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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우리 몸 안내서 (우리 몸 안내서)의 표지 이미지

바디

빌 브라이슨 지음
까치 펴냄

# 단순한 규칙으로 엄청난 결과물을 만들다

이 책에서 우리 몸에 대한 답을 알려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더 많은 의문을 던져주었다. 우리 신체는 현대의 과학으로 따라가지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경의로울 만치 복잡하고 엄청난 이 신체가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단순한 규칙 + 시간) 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이다. 30억 년 동안 규칙에 의해 빚어진 결과물을 5000년 역사를 가진 과학으로 이 정도를 이해한 것도 정말 대단한 일이다.

진화의 규칙을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도 = 돌연변이, 피드백 = 자연선택'으로 말이다. '어제의 나보다 나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라' 가 무슨 말인지 이해된다. 하루하루 조금씩만 바뀌면 된다. 며칠만 보면 티가 안 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변화들이 쌓여가면서 나중에 결과만 보면 도저히 과정이 상상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해있을 것이다. 우리의 '바디'처럼 말이다.


# 우리는 올바르게 진화하고 있는가?

"371 쪽 - 현대 의료가 불일치 질환의 증상들을 치료하는 일을 워낙 잘 하는 탓에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질환의 원인들을 계속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위 문장이 정말 와닿았다. 현대의 우리는 지금까지 이어져오던 '진화의 규칙'을 억누르고 있다. 종의 기준에서 개체의 단위로 자연선택을 받아 문제가 있는 유전자는 대를 잇지 못하고 제거되어 왔다. 그렇지만 지금은 현대의 의술로 그러한 유전자도 대를 잇게금 만든다. 환경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도구를 쓴다. 거기에 대한 세대를 거친 유전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잡혀왔던 우리의 진화적 결과물 마저도 점점 희석되어 힘을 잃을 것 같다. 어떤 돌연변이가 일어나든 대를 이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불독'과 비슷한 점이 많다. 불독은 '자연선택'이 아닌 '인위선택'에 의해 진화되었다. 신체 구조가 자연에는 맞지 않아서 인간 보호의 울타리가 없어진다면 금방 멸종할 것이다. 우리 또한 '의학'의 울타리를 벗어난다면 멸종할 수밖에 없는 길로 가고 있지 않을까?

"53 쪽 -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미국에서 1년에 대략 세 종류의 새로운 항생제가 나왔어요. 지금은 2년에 대략 한 종류가 나올 뿐입니다. 효과가 없거나 쓸모가 없어져서 시장에서 항생제가 사라지는 속도가 새 항생제가 나오는 속도보다 두 배는 빨라요. 어떤 결과가 빚어질지 뻔히 보여요. 우리가 세균 감염을 치료하는 데 쓸 약물의 병기고는 점점 비어가고 있어요. 게다가 이 추세는 멈추려는 기미조차 없어요"

"53 쪽 - 1945 년에는 페니실린 총 4만 단위를 투여하면 전형적인 폐렴알균성 폐렴을 치료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내성 증가 때문에, 하루에 2,000만 단위 이상을 여러 날 동안 투여해야만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지금인 페니실린이 전혀 듣지 않는 질병들도 있다. 그래서 감염병의 사망률은 점점 증가해왔으며, 약 40년 전의 수준으로 돌아가 있다."

우리는 구멍 난 배에 계속 덧대는 방식으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있다. 물론 구멍을 잘 덧댈 수 있는 기술과 함께 말이다. 언젠가 구멍이 늘어가는 속도가 구멍을 덧대는 속도를 초월한다면 우리는 침몰할 것이다.

(2020.07.09에 쓴 독후감)
2023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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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대의 균형

