절부터 홀로 꾸려나가야 했던 삶, 가난이 가난인 줄도 몰랐던 오랜 시간들, 다른 성적 지향으로 고통 받아야 했던 나날까지가 버겁게 다가선다.

그러나 그는 제 고통을 등짝에 진 채로 한걸음씩 나아가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글에선 제 삶을 지탱한 어른만의 기개가, 끝나지 않은 삶을 기꺼이 마주하는 이의 진취성이 읽힌다. 그리하여 나는 '삶은 그렇게 납작하지 않'다는 김나리의 말에 공감한다. 납작하지 않다. 이런 삶은 납작할 수가 없다.

흔해빠진 납작한 인간들 사이에서 납작하지 않은 인간이 저기 하나쯤 더 있구나. 그런 감상만으로도, 내게는 가치가 없지 않았다.

삶은 그렇게 납작하지 않아요

김나리 지음
책나물 펴냄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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