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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도시락을 파는 여자 (최정상으로 가는 7가지 부의 시크릿)의 표지 이미지

파리에서 도시락을 파는 여자

켈리 최 (지은이) 지음
다산북스 펴냄

파리에서 도시락을 파는 여자 - 켈리 최

이 책의 저자 켈리 최는 현재 유럽 11개국 1200여 개 매장, 연매출 5,400억 원이라는 고속 성장을 이룬 글로벌 기업 켈리델리(KellyDeli)의 창업자이자 회장이다. 첫 사업의 실패로 10억 원의 빚더미에 앉아 힘겨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으나 마흔이 넘은 나이에 무일푼으로 인생 제2막을 새롭게 시작하 기로 마음먹고, 2년간 할 수 있는 모든 준비와 공부는 다 했다.

그렇게 사업 공부에 매진하며 세운 켈리델리는 매해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100년 기업’이 되기 위한 혁신 시스템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이 책 『파리에서 도시락을 파는 여자』는 ‘평범한 대한민국 여자가 유럽에서 일으킨 기적’에 관한 이야기로 켈리 최 회장의 실패와 성공의 이야기는 삶의 기적과 희망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나온지 4년이 되어 개정판으로 나왔다.

10억의 빚더미에서 어떻게 글로벌 기업을 창업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도전정신은 가난한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녀를 집에선 고등학교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켈리는 학교를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다 야간 고등학교에 보내준다는 와이셔츠 공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그녀는 혼자 서울로 올라와 결심대로 와이셔츠 공장에 들어갔다. 그 공장에서는 한 여자고등학교의 야간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지원해주었다.

당시 공장 월급은 6만~7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꼭 필요한 생활비를 제하면(숙식이 제공되는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딱히 부족한 돈도 아니었다. 계획적으로 저축을 하지는 않았지만 돈도 조금은 모을 수 있었다. 돈을 모은다는 건 미래를 꿈꾸고 계획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것만으로도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고, 그때부터 그녀는 점차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을 회복해나갔다.

그렇게 3년간 와이셔츠 공장에서 일하면서 패션에 관심이 생겼고, 소질도 있어 보였다. 재봉이 디자이너의 주 업무는 아니지만, 어쨌든 공장에서 재봉 기술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터였다. 그래서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복장(服裝)학원에 다녔다. 복장학원은 사실 디자인보다 실무에 더 초점을 둔 곳이지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때는 우리나라 패션계의 인프라도 부족했고, 정보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패션은 일본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그때나 지금이나 고수하고 있는 몇 가지 철학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일단 하기로 했으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최고가 될 수 없더라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 유학을 가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일본의 패션은 프랑스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녀는 프랑스로 건너가게 되었다.
10대 시절 와이셔츠 공장에서 일할 때부터 익혀온 재봉 기술은 프랑스에서도 썩 쓸 만했다. 게다가 일본에서 다녔던 대학에서의 성적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모두가 걱정하던 일본 유학 생활을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적으로 끝낸 경험도 있었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프랑스 생활에 적응해나갔고,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했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컸던 그녀는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디자인 학교 두 곳을 졸업했다.

일본에서 공부한 것까지 따지면 나는 대학교를 세 군데나 다닌 셈이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제법 괜찮은 일자리를 얻어 패션업계에서 일할 수 있었다. 원래는 공부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이었으나 이미 프랑스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기도 했고, 취업까지 된 마당에 굳이 돌아가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은 게 잘한 선택이었는지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원하던 대로 패션업계에 종사하게 된 건 매우 기뻤다.

하지만 그 만족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일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분명 한국에서 최고가 되려면 일본에서 공부해야 했고, 일본에서 최고가 되려면 프랑스를 가야 했다. 또, 프랑스가 패션으로는 알아주는 곳이니 프랑스에서 최고가 된다면 세계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일을 해보니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프랑스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디자이너만의 독특한 발상이나 굉장한 크리에이티브가 필요했는데, 이를 따라잡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프랑스 패션계에서는 최고가 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잘해야 중상위권 정도에 머무를 게 확실했다. 이는 곧 목표를 낮춰야 한다는 의미였다.

