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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고유한 나를 만나다

김석 (지은이)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읽었어요
'자아 리셋'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강연을 풀어쓴 책이라는 저자 설명과 현직 교수로서의 강단 밖의 강연으로 엮은 글이다.
철학자의 입장과 대중강연이 혼합되어 있으며, 철학적 정의로 개념을 설명하면서 예시를 제시하고 수많은 철학자들의 유명한 이론을 풀어 설명하고 있다. 마치 고교 시절 도덕 교과서의 서양철학사를 배우던 느낌이 들었다.
플라톤의 저서들은 추후에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한 번씩 들어봤던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개념들은 간략한 설명들에 그나마 조금은 알아들었으나 역시나 쉬이 들어오는 개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말하는 자아 리셋이란, 결국 혼자일 수 없는 인간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서의 공동선, 공동체의 연대를 위해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개인의 자아 리셋이 인간종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와 문명_거시적으로 말한다면 지구라는 별 속에서 인간종이 다 같이 삶의 연속성을 이끌어내는 철학자의 이야기라고.
잘 살고 싶다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함께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본질에 이르는 것이 아닐는지!


39-41쪽
자아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어하는 대로 보게 하는 색안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2021년 개봉한 아담 멕케이 감독의 영화 <돈 룩 업>이다.
이 영화를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태를 바라보는 자아의 속성과 그것이 소통에서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는가이다.
영화 <돈 룩 업>은 고도의 미디어와 정치 풍자 영화이지만, 자아의 본성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다.
자아는 이렇게 클로즈업된 것만 보고 믿으며,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믿는다. 자아는 지극히 단편적이며, 자신의 기호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자아가 판단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진실이라고 믿기에는 의문스러운 면이 있다.

48-49쪽
건강한 자아라는 말에는 일정 부분 이상화된 자아상을 전제로 한다. 이상화된 자아상에는 타인의 평가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타인의 시선이 어떠하든 나에게 맞는 것이 가장 좋은 자아다.

이상화된 자아는 어쩌면 소외된 자아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나를 잘 알고 있는가? 나의 욕망은 진짜 나의 욕망인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건강한 자아를 만드는 출발점이다.

62-63쪽
무의식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때, 무언가 판단을 할 때 우리도 모르게 작용한다.
무의식은 개인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개인적 특성을 보이지만 그것은 사회적이다. 무의식 자체가 개인 상호 간의 관계와 억압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것은 오히려 초개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무의식은 나의 내밀한 부분이 아니라 상호관계와 그 장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욕망은 무의식과 가장 관계가 깊으며, 내가 어떤 욕망을 갖느냐가 무의식에 작용하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73쪽
무지의 지를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참회와 겸손의 태도와는 다르다.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스스로의 리셋의 필요성을 느껴야만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는 셈이다.

77쪽
인간은 결국 욕망 때문에 파멸도 하지만 욕망 때문에 삶의 활력을 느끼는 존재다. 즉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며 무의식의 증거이다.
이런 욕망에 대해 잘 알려면 나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성찰하는 자세가 우선 필요하다. 자아를 인식하는 것, 나와 나의 관계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각자가 나의 발견을 도모하는 길은 다양하게 열릴 수 있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고통의 필수 조건은 내가 나를 알아야 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다. 그것이 우리를 자기발견의 길로 이끈다.

89-90쪽
욕망은 결국 사회적이며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면 결국 욕망으로 인해 사회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거꾸로 욕망이 잘못되면 사회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갈등이 일어나면 욕망이 상호적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발전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는 사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욕망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화두다. 욕망에 대한 이런 질문들은 나 자신을 아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다음 단계에서 우리가 깊이 있게 풀어야 할 과제다.

105쪽
결국 언어라는 것은 욕망의 대상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언어적 존재인 인간은 타자의 인정에 목말라하지만 인정 자체가 욕망의 목적은 아니다.

