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닉님의 프로필 이미지

주닉

@zunik

+ 팔로우
자유론의 표지 이미지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지음
현대지성 펴냄

# 밀의 시대에는 주의력 산업이 없었다

## 자유에 대한 정리

<자유론>을 이해하는 데에 밀의 또 다른 저서인 <공리주의>가 도움이 되었다. 공리주의 사상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서 ‘행복’은 효용으로 불린다. 전통 공리주의에 가해지는 비판 중 “효용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이야기하는 불확실한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밀도 시인하는 부분이다. 행복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결국 자신의 행복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기에 각자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결국에는 공리주의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사회가 아무리 행복의 기준을 강요해도 그것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이 논리를 되짚어 보면, 결국 밀의 “자유"는 행복으로 가는 수단으로 보인다. “자유"가 특정 개인의 행복을 끝내 불러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밀이 의도한 건 아니며, 사회적으로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잡음으로 여겨질 것이다.

공리주의에서 행복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음을 뜻한다. 밀은 벤담과 같은 양적 쾌락이 아닌 질적 쾌락을 얘기한다. 쾌락에도 급이 있다는 것이다.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높게 봤다. 정신적 쾌락이 개인에게 중요한 이유는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에 밀의 경험으로 잘 나와있다. 20대에 정신적 위기가 왔고, 시와 예술성의 중요성을 알게 된 후 행복관의 변화가 있었다. 이때 밀은 햇빛, 하늘, 책, 대화, 공공의 처럼 평범해 보이는 일에서도 쾌락과 흥분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주위를 관심 있게 보는 태도가 생긴 것이다. 정확히 이때부터 밀은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고상한 정신적 쾌락과 다른 육체적 쾌락은 단발적이고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갉아먹는다. 그렇기에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점점 더 갈증 나게 되고 악순환이 반복된다. 진정으로 행복해지지 않고 점점 피폐해질 수 있기 때문에 저급한 쾌락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밀이 위험할 수도 있는 “자유"를 당당하게 외친 이유는,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도 결국 인간 본성 위에서 작동될 수밖에 없다. 밀은 인간에게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는 이타적인 본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문명의 발전에 비례해 점점 강해질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문화가 발전한 유럽은 자유를 허락할 수 있고 문명이 발전하지 못한 인도는 자유가 허락돼선 안 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성인이라면 행복이 증가되는 방향, 즉 자기 발전적인 선택을 내릴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이 가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자유를 주게 된다. 밀 또한 문명인에게 그렇게 자유를 주려고 한 것이다.


## 밀의 시대에는 주의력 산업이 없었다

밀의 시대에는 주의력 산업이 거의 없었다. 라디오도 없고 TV도 없었다. 1833년부터 신문에서 조금씩 주의력 산업이 시작되긴 했지만 지금처럼 강력하지는 않았다. 밀은 당시 이런 주의력 산업이 미래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을 빼앗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힘은 점차 강해져 결국 우리의 주머니까지 들어왔다. 우리는 핸드폰으로 언제든지 광고를 접하고, 콘텐츠를 소비한다. 쾌락에도 급이 있다고 생각하는 밀이 유튜브 숏츠, 인스타 릴스, 틱톡 등의 단발성의 미디어에서 제공해주는 발작적인 쾌락에 빠져서 시간을 낭비하는 우리를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쾌락은 점점 더 저렴해지고 접근하기 쉬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더 떨쳐 버리기 어렵다. 사색이 필요한 고양된 정신적 쾌락을 바랄 수나 있을까? 정신적 쾌락을 누리는 사람은 점점 더 소수가 될 것이다.

현대인은 사색에 빠지기 굉장히 어렵다. 빠지려고 하면 자극적인 콘텐츠와 광고들이 목덜미를 붙잡고 끄집어낸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고 있다. 밀이 말한 자유인이 될 조건이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에게 좋은 것을 판단해 선택하는 능력은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현대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잘 모른다. 자신의 내면을 돌아볼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밀이 지금의 사회를 본다면 유럽의 19세기 때와 같이 우리에게 자유를 권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자유론>에서 밀은 독약 판매에 대한 얘기를 한다. 약품을 의료 등에 좋은 방향으로 쓰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아예 강제로 판매를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신 약품에 위험하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을 붙이는 것을 강제하는 것은 자유를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약품을 사는 사람이 독약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고만 한다면 좋은 뜻으로 사용할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악용될 것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어릴 적 게임에 접속하면 “장시간의 게임 이용은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라고 항상 떴다. 이 문구는 내가 너무 게임에 오래 빠져 있지 않도록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이 경고를 SNS에도 적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셜미디어 기업에 강제를 통해서 “장시간의 SNS 이용은 정신 건강을 해칠 수 있습니다.”라고 붙이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용자가 SNS에 접속할 때마다 이 문구에 노출되게 되며, 인생에 불필요한 콘텐츠들을 장시간 안 보려고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2022.07.21에 쓴 독후감)
2023년 10월 26일
0