긴 고민 끝에 일단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동안 쉬지 않고 달렸기에 잠시 머릿속도 정리하고 환기를 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직과 영어 공부도 할 겸 미국 유학을 가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했다. 그런데 더 고민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세 번째 선택지를 건넸다. 당시 프랑스에서 사업을 시작한, 절친했던 한국인 친구가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고민이라며 그녀를 찾아와 몇 개월 만이라도 좋으니 함께 일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시작한 지 1년, 사업은 거의 자리를 잡았고, 패션계 못지않게 그 일에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일을 ‘친구의 사업’이라 여기지 않고 ‘본인 사업’처럼 생각하고 일했다. 실제로 자신의 돈을 일부 투자하기도 했고 회사에서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면 인맥을 동원해 빌려서 메우기도 했다.

친구의 사업에 본격적으로 합류하면서 돈을 마련해 회사에 투자했고, 친구와 그녀는 각각 6대 4 정도의 지분을 보유했다. 이제 공동 경영자가 된 것이다. 먼저 친구와 그녀는 각자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분리했다. 일거리를 받아오는 것은 친구의 몫이었다. 그러나 사업은 점점 힘들어졌고 회사 재정이 악화 일로로 치달을 무렵, 친구가 이 모든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친구가 기획한 프로젝트는 ‘자동차 박람회’였다. 코엑스에서 자동차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를 열자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의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치솟고 있었기에 좋은 아이디어 같았다.

전시회 준비에는 많은 돈이 들어갔다. 그리고 전시회는 망했다. 결국 친구와 그녀는 그렇게 약 9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고, 그 대가로 그녀에게는 악몽 같은 2년이 찾아왔다. 사업 실패에 이은 10억의 빚으로 화려했던 과거는 산산조각 났다. 그 후로 약 2년간 웬만해서는 집 밖으로 나서지 않았고, 사람도 잘 만나지 않았다.

자살을 하려다 어머니를 떠올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할 수 있는 것들을 따져보기로 했다. 집과 차가 있고, 3개국어(한국어, 일본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는 강점이 있었다. 주로 한국인들과 일하다 보니 프랑스어가 유창하진 않았지만 일상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했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던 차였다. 밑바닥에서 희망을 발견한 그 순간, 놀랍게도 기적이 찾아왔다. 그 시기에 친구 중 하나가 그녀에게 방 한 칸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집을 민박과 하숙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민박과 가이드 일을 통해 그녀는 재기의 발판이 될 자금뿐 아니라 더 큰 것들을 얻었다. 우선 자신감이 생겼다.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줄 아는 용기를 얻었다.

이 무렵 나그녀 한창 그녀와 비슷한 환경에 있는 사람, 즉 한국인이나 일본인, 중국인 중 유럽, 미국, 캐나다 등 영미권에서 무일푼으로 창업해 성공한 사례를 찾고 있었다. 방송, 신문, 뉴스, 책 등을 보거나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많지는 않았지만 성공 사례를 찾을 수 있었다. 경기의 영향을 덜 받고(요식업) 그중 그녀가 강점을 가질 수 있으면서(유럽에서 아시아인이 운영하는 아시안 푸드) 이미 성공한 사업의 사례를 종합해보니 김밥이나 삼각김밥, 초밥 등의 메뉴가 가장 적합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고, 특히 초밥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짧게나마 초밥집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삼각김밥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의 삼각김밥 공장도 견학했고, 기계를 찾으러 출장도 많이 다녔다. 그 비용은 모두 민박집 수익으로 충당했다. 다만 시간 확보를 위해 한국인 학생을 고용해 민박집 운영을 맡기고 그녀는 사업 공부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창 열을 올려가며 삼각김밥 사업을 조사하던 중,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유럽에서는 그녀가 가게를 차리고 그 안에서 음식을 만들어 직접 팔 때에 비해 제3자 가게에서 팔 때는 법적 제한이 많았다. 게다가 삼각김밥을 만들어 납품하는 사업을 하려면 무균 시스템을 갖춘 공장이 있어야 하고,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이 비용이 최소 10억 원이나 든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사례 조사는 계속했는데, 때마침 미국에서 무일푼으로 시작해 대형 슈퍼마켓 체인에 김밥과 초밥을 납품해 연매출 수천억 원을 올린 김승호 회장의 『김밥 파는 CEO』를 읽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초밥 사업, 좀 더 정확히는 ‘마트 내에서 쇼 비즈니스와 접목한 초밥 도시락 사업’으로 길을 정하고 다시 사업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2년간 마트로 출근했다. 그리고 그 기간, 그녀는 마트 직원들보다도 더 자주 마트에 갔고, 그들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트에서 무엇을 조사했을까? 우선 마트에 초밥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파악했고, 있다면 얼마나 신선하고 맛이 있는지, 유통기한은 어떤지 확인했다. 그리고 기존 초밥들의 가격대는 어떠한지, 팔린다면 얼마나 팔리는지 등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적정 가격대를 선정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초밥들을 모두 먹어보았고, 이를 구매하는 고객층과 그들의 반응, 구매 패턴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분석했다.