107쪽
인간은 구조적으로 타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존재이자 요구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모든 문제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109-110쪽
결국 존재 결여라는 것이 욕망의 출발점이고, 이 존재 결여에 대해 관계를 갖는 방식이 바로 욕망이다. 하지만 존재는 물질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확장해나가다 보면 욕망은 결국 불가능한 것, 채워지지 않는 것이라는 아이러니에 도달한다.

나와 나의 관계가 중요하듯이 욕망은 나와 나의 관계이기도 하고, 또한 욕망을 인정해주는 타자에 대한 관계도 포함한다. 그렇기에 이 욕망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욕망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113쪽-114쪽
타자의 욕망에 의지해야 하고 타자의 욕망을 통해 나를 들여다 보아야 하지만 타자의 욕망에 맹목적으로 끌려가다 보면 자기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를 돌아본다는 것은 나의 욕망을 돌아본다는 것과 같고,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 순수한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비사회는 이것을 어렵게 만든다. 소비사회는 무한한 생산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매우 과장하게 만들고, 욕망이 욕망을 낳는 사회를 만든다.

122쪽-126쪽
요구가 된 욕망은 지나치게 사회나 타자를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내가 갖는 것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결국 욕망은 나의 존재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다. 내 존재를 실현하려면 욕구의 충족도 있어야 하고 요구의 충족도 있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에 대한 충실성이며, 나는 이것을 순수 욕망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은 계속된 요구의 욕망을 되풀이한다.

순수 욕망은 나의 삶을 잘 실현하는 것이지, 남들에게 인정받거나 과시하려는 나르시시즘과는 엄연히 다르다.

소외된 욕망에 빠지는 것은 지나치게 인정에 매달리기 때문이며 결국 타자의 욕망에 매이게 된다. 욕망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는 것도, 타자의 부러움을 사고 나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나의 존재를 그 자체로 소중히 하고, 나의 정체성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욕망의 본질이며, 그래서 순수 욕망이 중요하다.

132쪽
불안은 우리가 세계, 사회, 그리고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느끼는 정서 상태다.
불안은 내 안에 있지만 외부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지표다.

144쪽
불안은 신경적이고 생리적인 반응과 동시에, 정신적이면서 심리적인 반응도 불러일으킨다.

167쪽
불안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이 원인이지만 불안의 편차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다 겪을 수밖에 없는 불안이니까'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내 안의 불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200-205쪽
자신이 갖는 성격적 성향이나 편향을 객관화해 인식할 수 있을 때 그것을 교정하는 과정에서 세상과 타자를 제대로 보고 공존하는 능력도 발생한다.

상호 주체적 욕망이란 서로의 관계를 욕망의 조건으로 인정하면서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공생적 욕망을 말한다. 상호 주체적 욕망은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충실한 순수 욕망이다.

관계 자체에 충실한 것이 욕망인데, 물질적 욕망은 이 관계를 일종의 대상으로 바꿔치기한 것이고, 자기실현의 의지를 쾌락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며, 삶에 대한 자유를 집착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나와 나의 관계를 잘 맺는다는 것은 이상적인 자아상을 갖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의 관계가 늘 긍정적이고 생산적으로 작용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하고, 나 자신에 대해 제대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정체성이 정말 관계의 산물이라면 이 관계 자체를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자아 리셋이 필요한 이유다.

242쪽
우리가 공존해야 할 21세기의 모델로서 자아 리셋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를 필수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성찰과 변화가 필요하다. 고립된 개인에 의한 파편화된 연대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는, 마치 황제펭귄의 허드링과 도 같은 호혜적 관계가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공존의 지혜일 것이다.
2023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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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아이의 방학 숙제 책 중 하나였다. 여전히 독서록 쓰기를 몹시도 귀찮아하지만, 엄마도 읽고 같이 반응해달라는 투정 아닌 투정으로 읽고 아이의 말에 반응해 주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타이틀을 걷어내고 읽어도 작가의 주제의식이 ‘관계’라는 점에 생각이 맴돌았다. 코로나19를 거쳐왔기에 그런 까닭일까! 유독 ‘관계’라는 키워드가 많이 들어온다. 점점 살면서 타인과 또 나 자신과의 관계에 생각이 많아지고 변한다.

