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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감상을 쓰려고 오랜만에 책을 펼쳐 들었는데 마침 이 부분이. “가이드 한 분은 시간표를 분 단위로 짜둔다고 하였다. 동면자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이사이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수영하는 사람」, 55쪽)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그러니까 2020년의 여름에 나는 동면 가이드의 직업윤리 결여를 의심했다. 이후로 네다섯 번 넘게 이 단편을 읽으면서, 『사랑하는 개』(스위밍꿀, 2018)에 실린 「여름의 끝으로」와 웹진 <비유>에 발표된 「달리기 연습」과 『릿터』에 실린 「이 방에서만 작동하는 무척 성능이 좋은 기계」와 『문학과사회』에 실린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를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나는 박솔뫼의 문장이 그때도 옳고 지금도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재작년 가을에 한 수업을 들으면서 박솔뫼의 ‘고리원전 사고 트릴로지’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지. 재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환상성’이 드러나는 작품과 재난의 현실을 핍진하게 묘사하는 다큐멘터리를 서사의 중심에 둔 작품을 톺아보며, 박솔뫼의 ‘무위(無爲)의 공동체’가 담지하는 새로운 정치적 행동의 가능성을 엿보려고 했던 글인데, 이번 동면 연작 역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읽힌다.

박솔뫼가 소설에서 도입한 ‘동면’이라는 행위(혹은 현상)의 당사자들, 동면자와 동면 가이드. 한동안 시간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사람과 그동안 시간과 잘 연결된 상태로 존재해야 하는 사람. 동면자는 말이 없다. 동면에 이르게 되기까지의 곡절을 침대 위에 부려 놓은 채로 새근새근 숨소리만을 낸다. 잠들기 전 원했던 바가 무엇이었든 깨어날 때 (아마) 이루게 될 것이다. 동면자의 상태를 주기적으로 체크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동면자의 심장 박동이 갑자기 멈춘다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은 (소설 속에서 언급은 없지만) 매우 드물 테니까. 그가 잠에서 깨어날 동안 ‘동면’에 관해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동면 가이드다. 동면 속에서 동면 아닌 삶을 살아가는 동면 가이드인 ‘내’가 이렇게 말할 때,

“허은을 배려해주고 허은을 살펴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하고 내 생각만을 할 것이다. 그게 허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여름의 끝으로」, 16-17쪽),

박솔뫼가 제시하는 대안적 미래는, ‘동면자가 되는 우리’가 아니라 ‘동면 가이드가 되는 우리’인 것 같다. “생각을 줄이고 매일 할 일을 정해놓고 그것들을 해야겠다. 그것이 나의 작은 목표였다.” (13쪽) 우리가 ‘매일 할 일’을 실행할 수 있는 시간을 우리의 삶 속에 도입하는 비유로서의 동면. 박솔뫼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가능태로서의 시공간을 도입한다. 돌봄 윤리를 견지하며 가이드로서의 업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그 윤리를 돌봄의 주체인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곳에서, ‘나’는 ‘나’를 돌보고, ‘나’를 지킴으로써 ‘너’를 돌본다. 이런 장면들을 볼까. “지금의 오후의 시간이 얼굴 위로 지나가는 햇볕이 그것이 마치 숫자로 정해지고 무게와 부피가 계량이 되는 것처럼 정해진 것처럼 내 앞에 쏟아”(74쪽)지는 것을 느끼는 ‘나’. “한 번 뛸 때 무릎을 높이 올려 발을 한 뼘 더 멀리 내민다고 생각하면서 뛰”(84쪽)는 ‘나’. 거기서 홀로일 우리가 외롭지 않도록 어디선가 등장하는 그림자 개와 함께 산책을 나설 때, 나와 세계는 다시 부드럽게 연결될 것이다.

*

나는 동면을 하고 싶다. 아주 푹 자고 싶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3분의 1을 잠든 채로 보낸다던데, 까짓것 2분의 1이면 뭐 어때. 동면하는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그러니 내 동면 가이드가 되어 주실 분. 저도 동면 가이드 해드릴게요. 내 몸과 마음을 잘 지키면서. 수영하고 달리고 그렇게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무엇보다도 박솔뫼를 읽으면서.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2023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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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2023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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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etofmyheart

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2023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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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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