더불어 초밥 외의 다른 아시안 푸드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지, 판매하고 있다면 어떤 것들을 팔고 있는지도 같이 조사했다. 초밥과 김밥 사업을 기반으로 하되 궁극적으로 다른 아시아 음식들도 다양하게 판매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제품들에 대해서도 가격과 품질 등을 철저히 조사했음은 물론이다. 마트와 고객에 대한 연구도 필수였다. 우선 마트별로 잘 팔리는 제품이 다르다면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이 모든 결과는 직접 관찰하고 발로 뛰며 준비를 했기에 가능했다. 2년간 마트 직원들보다도 더 마트에 관심을 가지고 살피고 조사한 결과가 사업 성공의 밑바탕은 물론, 마트와의 파트너십을 다지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우선 세계 최고의 초밥을 팔아야만 하니, 당연히 초밥에 대해서 가르쳐줄 스승이 필요했다. 야마모토 선생께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그녀를 도와주었다. 현재 야마모토 선생은 새로운 메뉴 개발 외에도 최고의 재료를 선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의 도움으로 회사는 성장해갔고 그렇게 차근차근 회사를 키워나갔다.

켈리델리가 프랑스 경영대학원 석사과정 교재에 쓰일 정도로 주목받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유럽 기업임에도 회장이 한국인 여성이라는 점, 혁신적인 콘셉트, 고객만족도가 높은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 독특하고 혁신적인 기업문화 등 다양하다.

현재 11개국에 각각 지사가 있고, 각 지사마다 직원들이 있다. 회사의 비전은 평소에도 여러 방법을 통해 공유하지만, 가끔은 다 함께 모여 공개적으로 비전을 선포하고 공유하며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그래서 생겨난 켈리델리의 문화 중 하나가 바로 ‘올핸즈(All Hands)’라는, 일종의 워크숍이다.

올핸즈는 1년에 총 네 번 열리는데, 두 번은 각국에서 화상으로 진행하고, 두 번은 대개 3박 4일 동안 모임을 갖는다. 화상으로 진행할 때는 직원들이 인근 국가의 지사 미팅실 몇 군데에 모인다. 그 다음, 다 같이 화상으로 각 지사에서 하고 있는 프로젝트 진행 상황이나 그간 있었던 일들을 공유하는 것이다.

밖에서 올핸즈를 진행할 때는 답답한 사무실을 벗어나 몸과 마음을 환기할 수 있는 곳에서 함께한다. 그 동안의 업무나 성과를 평가하고 회의를 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한자리에 만나서 친목을 다지고 서로의 업무, 아이디어, 비전 등을 공유하고 소통하자는 게 취지다. 따라서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가 아닌,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진행한다.

일과 가정 어디에 더 집중해야할까?
그녀는 자신이 없어도 굴러갈 수 있는 회사를 만드는게 목표다. 사장이 자리에 없을 때도 회사가 성장하려면 크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 바로 ‘시스템’과 ‘인재’다. 시스템은 사장이 장기간 자리를 비워도 매끄럽게 회사가 돌아가도록 만들고, 이런 시스템은 결국 사람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시스템과 인재를 키워내는 힘이 바로 기업문화다. 그런 기업 문화를 지향한 결과 그녀와 가족은 1년간의 안식년을 보낼 수 있었다.


사업의 기본은 ’고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사업은 고객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이익이나 효율 앞에서 온전히 고객 입장에 서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처음 켈리델리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도 가장 먼저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초밥 도시락을 이용하는 고객들이 가장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맛’과 ‘신선도’였다. 답은 아주 명쾌했다. 초밥 도시락을 이용하는 고객이 지금도 많지만, 그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고, 가격이 조금 더 나가더라도 신선하고 맛있는 도시락이 있다면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다. 그녀는 이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할 일은 복잡하면서도 간단했다. 그저 고객에게 더 맛있고 신선한 도시락을 만들어 제공하면 되었다. 더 많이, 더 쉽게 제공하기 위해 마트, 그중에서도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곳과 계약해야 했고, 더 많은 고객을 접하기 위해 마트 내에서도 주요 통로에 매장을 열어야 했다. 또한 신선함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조리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게 해야 했고, 맛을 위해서는 가장 신선하고 품질이 좋은 재료만을 아낌없이 사용해야 했다.