소설의 화자 류담은 타인의 삶이 언제 끝나는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부모님의 교통사고 이후로 얻게 된다. 원하지 않는 능력을 얻고, 그 능력으로 타인을 돕고자 하지만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을 열었던 친구의 ‘죽음의 디데이’를 막아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그 디데이의 초록색 링 숫자대로 죽는다. 이 사건 이후로 담은 자발적 아싸가 된다. 관계를 맺는 이의 '죽음의 디데이'가 보이게 된다는 걸 깨닫고, 그 이후로는 타인과 다시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초, 중교 시절을 지나 고등생이 된 담에게 같은 반 반장 소미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선다. 학교에서도 이미 자발적 아싸로 인식되는 담에게 미소는 반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같은 조별 과제를 하게 되면서 담의 일상에 의미를 갖게 된다. 또한 담과 같은 능력을, 같은 불행의 대가로 얻게 된 털보 아저씨 상두를 만나면서 담의 삶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털보 아저씨 상두가 불행으로 실의에 빠져 있다가 그 능력으로 무당 같은 업으로 밥벌이를 하지만, 그들의 단축된 수명을 바꾸는 방법을 알게 되고 도우면서 겪게 되는 과정 속에서 담과의 만남은 다시 한번 소용돌이를 속을 헤쳐 나가게 된다. 물론 이 방법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전제가 따른다. 이런 설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같이 읽는 이들에겐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는 물꼬가 된다. 타인을 위해서 얼마큼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가? 희생할 수 있는 이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일 때 가능할 것 같은가?라는 질문들.

이야기의 흐름이나 각 인물들 간의 관계가 연결되고 교차되는 구조들이 이야기 속으로 계속 빠져들게 한다. 복선과 암시가 있어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지도 가늠이 되긴 했다. 유일한 어른으로 나오는 인물 털보 아저씨 상두는 담과 ‘친구’가 되어서 혈연이 아닌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조력자 혹은 동반자로서, 어른에 대한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고 필요한 현실적 모습으로 등장해서 좋았다.

담이 미소와의 관계가 변화되는 일련의 일들은 작은 인연의 조각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듯, 관계의 그림 또는 깊이가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서 새삼 대면의 세계가 갖는 힘을 새삼 느낀다.

담이 미소와 우정에서 설레는 첫사랑의 관계로, 그리고 목숨을 나누어주고 싶은 존재로 변화되는 관계의 변화는 담 역시 엄마의 희생으로 얻은 삶이라는 걸 깨닫고 그 덤의 삶을 자신의 소중한 존재에게 나누려 한다는 흐름이 인간의 성선설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담을 싫어하던 친구와의 오해 혹은 묶은 감정들이 해소되는 사건 역시 타인의 선의 혹은 본능적인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후 깨닫게 되는 담과의 대척점에 있던 소현의 변화도 그런 부분에서 이해가 된다. 담과 소현이 처음 맺는 관계에서 오는 서투름과 오해가 싫은 감정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과 해소의 과정 모두 이 소설의 주제라고 느꼈던 ‘관계’를 더 생각하게 해준다.

청소년 소설다운 결말일지도 모르겠다. 해피엔딩 혹은 성장과 화해, 그리고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열린 결말.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이르는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 변화하는 담의 모습이 아픈 모습만 있지 않기에 엄마 마음에는 안도했다. 현실이 그토록 아름답게 완결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마냥 천진난만하지도 하고 그렇다고 상처에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체된 상태로 끝나지 않기에, 성장과 고난 또는 고통은 한묶음처럼 함께 오는 것이라고 느껴진다.