인간의 조건인 노동, 작업, 행위를 나의 삶과 현대에 빗대어 생각해 보자.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유 다음으로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지금은 노동의 영역이 대부분을 집어삼킨 것으로 보인다. 과연 인간의 조건이 균형이 잘 맞는 시대가 있었을까? 균형이 잘 맞는 것을 시각적으로 생각하면 3개의 다리가 균형을 이룬 삼각대로 볼 수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들에게 노동 측면을 넘기면서 다리 하나를 잃었다. 현대는 작업과 행위라는 두 개의 다리가 짧아져 삼각대가 거의 꼬꾸라진 상태다. 나 자신의 삼각대는 어떻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작업과 행위를 되찾으려면 노동이 어떻게 그것들을 집어삼켰는지 이해해야 한다. 노동이 삶의 필연적인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거라면 1차원 적으로는 채집하고 수확하고, 요리하고, 거처를 마련하는 등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화폐가 생기고 이후에는 사적 영역의 확장으로 경제학이 생기면서, ‘노동’이란 것은 1차원 적인 생존 활동과 분리되어 화폐라는 매개체를 가지게 되었다.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가정처럼 분업이 생기고, 호모 파베르도 삶의 필연성을 해결하기 위해 돈을 벌려는 노동으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아렌트가 마지막 남은 것은 예술이라고 했던 것 같다. 예술은 그래도 아직 ‘값어치’보단 ‘가치’로서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도 호모 파베르들의 작품이 필연성의 해결과 아예 관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든 100% 노동 100% 작업 100% 행위는 없다. 단지 고대 호모 파베르들의 생물학적 필연성은 노예들이 안보이는 영역에서 해결해 줬기 때문에, 돈보다는 명예와 자아실현에 중점을 뒀을 것이다. 행위는 현재 영역 자체가 많이 없어졌기도 하며, 그나마 남아있는 행위들도 돈을 벌기 위한 수단들로 많이 변화되었다.

현대의 문제는 그런 작업과 행위를 꿀꺽한 노동의 비대에 있다. 필연성을 해결하는 정도를 넘어서도 노동에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면 필요 이상의 돈이 모이게 되고, 그것은 사치로 이어지거나 끝없는 축적으로 가게 된다. 인간의 조건 측면에서 보면 노동은 필연성을 해결하는 정도로 하고, 남은 에너지는 작업과 행위로 쓰여야 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자라면서 달리 진정한 ‘작업’ 과 ‘행위’ 방법에 대해 배울 곳이 없다. 그래서 잉여 자원이 생겨도 그나마 익숙한 노동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작업’ 과 ‘행위’는 무엇인가? 순수한 사유로부터 나와야 한다. 왜 순수한 것을 붙였는가? (필연성을 해결하기 위해)돈을 위한 ‘작업’과 ‘행위’에도 사유가 들어갈 것이다. 그런데 잘 팔리는 것, 돈이 되는 것을 생각해야 되고 그런 방향은 순수한 사유가 아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유 자체가 배제될 수 있다. 단순히 복제품을 생산하거나 자극적이 말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실 ‘작업’과 ‘행위’가 노동에 먹혔다기보다는 ‘노동스럽게 되었다’ 가 맞을 것이다. 게다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인 아닌 ‘작업’ 마저도, 아렌트가 말한 것 처럼 사유가 배제되고 쉼과 힐링의 목적이 되면서 ‘취미’화 되어가고 있다. 본래 진정한 작업이란 자신을 짜내고 치열하게 사유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나는 삼각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노예를 데리고 있지 않으며, 삶의 필연성을 직접 해결해야 하기에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이 필요하다. 또한 1차원 적인 노동 행위도 필요한데, 요리와 재배 등의 원초적인 생기를 만끽해야한다. 그리고 필연성을 해결하고 남은 에너지로는 작업을 해야하는데, 나에게는 글을 쓰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행위인데, 내게는 독서모임이 가장 순수한 행위의 장터이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돈도 안되는 걸 뭐하려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 모임이 가지는 힘은 크다. 그 외에도 사람 사이에 크고 작은 다양한 행위들에 힘을 쏟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유’이다. 아렌트가 사유가 모든 활동을 능가한다는 이유가 있다. ‘사유’는 작업과 행위의 원천이다. 이것이 부실하면 좋은 작업과 행위도 나올 수 없다. 이 사유를 기르기 위해서는 독서가 큰 자양분이 된다. 사유가 길러지고 강해진다면 좋은 작업과 행위는 새어나오게 되어 있다.

만약 이대로 모든 활동이 노동화 되고 잉여 자원으로 사치와 고통 없는 취미만 남는 사회(또는 개인)가 된다면, 아렌트의 말처럼 바보들의 천국이 되어버릴 것이다.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지은이), 이진우 (옮긴이) 지음
한길사 펴냄

4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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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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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레슬링

”인생은 밀고 당김의 연속이네, 자넨 이것이 되고 싶지만 다른 것을 해야만 하자. 이런 것이 자네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상처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자넨 너무나 잘 알아. 또 어떤 것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하자. 그걸 당연시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야. 밀고 당김의 긴장은 팽팽하게 당긴 고무줄과 비슷해.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중간에서 살지”

”무슨 레슬링 경기 같네요.”