사업의 출발점은 항상 고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고, 사업가는 어떻게 돈을 벌지를 궁리하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고객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고객들이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면 돈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선 프랑스, 나아가 유럽, 궁극적으로는 세계 최고의 외식 프랜차이즈 기업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녀는 켈리델리를 ‘초밥계의 스타벅스’처럼 만들고자 한다. 이는 그녀가 스타벅스의 기업문화와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의 경영 철학을 보며 깊게 감탄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초밥으로 그런 기업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청나게 승승장구하는 그녀의 다음 목표는 무엇일까?
그녀는 손을 떼도 별 지장 없이 돌아가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렇게 된다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공부도 더 많이 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쌓은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를 많은 사람에게 공유함으로써 ‘1천 명의 꿈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목표를 잡았다. 그렇게 그녀는 책과 유튜브로 많은 사람들에게 멘토링을 해 주고 있다.

영국의 부자순위 345위에 오른 억만장자 켈리 최의 역경과 성공의 이야기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예비사업가 또는 사업을 꿈꾸는 분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을 책이다.
👍 힐링이 필요할 때 추천!
2022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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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똑똑해지는 역사 속 비하인드 스토리

EBS 오디오 컨텐츠팀에서 시리즈로 제작한 책으로 역사, 과학, 생활문화 그리고 경제로 총 4권의 시리즈인다. 이 책은 그 중 역사 속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은 책이다. 이 시리즈는 모두 5개의 장에 50개의 이야기들로 짧은 이야기들이 많이 담긴 책이다. 이 책에서 전혀 몰랐었던 새로운 사실들을 상당히 많이 알게 되었다. 그만큼 읽으면서 놀랍기도 했고 재미도 있는 책이었다.

나폴레옹은 정말 키가 작았을까?
실제 나폴레옹의 키는 작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키가 작다는 소문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나폴레옹 사후에 부검을 했는데, 그 부검 기록서에 기재된 나폴레옹의 키는 프랑스식 야드파운드법으로 5피에(pied) 2푸스(pouce)였다. 이것이 영국으로 넘어가면서 5피트(feet) 2인치(inch)가 된 것이다. 즉, 나폴레옹의 키가 작다는 것은 나라 간의 단위 차이로 생겨난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1피에는 32.48센티미터이고 1피트는 30.48센티미터이므로 프랑스 피에는 영국의 피트보다 1.06배(약 2센티미터) 더 계산해야 한다. 프랑스의 5피에 2푸스를 미터로 계산하면 나폴레옹의 키는 약 169센티미터이지만, 영국의 5피트 2인치를 미터로 계산하면 약 158센티미터다. 그래서 나폴레옹의 키가 150센티미터대라는 소문이 난 것이다. 실제 그의 키는 169센티미터였고, 당시 프랑스인 남자의 평균 신장이 164센티미터 정도였으니 오히려 큰 키에 속했다. 나폴레옹이 키가 작다는 소문이 확산하는 데 한몫한 것은 주변 환경 탓일 수도 있다. 황제가 된 후에 나폴레옹은 근위대와 늘 함께했는데 당시 근위대는 평균 170센티미터대 후반의 장신들이었다. 이들로 인해 나폴레옹이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던 것이다.

아이작 뉴턴의 다른 직업
우리가 흔히 아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에게는 독특한 직업이 하나 더 있었다. 그에겐 탐정이라는 독특한 이력도 있었다. 53세에 오랫동안 교수로 몸담았던 케임브리지 대학을 떠난 뉴턴은 런던으로 와서 영국 조폐국 감사직을 맡게 된다. 그는 사람이나 상황을 관리하는 일에 학식도 경험도 별 관심도 없었겠지만 조폐국 감사로서는 탁월했다.