너에게 남은 시간 죽음의 디데이

이혜린 지음
풀빛 펴냄

읽었어요
3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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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부제 전월세의 기쁨과 슬픔이 제목의 역설과 잘 어울렸다. 흥미롭게 읽었다.
건축가인 두 사람이 나뉘어서 ‘집’에 관한 개인적 시선에서부터 인문사회적인 사유로까지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들어왔다.
일견 30대들의 전월세의 이사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내 집’이 아닌 ‘남의 집’에서 계속 살아가면서도 언젠가 소유하게 될 집에 대한 의미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롤로그는 이윤석이 에필로그는 김정민이 썼는데, 도입부의 글과 마무리의 글이 책의 정체성을 담고 있어서 여는 맛과 마무리의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1장 솔직하게 만들어가는 집
'여지의 여지 '편에서 공간의 여지에 대한 저자의 말에 스며들듯 수긍하게 된다.
넓은 평수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공간의 여지가 그곳에서 사는 이의 생각과 무의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 영향으로 더 긍정적이고 더 창의적으로 사고가 넓어질 수 있다는 증거처럼 읽혔다.
1인 가구의 최소 주거면적에 대한 논의들을 읽다 보면 자본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 해석한 공간의 ‘최소성’은 생활하는 이의 동선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이 느껴졌다. 간혹 가전제품을 사용할 때 이 제품을 디자인 한 이는 이런 제품을 사용해 본 경험이나 동선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일까, 실제 사용하는 경험치가 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불편하거나 참신해지는 상반되는 경우 모두 다.

17쪽
‘최소’라는 기준은 작두로 쓰인다. 시대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고안해 낸 극도로 효율적인 평면도를 칼날 삶아 삶의 여지를 도련한다. 시대라는 도곽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 삶은 과정일 뿐이라 여기고, 과정이 된 삶들은 아무렇게나 최소로 방치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이 다양해지고 개념이 다시 정의되고 있는 지금, 어떤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모양은 서서히 청년이라는 틀 안에 박제되고 있다. 박제된 청년은 최소한으로 살아야만 하는, 최소한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정붙이고 녹붙이고'편의 에피소드도 집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갖게 해 준다. 자신의 공간과 물건에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나의 역사를 쌓아가는 모습들이 새삼 개인의 역사들이 모여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좋은 취향’에 대한 김정민의 생각은 취향조차도 자본의 논리로 해석되어 평가하려 하지만, 자기의 솔직함과 생활감이 있는 인테리어가 더 좋은 취향의 인테리어라는 문장에서는 30대의 젊은 건축가의 주체성과 자유로움을 엿본다.
두 저자는 고양이를 기른다는 점과 건축가라는 직업으로 집과 방에 대한 생각과 지금까지의 전월세 이사 여정기를 말하고 있다. 책 집필을 위한 현장조사를 위해 지인들과 관련인들의 실제 살고 있는 집들을 탐방하면서 느끼고 접한 생각들도 실려 있다.

자신의 집이 싫다고 하면서 가는 내내 왜 ‘내 집이 싫은지’를 말하는 이를 통해서 집을 긍정하려고만 했던 이유를 소비가 나를 증명하는 시대인 자본주의 사회의 맥락에 젖어 있음을 말한다. 이 부분에서 또 마주친 것은 자본주의는 소비주의이고 소비가 나를 증명하고 표현하는 시대에 살기에, 나의 소유가 나쁘다고 말하지 않는, 생각하지 않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이 나쁘다는 또는 별 볼일 없다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소비를 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는 문장에 새삼 환기하면서 동의하게 된다.

