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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닮은 사람 (정소현 소설집)의 표지 이미지

너를 닮은 사람

정소현 (지은이)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들을 모아 한 권의 소설집을 만들 때, 무수한 순서와 조합이 가능할 테고, 작가와 편집자의 지난한 선택의 과정을 통해 내게 한 권의 책이 도달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소설집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각 단편을 따로 읽어도 좋고, 어떤 단편을 품은 채로 다른 단편을 이어 읽어도 좋은 책.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단편을 읽은 후 이 책이 어떤 '하나의 어렴풋한 이미지'로 내게 다가올 때! 그런 순간은 정말이지 좋다.

정소현의 소설집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그런 소설집이다. 첫 소설집과 두 번째 소설집 모두 그랬다. 실린 단편들은 끈끈하게 서로를 지탱하고, 작가의 말도 진짜 못 참겠고, 해설도 최고였다.

첫 소설집에 실린 단편은 주로 부정적인 유년기가 배경이 된다. 중심인물들은 태아기, 신생아기, 영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와 같은 인간발달의 과정에서 (조)부모에게 지속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받는다. 명시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명시적이지 않은 폭력까지 전부 아울러서. 그렇기에 그의 소설의 인물들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지나간 세월을 자꾸 생각해서 뭐 해. 오래전 일에 머물러 봐야 너만 손해야. 얼른 잊어."
"시간은 지나가지 않아요. 나는 여기 있는 게 아니라 갈기 갈기 찢겨 과거들 속에 흩뿌려져 있어요." (「너를 닮은 사람」, 69쪽)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 덧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거기'의 순간들에 편편이 존재한다. 그 순간들, 그러니까 삶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것이 미처 꿰매지 못한 상처이기에. 살아오면서 곪아버린 상처들은 자꾸만 현재에 발을 들인다. 인물들은, 이미 다 살아버린 것만 같다. 과거 이후의 삶이 과거에 저당되고 구속된 형국이기에. 정소현은 이를 정말 맛깔나게(이런 표현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적확하긴 하다) 서사화한다.

생각해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은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지 않으려고 매번 나를 타이르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겠고. 이 소설집에서는 주로 가족들이 서로 주고받는 폭력을 서사화하고 있으니 새어 나오는 아픔은 배가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처 준 적이 있으니까. 혹은 친하다는 이유로, 단지 그 이유만으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하지도 못할 일을 해버린 적 있으니까.

정소현의 소설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 게 좋았다. 해결책 따위는 없다. 우리는 그저 조각난 삶을 이리저리 기워가며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어째서인지 지금 나는 그런 비관이 좋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해설은 정말 기가 막혔다. 그의 방식으로 이 책을 독해하는 것은 무척 합당해 보인다. 소설집 해설을 읽을 때 내가 기대하는 것은, 이 작품을 범주화해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일부 구축하는 일. 좋은 해설은 독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게 하고 본격적으로 사유를 시작하게 하는 것 같다. 감탄만 나왔다.)

*

정소현 소설의 좋음에 관해서는 다음 게시물에서 계속됩니···다.
2022년 7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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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2023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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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2023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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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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