그가 조폐국에서 일하게 된 이유는 당시 영국에서의 화폐문제가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동전을 금과 은으로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표준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 상인들은 조폐국 내부 인사들과 공모해 무거운 동전을 사들여 녹인 후 가벼운 동전으로 만들거나 동전의 가장자리를 깎아서 나온 금을 모으는 등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래서 당시 영국 재무장관 윌리험 라운스는 1695년 뉴턴에게 조언을 구했고 이렇게 뉴턴은 조폐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뉴턴은 조폐국에서 일하면서 화폐를 표준화하는 화폐 개혁을 추진했다. 위조화폐를 방지하기 위해 동전 테두리에 톱니무늬를 새겨넣게 했고 이렇게 하자 동전의 가장자리를 깎아내는 사람들이 사라져 위조화폐를 방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한 또다른 일은 위폐범들을 잡는 일이었다. 뉴턴은 위폐범들을 잡기 위해 수사관으로서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뉴턴은 1696년부터 3년간 조폐국 감사로 재임하면서 위폐범 수십명을 추적, 체포하고 기소했고 1699년부터 죽기전인 1727년까지 약 39년간 영국 조폐국장으로 일했다. 천재 과학자가 탐정으로 위페범을 추적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달러는 미국의 돈이 아니다?
달러는 미국의 화폐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통용되는 기축통화다. 그런데 달러는 미국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달러는 원래 유럽에서 통용되던 은화를 가리키던 용어였다. 은화의 원조는 독일에서 화폐로 쓰던 요아힘스탈러(joachimsthaler)인데, 탈러(thaler, taler)라고도 불렀다. 이 이름은 지금은 체코의 영토인 보헤미아 지방의 도시 성 요아힘(St. Joachim)에 있는 한 골짜기에서 유래했다. 1516년 이 골짜기에서 양질의 은광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산골 촌락을 이루자 이 지역을 간단히 ‘골짜기(das Tal)’라고 불렀다. 몰려드는 인파로 주민 수가 약 5,000명에 달하자 루트비히(Ludwig) 왕이 이 촌락을 자유 산악도시로 격상하면서 ‘요아힘의 계곡’이라는 의미로 ‘요아힘스탈(Joachimstha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은화가 요아힘스탈을 따서 요아힘스탈러 또는 탈러그로셴(thalergroschen)이라고 부르다가 탈러로 통일된 것이다.

탈러의 품질은 전 유럽에서 호평을 받아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다양한 탈러가 발행되었다. 탈러는 세계적 명성을 가진 주화로 떠오르면서 점차 화폐를 지칭하는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탈러는 국경을 넘어 다른 고가 은화들의 이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탈리아에서는 ‘tallero’, 네덜란드에서는 ‘daalder’, 덴마크와 스웨덴에서는 ‘daler’, 영국에서는 ‘dallar’로 각국에서 발행하는 은화의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정작 달러의 기원이 된 독일은 1873년에 탈러에서 마르크로 화폐 이름을 바꾸었다.

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진 달러가 어떻게 미국 화폐가 되었는지는 미국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은 영국 식민지였던 시기는 물론이고 독립을 선언한 1776년 이후 1783년 파리조약에서 독립이 승인될 때까지도 독자적인 화폐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1785년 7월 6일에 대륙 의회에서 “미합중국의 화폐 단위는 달러로 지정한다”는 내용을 공표했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등의 외국 화폐와 각 주에서 발행하는 화폐를 혼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92년 달러를 미국의 공식 화폐로 지정하면서 근대 국가 최초로 10진법 화폐체계를 도입했다. 그 후 1913년 미국중앙은행 역할을 하는 연방준비은행을 출범하고 흔히 달러로 일컬어지는 연방준비권을 발행하면서도 이 전에 발행된 국법은행권, 금증서, 은증서 등의 유통을 허용해 화폐체계는 여전히 복잡했다. 그러나 이후에 연방준비권을 제외한 나머지 화폐의 추가 발행이 중지됨에 따라 현재와 같이 유통 지폐의 99퍼센트가 연방준비권, 지금의 달러로 단순화된 것이다.

달러가 미국 공식 화폐로 채택된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은 영국 파운드화에 반감을 갖고 있었기에
당시 에스파냐의 중남미 식민지 통화로 널리 유통되고 있던 다레라 은화를 공식 화폐로 채택했다. 다레라의 영어 발음이 바로 달러다. 미국이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반감으로 달러화를 채택했던 사실은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임에 틀림없다.