2장 셋방일지
아파트의 창문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창문으로 인해 계층과 사회적 구분을 읽게 된다. 동일한 크기와 효율성으로 정착한 아파트 창호의 크기의 반대편에 빌라라는 집들의 사회적 불평등과 사용의 풍경을 던져준다. 방범창과 가림막으로 막고 보완해야 하는 빌라들. 이런 논의는 자신의 경험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읽어내고 말하고 기록하면서 건축가로서 어떤 반영과 개선을 할지 궁금해지고 기대된다.
‘뷰’에 관한 논의에서도 자연을 담는 뷰, 경관도 특정 계층이 소유하게 되는 것의 불평등 지적한다. 녹지공간인 공원이나, 경관을 더 많은 계층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도시, 주거지 형성의 중요성을 말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공유하는 자연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집이라고 불리는 많은 집들이 매트리스만으로 인식되는 저자의 프랑스 유학 때의 경험을 제시하면서 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최소의 집에서는 수면과 화장실 사용만이 가능하며 나머지 다른 것들, 주방과 거실의 기능은 축소 또는 축약된 채 최소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점들을 지적한다. 빨래방과 스타벅스의 방문이 일상이 되는 젊은 층의 생활 문화도 이런 주거 형태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빨래를 널고 차를 마시고 화분을 키운 베란다의 공간을 갖기 힘든 구조의 주거 형태들이 가져온 공유 공간의 외주화를 만들었다.
‘안행복주택’편지글에서는 정책 입안자의 태도와 정부와 국민이라는 키워드를 들여다보게 한다. 정책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운용과 실용이 필요한 지점을 집는다.

3장 일상의 발명가들
식탁테리어라는 말은 아마도 저자가 만든 단어가 아닐까 유추해 본다. 혼자 살면서 시작된 식탁인테리어로 식탁에서 사용하는 그릇들을 바뀌거나 모으고, 요리를 하면서 성취감을 맛보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된다. 2장에서 언급되었던 주방 공간의 축약과 축소가 요리라는 행위를 멀게 하고 간단하게 데워먹는 간편식의 식생활을 유도한다. ‘감히, 요리를 해먹어. 그냥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라는 거친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요리는 개인 취향이다. 선호 여부에 따라서 즐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주거의 구조는 사유의, 사고의 폭도 움츠러들게 한다.
반려동물을 기르기도 하고 실제로 기르는 이들의 집을 탐방한 경험은 건축가로서 집을 설계할 때, 기존의 인간만을 기본으로 한 설계에서 한 걸음 다가가 다양한 형태의 삶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실현성의 싱크로율은 아직 낮겠지만, 다양한 형태의 삶을 상상하고 반영하고자 하는 현장성이 넓어질 때 주거에 대한 집에 대한 의미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4장 우리를 담을 집
어차피로 만든 세상편에서의 에피소드는 집에 관한 따뜻한 관점의 한 갈래를 마주하게 한다. 평수나 크기로만 말해지는 주거지가 아닌 동네라는 의미로 거주하고 생활했던 곳의 생활정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덕담의 메모, 깨끗한 이사 정리로 입주 청소비를 아낄 수 있고 그런 기분을 전해주고 싶다고 탐방했던 곳의 이야기는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실제 인터뷰라서 감동이 더했다.

전월세 집이라도 사는 동안은 내가 거주하므로 나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듯 하지만 바로 그런 지점을 짚은 것이 아닐까?
벽돌로 쌓은 집과 지푸라기로 엮은 집편의 논의처럼 늑대집만이 안전한 것이 아니라 돼지들의 집은 지푸라기 집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을 구축해야 한다는 말이 들어온다. 집안이든 밖이든 안전할 권리가 있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의 흐름은 그저 집에 관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고 느낀다.

217~218쪽
도시는 거름망으로 걸러진 사람들끼리 사는 곳이 아니다. 도저히 서로 겹치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는 곳이다. 이것을 억지로 구분하고 나누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상한 형태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 건 다름을 계속해서 알아가는 것이지 다름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너와 성별은 같지만 국적은 달라, 나는 너와 언어는 같지만 피부색은 달라... 이렇게 같은 점과 다른 점을 구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의 크기가 얼마나 협소한지 가늠하게 할 뿐이다.
‘언어’라는 단어를 알았을때, ‘자가 주거’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 ‘성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마다 우리의 세계는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다르게 만드는 것’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감각’을 체화하는 일이다.