주닉님의 다른 게시물

주닉님의 프로필 이미지

주닉

@zunik

# 삼각대의 균형

인간의 조건인 노동, 작업, 행위를 나의 삶과 현대에 빗대어 생각해 보자.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유 다음으로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지금은 노동의 영역이 대부분을 집어삼킨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인간의 조건이 균형이 잘 맞는 시대가 있었을까? 균형이 잘 맞는 것을 시각적으로 생각하면 3개의 다리가 균형을 이룬 삼각대로 볼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들에게 노동 측면을 넘기면서 다리 하나를 잃었다. 현대는 작업과 행위라는 두 개의 다리가 짧아져 삼각대가 거의 꼬꾸라진 상태다. 나 자신의 삼각대는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작업과 행위를 되찾으려면 노동이 어떻게 그것들을 집어삼켰는지 이해해야 한다. 노동이 삶의 필연적인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거라면 1차원 적으로는 채집하고 수확하고, 요리하고, 거처를 마련하는 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화폐가 생기고 이후에는 사적 영역의 확장으로 경제학이 생기면서, ‘노동’이란 것은 1차원 적인 생존 활동과 분리되어 화폐라는 매개체를 가지게 되었다.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가정처럼 분업이 생기고, 호모 파베르도 삶의 필연성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려는 노동으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아렌트가 마지막 남은 것은 예술이라고 했던 것 같다. 예술은 그래도 아직 ‘값어치’보단 ‘가치’로서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도 호모 파베르들의 작품이 필연성의 해결과 아예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든 100% 노동 100% 작업 100% 행위는 없다. 단지 고대 호모 파베르들의 생물학적 필연성은 노예들이 안보이는 영역에서 해결해 줬기 때문에, 돈보다는 명예와 자아실현에 중점을 뒀을 것이다. 행위는 현재 영역 자체가 많이 없어졌기도 하며, 그나마 남아있는 행위들도 돈을 벌기 위한 수단들로 많이 변화되었다.

현대의 문제는 그런 작업과 행위를 꿀꺽한 노동의 비대에 있다. 필연성을 해결하는 정도를 넘어서도 노동에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면 필요 이상의 돈이 모이게 되고, 그것은 사치로 이어지거나 끝없는 축적으로 가게 된다. 인간의 조건 측면에서 보면 노동은 필연성을 해결하는 정도로 하고, 남은 에너지는 작업과 행위로 쓰여야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자라면서 달리 진정한 ‘작업’ 과 ‘행위’ 방법에 대해 배울 곳이 없다. 그래서 잉여 자원이 생겨도 그나마 익숙한 노동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작업’ 과 ‘행위’는 무엇인가? 순수한 사유로부터 나와야 한다. 왜 순수한 것을 붙였는가? (필연성을 해결하기 위해)돈을 위한 ‘작업’과 ‘행위’에도 사유가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잘 팔리는 것, 돈이 되는 것을 생각해야 되고 그런 방향은 순수한 사유가 아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유 자체가 배제될 수 있다. 단순히 복제품을 생산하거나 자극적이 말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실 ‘작업’과 ‘행위’가 노동에 먹혔다기보다는 ‘노동스럽게 되었다’ 가 맞을 것이다. 게다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인 아닌 ‘작업’ 마저도, 아렌트가 말한 것 처럼 사유가 배제되고 쉼과 힐링의 목적이 되면서 ‘취미’화 되어가고 있다. 본래 진정한 작업이란 자신을 짜내고 치열하게 사유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나는 삼각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노예를 데리고 있지 않으며, 삶의 필연성을 직접 해결해야 하기에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필요하다. 또한 1차원 적인 노동 행위도 필요한데, 요리와 재배 등의 원초적인 생기를 만끽해야한다. 그리고 필연성을 해결하고 남은 에너지로는 작업을 해야하는데, 나에게는 글을 쓰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행위인데, 내게는 독서모임이 가장 순수한 행위의 장터이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돈도 안되는 걸 뭐하려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 모임이 가지는 힘은 크다. 그 외에도 사람 사이에 크고 작은 다양한 행위들에 힘을 쏟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이다. 아렌트가 사유가 모든 활동을 능가한다는 이유가 있다. ‘사유’는 작업과 행위의 원천이다. 이것이 부실하면 좋은 작업과 행위도 나올 수 없다. 이 사유를 기르기 위해서는 독서가 큰 자양분이 된다. 사유가 길러지고 강해진다면 좋은 작업과 행위는 새어나오게 되어 있다.