조선시대에도 국민투표가 있었다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국민투표를 실시했던 기록이 조선시대에 이미 등장한다. 때는 조선의 4대 왕 세종대왕때에 있었다. 1430년에 세종대왕은 조세제도의 개혁을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세종대왕은 기존의 조세제도인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공법을 도입하고자 했다. 답험손실법은 관리나 토지 주인이 직접 농작의 상황을 조사해 보고하면 작황의 손결에 따라 세금을 덜어주거나 면제하던 세율 규정법이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조사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조작과 부정부패가 많이 발생했다. 세종대왕이 추진한 공법은 전국 각 도를 토질에 따라 나누고 모두 27종의 전등에 따라 다른 세율을 적용해 조세하는 제도로 세종대왕은 이 공법의 제정을 두고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국민투표의 결과 찬성이 57.1%로 나왔고 세종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데 시간을 들였다. 결국 시행까지 17년이 걸리게 되지만 백성들의 의견을 소중하게 생각한 세종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역사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다. 이 책의 장점은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상당히 짧고 잠깐씩 읽기에 적합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루하고 긴 역사책이 아니라 흥미롭고 짧고 여러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어 출퇴근이나 이동 시 읽기에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괜찮은 책이다.

알면 똑똑해지는 역사 속 비하인드 스토리

EBS 오디오 콘텐츠팀 지음
EBS BOOKS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2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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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똑똑해지는 과학 속 바하인드 스토리

이 책은 EBS 오디오 콘텐츠님에서 만든 4군의 시리즈 중 한권이다. 이 시리즈의 모든 책들이 50개의 주제에 대해 5개의 챕터로 나눠 이야기해준다. 50가지의 다양한 이야기에서 처음 알게된 많은 사실들이 있었다.

히포크라테스도 해결하지 못한 불치병
혹시 히포크라테스환이란 단어를 아는가? 히포크라테스는 환관들에게는 대머리가 없다는 점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는 탈모와 성의 상관관계를 밝히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해결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이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불치병이다. 히포크라테스도 대머리로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머리인 사람이라도 머리가 남아있는데 옆에서 띠모양으로 뒷통수까지 이어지는 그 대머리의 머리 모양을 히포크라테스환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을 불태워 번식을 시도하는 식물
자살을 해서 오히려 종족을 번식하려고 하는 식물이 있다. 쉬오크와 뱅크스소나무가 그런 식물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뿌리내린 터전에서 불이 나기만을 기다린다. 이 식물들은 200도 이상의 고온에서만 솔방울을 열어 씨앗을 퍼뜨리기 때문이다. 불이 났을 때 온도가 높아져 상승기류가 생긴다는 것을 깨달은 이 식물들은 자신들의 씨앗에 날개를 달고 불로 만들어진 상승기류에 날개 달린 씨앗을 날려보낸다. 이 식물들이 불이 난 이후 씨앗을 퍼뜨리는 또 다른 이유는 경쟁자들 때문이다. 경쟁자들이 불에 타 죽으면 새로운 새싹은 경쟁자들이 차지했던 햇빛을 빼앗아 올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불타 죽은 경쟁자들은 거름이 되어 새싹의 생장을 돕는다.

쉬오크와 뱅크스소나무가 종족을 번식하려고 불을 이용하는 반면, 스스로를 불태워 자살을 택하는 꽃도 있다. 북아프리카 카나리아제도와 지중해 연안에 서식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인 '시스투스'가 그 주인공이다. 시스투스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시스투스는 자신이 서식하는 주변에 다른 식물들이 자라나 밀도가 높아지면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주위가 빽빽해지고 외부 온도가 32도 이상 올라가는 여름 무렵이면 내부에서 오일을 만들어 뿜어낸다. 이 오일은 35도의 낮은 온도에서도 쉽게 불이 붙는 강력한 휘발성 오일이다.

이 오일에 불이 붙어 시스투스의 몸이 불타기 시작하면 주변에 있던 다른 식물들도 화재로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만다. 고온 건조한 중동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는 가끔 자연발화로 불이 나는데 시스투스가 그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시수트스가 자신만이 여유로운 공간에서 생존하고자 할 때 왜 자살을 선택할까? 그 이유는 바로 씨앗에 있다. 시스투스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기 전에 불에 타지 않고 잘 견디는 내화성 씨앗들을 몸속에 숨긴다. 시스투스는 알칼리 토양에 강한 식물이라서 시간이 지나면 경쟁자들이 모두 불타서 없어진 잿더미 속에서 다시 싹을 틔운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불태우고 결국 재가 되어 후손이 생육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유독 고양이가 귀여운 이유
사람들은 고양이처럼 작고 둥글둥글한 동물 또는 아기를 보면 귀엽다고 생각한다. 이는 '베이비 스키마'라는 용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베이비 스키마는 오스트리아의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정립한 개념이다. 스키마는 정보를 통합하고 조직화하는 인지적 개념 또는 틀을 의미하며 도식이라고도 한다. '유아도해'라고도 불리는 베이비 스키마는 사람이나 다른 영장류가 육아 행동을 일으키는 특징을 조합을 나타내는 도식이다. 육아 행동은 동물이 새끼를 기를 때하는 행동으로 젖을 먹이거나 외부 위협에서 보호하는 행위를 말한다. 포유류나 조류는 베이비 스키마의 특징을 갖고 태어난다. 태어난 후 일정 기간 어미의 보호가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미에게 육아 행동을 유도하고 어미의 보호가 없어졌을 때 다른 동물에게도 보호 본능을 느끼게 하여 살아남기 위해 생긴 특징이다.