즐거운 남의 집

이윤석 외 1명 지음
다산북스 펴냄

읽었어요
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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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어느덧이라는 진부한 말로 시작하는 50대의 그들은 강릉 여행을 통해 각자의 삶에 대한 겹치는 부분과 여전히 가려졌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동갑 혹은 같은 또래라는 동질성의 키워드로 들어온 소설의 이야기는 세 명의 친구들이 20대를 지나 50대를 살아왔던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강릉에서, 이곳이 아닌 여행지에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왜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곳은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여행지일까? 일탈 같기도 하면서 일탈이지 못한 중년이 된 3명의 대학 동창의 그녀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난주, 정은, 미경.
난주는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전업주부의 삶을 살아왔다. 이제는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정은은 동창인 남편이 코로나로 인하여 퇴직 후 오픈했던 키즈카페의 폐업으로 경제적 파산에 이른 상태로 빚을 갚기 위한 생업전선에서 시달리며 살고 있다.
미경은 아픈 엄마를 홀로 돌보면서 직장인 도서관과 집만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각자의 삶이 녹록지 않다. 오랜 친구라지만 속속들이 드러내지 못하고, 공유하거나 말한 이야기들이 각각이다.

난주의 빈둥지증후군, 남아도는 시간의 공허감, 여성으로서의 성적 박탈감.
정은의 경제적 파탄, 생활고, 빚투를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경제적 상황. 요실금으로 인한 수치심.
미경의 간병 돌봄에 혼자 고립감 속에 지나가는 시간들, 관계들.

세 명의 인물들의 서사를 읽다 보면 50대에 이른 삶의 모습들이 빛나지도 안정되지도 못함을 본다. 나름 노력하면서 시절을 살아온 왔는데, 어쩌다가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다. 시절에 충실했건만, 무엇을 놓치고 살아온 것일까!

가장 측은지심이 느껴진 인물은 미경이다. 동성 연인의 결혼으로 관계가 정리되고, 어머니와의 간병 생활이 시작되고, 자매인 언니의 사라짐, 독박 간병의 고립무원 같은 생활로 이어진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미경에게는 가족은 있지만 가정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원하지 않을 때 혼자가 되는 건 별로였다. 혼자이고 싶을 때 혼자여야 혼자라는 사실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 엄마가, 집이 그립지 않았다. 그저 그리운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난주가 이른 결혼으로 출산과 육아로 인한 일시적 관계의 단절 이후 기다려준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장면이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공감이 된다.
난주는 입사라는 사회생활 없이 바로 결혼과 출산, 육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활 패턴은 많은 관계들의 정리와 변화가 오는 시기다. 그때 단절된 관계가 다시 회복될 때 느껴지던 고마움과 왠지 모를 어깃장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정은은 난주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전업주부의 안락한 삶이라고 자신의 상황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빈둥지증후군과 여성성의 상실로 허한 난주가 사업에 실패한 남편으로 인해 경제적 파산에 이른 정은이나, 독박 간병의 미경보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 명의 인물들은 다 각자의 행과 불행을 지고 오십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들의 여행지가 강릉인 이유는 각자의 사연들이 있던 곳이었는데,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강릉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된다. 허난설헌의 이야기가 강릉과 연결되면서 그녀들의 삶과 포개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중에서
그런데 오십대를 앞두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꾸 지난 생을 되돌아보게 됐다. 50년 동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았는데, 남은 시간마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헛헛했다.

오십이 된다는 것 소설의 문장처럼 지난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은 시간을 그냥 살게 될까 봐 두렵기도 하고 늙음을 이제 삶의 중심부로 맞아들여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오십을 앞두고 함께 할 친구들이 있고, 나눌 서사가 있다면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가 어떤 삶이었을지 되새기면서 앞으로의 삶을 안도하면 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김이설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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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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