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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걷으면 빛 (성해나 소설)의 표지 이미지

빛을 걷으면 빛

성해나 (지은이) 지음
문학동네 펴냄

성해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작가다. 단편들의 분량이 기본적으로 많다. 해서 첫 소설집은 428페이지. 단편 여덟 편의 두께가 상당하다. 모든 게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술 잘 읽힌다. 『에픽』 4호에서 읽었던 「화양극장」을 잊고 있었는데,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그 작품은 역시 좋았다. 이런 대사가 나오니까,

"나는 오히려 좋아요. 우리가 나란히 앉아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요.
이목씨는 말했다. 사람들이 극장을 찾는 이유 중에는 타인과 같은 포인트에서 폭소하고 글썽이는 교류의 순간을 소중한 기억으로 여기기 때문도 있다고, 자신도 그렇다고, 그러니 여기서는 크게 숨을 쉬고 웃고 울어도 된다고." (67쪽)

이런 맥락을 공유하는 단편들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청년, 장년, 노년의 인물들이 종국에 서로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이야기를 담은 「당춘」, 한 할머니와 청년 여성이 함께 살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이야기를 담은 「오즈」,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써주세요"(376쪽) 하고 말하며 서로를 지탱했던 엄마와 친구들—그리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손을 건네는 딸의 이야기를 담은 「김일성이 죽던 해」.

그러니까 성해나 소설의 인물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나는 이제 살아내지 않고, 살아가고 싶어요. 견디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92쪽, 「화양극장」) 나도 그들처럼 살아가고 싶다!

P.S. 위수정의 소설집보다는 단편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이는 느낌은 적다. 해서 해설도 살짝 아쉬울 수밖에 없고.
2022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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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2023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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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2023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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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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