성체 포유류나 조류 또한 이런 유도에 반응하도록 신경체계가 조직화되어 있다. 그리고 성체가 되면 이러한 특징들이 사라진다. 그런데 성체가 되어도 베이비 스키마의 특징을 유지하는 동물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고양이이다. 고양이가 성체가 되어도 귀여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는 색, 셸레 그린
자연을 상징하는 초록색, 그 이면에는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19세기 인상파 화가 폴 세잔의 당뇨, 클로드 모네의 실명, 빈센트 반 고흐의 정신병은 모두 이것을 즐겨 사용한 결과였다. 정복자 나폴레옹도 이것때문에 방 안에서 죽어갔다.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셸레 그린'이라는 초록색 물감이다.

셸레 그린은 19세기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물감, 벽지, 옷, 장신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흔히 쓰이던 녹색 안료이다. 비소를 연구하던 스웨덴의 과학자 칼 빌헬름 셸레가 1775년 녹색 화합물 비산구리를 발견한 데서 유래했다 셸레는 이 초록색에 자신의 이름을 따 '셸레 그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색은 곧바로 인기를 얻어 원단, 벽지, 종이 , 염료, 음식 색소 등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셸레 그린을 즐겨 사용한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었는데 많은 인상파 화가가 당시 물감에 쓰였던 수은, 납, 비소 등에 중독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세잔은 만성 비소 중독으로 당뇨병을 앓았고 모네는 눈이 멀었다. 반 고흐는 정신병을 앓았고 그의 광기가 극에 달했을 때에 그는 물감을 직접 먹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이들이 비소에 중독되었다는 견해는 신빙성이 더욱 높아진다. 이런 위험한 비소가 들어간 셸레 그린을 19세기엔 많이 사용했다.

19세기 초에는 영국의 거의 모든 주택에서 녹색 벽지가 사용되었다. 또한 초록색의 드레스를 많은 귀부인들이 입으며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죽음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20세기 말쯤에 와서야 셸레 그린이 죽음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됐다. 죽음의 녹색의 충격은 그 이후로 독극물을 상징하는 색이 되어 오늘날 독극물 표시에 녹색을 사용하게 되었다.

원래 빨대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만든 것
여름이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시원한 맥주이다. 요즘은 빨대로 맥주를 마시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맥주를 컵에 따라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빨대가 원래 맥주를 마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가? 빨대는 기원전 3000년경 최초의 문명이었던 수메르에서 처음 사용했다. 수메르 유적 발굴 도중에 수메르인이 맥주를 제조하고 나서 큰 병에 맥주를 담아 긴 빨대를 꽂아 마시는 모습이 새겨진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수메르인들은 맥주를 신의 선물이라고 여겨 주식처럼 즐겼다. 당시 생산하는 보리의 40%가 빵이 아닌 맥주 제조에 사용될 정도로 맥주는 수메르문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럼 수메르인들이 맥주를 왜 컵이 아니 빨대를 사용해 마셨을까? 그 이유는 당시 맥주를 제조하는 방식이 지금과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구운 빵을 가루로 만들어 물을 붓고 효모를 첨가해 맥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맥주에 침전물이나 부유물이 많았다. 수메르인들은 맥주를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다가 길고 가는 짚을 꺾어 중간층에 있는 맥주만을 섭취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빨대로 맥주를 마시는 풍습은 이집트로도 이어져 이집트의 왕들도 빨대로 맥주를 마셨고 이 빨대가 유적으로 발굴되기도 했다. 우리가 빨대라고 부르지만 영어로는 짚이라는 뜻의 스트로를 쓰는 이유가 바로 그 이유다.

