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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면 죽을 만큼이나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 더 독한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더라. 일단 우리는 전쟁도 겪고 있지 않잖아. 지독한 곳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겪은 일로 죽어 버리겠다고 말하기는 나는 좀 그래. 하지만 유리야.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은 각각 다른 것 같더라. 감당해 낼 여건도 다르고. 설령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을 거야. (p. 207)
우리 독서 모임에는 아무래도 문과가 많았는지, 지난달 독서 모임 때 “다음 책은 술술 읽히는 책”을 원하는 분들이 많았다. (나포함. 지난 독서 모임 책 - 김상욱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그렇게 선정된 9월 독서 모임의 책은 『훌훌』.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은 이 책은 『훌훌』이라는 가벼운 느낌의 제목과 달리, 온 마음을 꾹꾹, 여러 감정을 툭툭 건드린다. 그뿐인가. 술술 읽히는 수준을 넘어, 마지막 페이지를 만나기 전까지 책을 덮을 수 없다. 묵직하지만 무겁지 않고, 가뿐하지만 가볍지 않은 놀라운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과거를 『훌훌』 털고 가뿐해지고 싶은 유리에게는 두 명의 가족이 있다. 자신을 입양해놓고 책임지지 못해 할아버지에게 버리듯 방치해버린 엄마와 언제든 보낼 사람처럼 마음을 주지 않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유리는 피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영역을 지켜주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적막하리만큼 평화롭던 그들의 일상이 깨진다. 갑작스레 엄마가 죽었고, 엄마의 다른 아이가 유리 네 집에 오게 된다. 수많은 사건을 듬뿍 안고 찾아온 동생이지만 유리는 그 아이로 인해 할아버지와도 더 가까워지며 진짜 '가족'이 되어간다.
『훌훌』를 읽는 내내 묘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주제나 상황이 묵직한데, 작가는 판단이나 개입 없이 그저 바라보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에게 많은 감상을 안긴다. 또 유리와 세윤의 성장과 깨달음을 보며 너무나 명료하게 '그래, 산다는 것이 그렇게 내 맘처럼 딱 떨어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분명 가치가 있어.'하고 느끼게 한다. 『훌훌』은 분명 소설 그 이상의 가치와 생각을 주는 책임을 새삼 느낀다.
정작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세윤이었다. 18살 미성년자 엄마에게 태어나 베이비박스에 버려졌던 아이. 하지만 다행히 좋은 부모님을 만나 그 부모님과 싸울 수도 있는 아이. 소설 속 짓궂은 아이들은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주제에 부모님과 싸운다며 세윤을 욕하지만, 엄마의 마음으로 이 책을 읽으며 세윤이 엄마와 언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감사하고 다행이라 느껴졌다. 또 버려진 아이에게 남긴 친모의 편지를 코팅까지 해 보관하다 성인에 가까워진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세윤 엄마의 넉넉함도 닮고 싶었다. 때때로 아이들은 자신의 엄마에게도 마음을 다 터놓지 못해 슬퍼하고 하지 않나. 『훌훌』을 읽는 내내 아이에게 생물학적, 법적 가족뿐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한 가족이 되어줄 수 있도록 노력하리라 다짐했다.
아픈 과거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혹자는 『훌훌』의 유리처럼 과거를 딛고 성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리의 엄마 서정희 씨처럼 아팠던 과거에 발목 잡혀 여전히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그 누구에게도- 고통이 진행 중인 사람을 탓할 자격이 없다. 그저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을 뿐, 아직 훌훌 털어버릴 시간이 되지 않았을 뿐이니. 부디 그들에게도 언젠가는 홀가분해지는 날이 오기를 그저 응원하자고, 그렇게 선한 눈으로 바라봐주자고 세상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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