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우리에게 알려준 가장 큰 비밀은, 인간이 사건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사건들이 인간을 이끌어 간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간을 엄습하는 사건들은 모두 앞선 또 다른 인간들에 의해 경험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느껴졌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어떤 사건도, 심각한 혹은 유익한 사건도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는 느낌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모든 사람은 유일한 존재이다. 한 나무에서 자란 모든 잎들이 유일한 존재이듯.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수액을 나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각자 다르게 수용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듯이, 새로운 일이 진정으로 새롭진 않더라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세대, 그 다음 세대, 파도, 그 다음 파도에겐 언제나 새로운 것이다. 따라서 인생에서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을 찾기 위해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지나치게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의무를 배신하는 것이다. 이 인생의 비밀을 이해하는 자는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도 확실한 것은 없다.
밤에는 모든 피가 검다
다비드 디옵 지음
희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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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알러지가 있거나 확고한 철학이 있어 음식을 가려 먹는 건 아니다. 한번 싫어지면, 한번 멀리하게 되면, 영원히 그런 채로 굳어버리는 성격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누군가에게 한번 실망하게 되면 그게 영원히 회복되지 않는 일이 종종 있다. 하기 싫은 일은 어떻게든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경우도 꽤 많다. 자동차에 하이패스를 설치하는 일, 고지서의 자동이체 계좌를 등록하는 일, 아이폰의 동기화 프로세스를 이해하는 일처럼 명확한 이유는 없지만 어쩐지 꼭꼭 씹어 먹기 싫은, 굳이 그 허들을 뛰어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먹는 일이야말로 가장 투명한 유희이니, 개인의 성격이 덕지덕지 묻어날 수밖에. 앞으로 내 편식이 고쳐질 확률은 더욱 더 낮아질 듯하다.
식재료를 다루는 능력과 팀원들끼리 협업하는 능력을 모두 최고치로 끌어올리면서, 동시에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을 최상으로 유지하고 모험과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셰프들은 어떤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걸까? 나는 휴대폰 카메라로 한 번, 입으로 두 번 정도 그 요리를 즐기는데, 셰프들은 얼마나 많은 겹의 노력을 투자해 이 요리를 만들었을까?
그래선지 나는 레스토랑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나면 "오늘 좀 행복하네."라고 습관처럼 말한다. 집에서 먹을 때도 물론 행복하지만 다이닝을 경험하면 "와씨, 진짜 행복하네."가 된다.
좋은 레스토랑에서 좋은 사람들과 식사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 삶이 윤택해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배달음식과 구독 서비스, 간편 냉동식품과 밀키트가 앞으로 우리의 식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겠지만, 그리고 이미 내 식생활의 엄청나게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았지만, 레스토랑에서 느끼는 행복은 그 자체로 고유할 것이다.
최근엔 누군가와 레스토랑에서 무릎을 붙이고 앉아 "와, 행복하네."를 읊조려본 적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내 삶도 다시 여유를 찾고 레스토랑도 위기를 이겨내서 외식의 기쁨을 흠뻑 느껴보고 싶다.
적절한 설명으로 좋은 와인을 찾아주는 소믈리에, 유쾌함과 친절함의 비율을 최적으로 블렌딩한 서비스, 입 안에서 하나하나 춤추는 식재료를 모두 한꺼번에 경험하고 싶다.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손기은 지음
드렁큰에디터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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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죽여 버린 것일까.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삶은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 아닐까. 이래서는 안 된다고 느끼면서도 지금 상황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자기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프레디의 목소리와 나 자신이 겹쳐지는 것만 같아 고개를 내저었다.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의 나는 이런 생활밖에 할 수 없다.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일이 없으면 매일 할 일도 없다. 그래서 회사에 나간다. 하지만, 일을 해서 얻는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조금이라도 무언가에 도움을 주고 싶다.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 형태로 만들고 싶다. 일은 그런 욕구를 충족해 준다. 눈앞에 막연히 있는 시간에 일로써 다소나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약을 끊으면 괴롭고, 한 번 실패하면 고생이 더 심하다. 인터넷에서 그런 소회를 몇 번이나 보았다. 과연 내가 약을 줄일 수 있을까.
"괴롭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데......"
"누가 그러는데요?"
"그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그렇겠죠.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보통 목소리가 큰 사람이 흘리는 경우가 많죠. 야마조에 씨를 아는 사람의 의견이 아니잖아요."
"그렇지만."
"다음 진료 날짜는 한 달 후가 아니라 일주일 후로 잡죠.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바로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의사는 평소의 담담한 말투로 돌아와 접수창구에서 다음 진료 날짜를 예약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약을 줄이면 발작 횟수도, 불안을 느끼는 순간도 늘지 모른다. 그런 상상을 하면 두렵다.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것에 지레 겁을 먹고 한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다.
새벽의 모든
세오 마이코 (지은이), 김난주 (옮긴이) 지음
왼쪽주머니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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