간단하게 살펴본대로 이 책은 흥미롭고 재미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짧고 재미있는 50개의 이야기들은 잠깐잠깐씩 읽기에도 참 좋은 책이다.

알면 똑똑해지는 과학 속 비하인드 스토리

EBS 오디오 콘텐츠팀 지음
EBS BOOKS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2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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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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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수법 - 와카타케 나나미

코지 미스터리의 여왕이라 불리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장편 소설이다. 한국에는 이 책보다 2년이나 후에 나온 단편집 [조용한 무더위]가 먼저 나왔고 이전 작품인 이 장편 소설이 뒤늦게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은 40대의 여성 탐정 하무라 아키라가 살인곰 서점에서 일하며 겪고 마주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탐정이지만 전에 일하던 탐정사무소가 문을 닫자 잠정 휴업중으로 살인곰 서점에서 어쩌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내게 된 하무라는 어느날 하무라는 서점 점장 도야마로부터 고서를 판매하겠다는 집으로 가서 책을 받아오라는 문자를 받는다. 그래서 자전거를 돌려 점장이 말한 집으로 간 하무라는 그곳에서 폐기물 처리를 위해 온 두 사람을 마주한다. 폐기물을 처리하며 집에서 발견된 책들을 정리하던 중 폐기물을 꺼내면서 무너진 균형으로 집 바닥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그 현장에서 한 구의 백골 사체를 발견하게 된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먼지를 마시고 사고를 당해 하무라는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오래된 백골에서 남성 호르몬 수치가 높게 나온 것으로 보고 오래전 사라진 집주인의 남편으로 판단하지만 하무라는 예리한 추리로 그 남성으로 추정되는 시신의 정체를 밝힌다. 하무라의 조사로 그 집에서 일어난 사건을 파헤치게 되며 하무라는 무사히 병원을 퇴원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한 여자가 찾아와 그녀에게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한다. 의뢰를 한 의뢰인은 하무라가 입원한 병실에서 같이 있었던 노년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하무라에게 찾아온 여자는 바로 그 노년의 여인의 조카였다. 같은 병실에서 있으면서 하무라가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사건을 의뢰하려고 한 것이었다.
사건을 의뢰한 노년의 여인은 오래전에 유명했던 여배우였다. 왕년의 인기 여배우 후부키는 20여년 전에 사라진 자신의 딸 시오리를 찾고 싶다고 했다. 후부키가 자신의 딸을 만나고 싶은 이유는 암 말기라 죽기전에 딸을 만나고 싶은 것이었다. 착수금으로 그녀에게 300만엔을 건내받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사건을 맡을 수 없는 하무라는 대형 탐정업체 도토에 의뢰하고 자신이 도토에 협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일을 맡는다.

사건을 조사하게 된 하무라는 하부키가 20년 전에도 형사에서 정년퇴직하고 탐정을 개업한 이와고란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건을 조사하던 그는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하무라는 그가 조사한 사건의 자료를 얻기 위해 그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내를 만나 얘기를 듣는다. 그녀는 하무라에게 자신의 남편도 찾아봐 달라고 한다.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받고 사건을 조사하던 하무라에게 한 여자가 접근한다. 구라시마 마미라고 하는 여성으로 나이대는 하무라와 비슷한 40대로 그녀는 연애사기를 당했다는 얘기를 하며 살인곰서점에 나타나 하무라에게 접근하고 당분간 살 집을 구한다며 하무라가 사는 쉐어하우스에까지 입주하게 된다. 시오리의 행방을 조사하는 그녀에게 경찰의 도청이 시도된 것을 발견하고 경찰은 곧 그녀에게 탐정법을 위반했으니 자신들의 수사에 협조하라며 협박을 한다. 경찰들은 하무라에게 그녀를 감시하며 경찰에 정보를 줄 것을 요구한다.

하무라는 실종된 시오리를 찾는 수사를 진행하며 한편으로는 자신과 함께 살게 된 수상한 여인 마미를 감시하게 된다. 시오리의 실종과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하무라는 시오리의 실종의 미스터리를 풀어간다. 사건을 수사할수록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을 알아가는 재미가 상당하다.

이 책의 다음 이야기인 [조용한 무더위]에서처럼 작은 사건들이 여러개 나오는 단편이 아니라 한 여인의 실종에 대한 사건을 해결하는 장편이라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여성 탐정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활약을 보는 재미는 괜찮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별의 수법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내친구의서재 펴냄

👍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추천!
2022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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