”레슬링 경기라… 그래, 인생을 그런 식으로 묘사해도 좋겠지.”

교수님은 웃음을 터뜨린다.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공감한다 내 인생도 레슬링 경기 같다. 내 우측 홍코너에는 모리 교수가 말하는 사회의 통념과 커리어 그리고 돈이 있다. 좌측 청코너에는 모리가 말한 삶의 핵심(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삶의 골수) 그리고 기여가 있다.

어른이 되고 사회에 한 발 한 발 내디딜수록 홍코너의 힘은 강해졌다. 청코너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인간성으로 인해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홍코너에게 짓눌려 가려진 청코너의 존재를 거의 잊을 뻔했다. 그러다가 4년전 우연히 독서모임을 만났다. 그 후 다양한 책을 읽고 대화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짓눌려있던 청코너가 조금씩 꿈틀댔다. 도약하기 위해 호흡을 갈무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매달 모임에 나갈 때마다 청코너에 힘이 보태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홍코너를 밀어내며 조금씩 일어섰다. 2년이 흘렀다. 마침내 청코너는 우뚝 섰고 그 기세를 몰아 홍코너를 누르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됐다. 나는 그렇게 퇴사를 하고 백수가 됐다. 1년 정도의 기간을 잡아 독서에 집중하고 생각하기 위해서 말이다.

1년의 시간동안 다양한 작가들이 청코너에게 응원의 말을 해주고 지나갔다. 이제 청코너의 힘이 너무 강해져 오히려 홍코너를 짓눌려 버렸다. 나는 돈과 소비를 어느정도는 증오하기 시작했고. 돈버는 일에 열심히인 사람들을 사회의 노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모든 책들이 청코너에만 힘을 실어준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경우는 중용을 얘기하며 청코너와 홍코너 모두를 격려해 주었다.

백수의 기간이 지나 다시 일을 시작하며 자연스럽게 홍코너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청코너를 짓눌러 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청코너가 너무 많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일과 삶 그 조화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홍코너와 청코너는 균형 있게 합을 주고받으며 즐기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레슬링이 아닌 왈츠를 추는 것 처럼 보인다. 이제 누가 우세하냐 열세하냐 아니라, 어느쪽이 리드하냐로 느낌이 바뀌어가고 있다.

앞으로 내 삶은 균형을 유지하되 청코너가 리드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 난 계속 독서모임에 참여할 것이다. 청코너에게 사랑을 주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언제 다시 홍코너가 주도권을 잡을지 모른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살림 펴냄

10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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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옥한 사랑

선함의 뿌리를 찾아가 보니 ‘사랑’이란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고 있다.

선함의 열매는 땅에 떨어져 ‘사랑’이란 토양을 더욱 비옥하게 만든다.

더욱 비옥해진 토양에서 선함이란 나무는 더 잘 자란다.

이렇게 선함의 선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오래도록 말이다.

선함의 나무는 군집을 이뤘다. 서로의 뿌리가 엉켜 사랑을 주고받는다.

사랑의 토양을 함께 가꾸고 함께 열매를 맺는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이 선한 나무 군집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토양에는 울타리가 없어요. 누구든 들어와 뿌리를 내려요. 아주 비옥하답니다. 함께 가꿔 가요”

살던 곳에서 뿌리가 뽑힌 나무들이 이 소식들 듣고 몰려와 뿌리를 내린다.

선하지 않던 나무도 ‘사랑’의 토양에서 영양분을 얻으니 선한 나무로 변한다.

새로온 나무 중에는 어린 나무들도 있다.

어른 나무들이 가지를 한껏 펼쳐 무자비한 벌목꾼들이 볼 수 없게 가려준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아주 가끔은 토양을 더럽히는 나무가 들어올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나무를 거르고자 울타리를 치지 않는다

모두를 불신하느니 모두를 신뢰하고 가끔 상처받는 편이 낫다.

믿음을 가지고 울타리를 열어놓아야 한다.

여기는 비바레리뇽 고원이다.

비바레리뇽 고원

매기 팩슨 지음
생각의힘 펴냄

1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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