만약 이대로 모든 활동이 노동화 되고 잉여 자원으로 사치와 고통 없는 취미만 남는 사회(또는 개인)가 된다면, 아렌트의 말처럼 바보들의 천국이 되어버릴 것이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지은이), 이진우 (옮긴이) 지음
한길사 펴냄

4개월 전
1
주닉님의 프로필 이미지

주닉

@zunik

# 인생은 레슬링

”인생은 밀고 당김의 연속이네, 자넨 이것이 되고 싶지만 다른 것을 해야만 하자. 이런 것이 자네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자넨 너무나 잘 알아. 또 어떤 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자. 그걸 당연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야. 밀고 당김의 긴장은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과 비슷해.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중간에서 살지”

”무슨 레슬링 경기 같네요.”

”레슬링 경기라… 그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묘사해도 좋겠지.”

교수님은 웃음을 터뜨린다.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공감한다 내 인생도 레슬링 경기 같다. 내 우측 홍코너에는 모리 교수가 말하는 사회의 통념과 커리어 그리고 돈이 있다. 좌측 청코너에는 모리가 말한 삶의 핵심(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삶의 골수) 그리고 기여가 있다.

어른이 되고 사회에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홍코너의 힘은 강해졌다. 청코너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으로 인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홍코너에게 짓눌려 가려진 청코너의 존재를 거의 잊을 뻔했다. 그러다가 4년전 우연히 독서모임을 만났다. 그 후 다양한 책을 읽고 대화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짓눌려있던 청코너가 조금씩 꿈틀댔다. 도약하기 위해 호흡을 갈무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매달 모임에 나갈 때마다 청코너에 힘이 보태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홍코너를 밀어내며 조금씩 일어섰다. 2년이 흘렀다. 마침내 청코너는 우뚝 섰고 그 기세를 몰아 홍코너를 누르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됐다. 나는 그렇게 퇴사를 하고 백수가 됐다. 1년 정도의 기간을 잡아 독서에 집중하고 생각하기 위해서 말이다.

1년의 시간동안 다양한 작가들이 청코너에게 응원의 말을 해주고 지나갔다. 이제 청코너의 힘이 너무 강해져 오히려 홍코너를 짓눌려 버렸다. 나는 돈과 소비를 어느정도는 증오하기 시작했고. 돈버는 일에 열심히인 사람들을 사회의 노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책들이 청코너에만 힘을 실어준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중용을 얘기하며 청코너와 홍코너 모두를 격려해 주었다.

백수의 기간이 지나 다시 일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홍코너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청코너를 짓눌러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청코너가 너무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일과 삶 그 조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홍코너와 청코너는 균형 있게 합을 주고받으며 즐기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레슬링이 아닌 왈츠를 추는 것 처럼 보인다. 이제 누가 우세하냐 열세하냐 아니라, 어느쪽이 리드하냐로 느낌이 바뀌어가고 있다.

앞으로 내 삶은 균형을 유지하되 청코너가 리드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난 계속 독서모임에 참여할 것이다. 청코너에게 사랑을 주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언제 다시 홍코너가 주도권을 잡을지 모른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살림 펴냄

10개월 전
1
주닉님의 프로필 이미지

주닉

@zunik

# 비옥한 사랑

선함의 뿌리를 찾아가 보니 ‘사랑’이란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고 있다.

선함의 열매는 땅에 떨어져 ‘사랑’이란 토양을 더욱 비옥하게 만든다.

더욱 비옥해진 토양에서 선함이란 나무는 더 잘 자란다.

이렇게 선함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오래도록 말이다.

선함의 나무는 군집을 이뤘다. 서로의 뿌리가 엉켜 사랑을 주고받는다.

사랑의 토양을 함께 가꾸고 함께 열매를 맺는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이 선한 나무 군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토양에는 울타리가 없어요. 누구든 들어와 뿌리를 내려요. 아주 비옥하답니다. 함께 가꿔 가요”

살던 곳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이 소식들 듣고 몰려와 뿌리를 내린다.

선하지 않던 나무도 ‘사랑’의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으니 선한 나무로 변한다.

새로온 나무 중에는 어린 나무들도 있다.

어른 나무들이 가지를 한껏 펼쳐 무자비한 벌목꾼들이 볼 수 없게 가려준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아주 가끔은 토양을 더럽히는 나무가 들어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무를 거르고자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모두를 불신하느니 모두를 신뢰하고 가끔 상처받는 편이 낫다.

믿음을 가지고 울타리를 열어놓아야 한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생각의힘 펴냄

11개월 전
0

주닉님의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